8. 시장조사를 온 것 뿐이었는데.
시장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직물과 식량이었다. 직물로 만들기 전의 실꾸러미나 털뭉치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수량이었다.
칼마르는 모직물의 가공 무역도 관여하고 있는 터라 바다와 강을 통해 모이는 털뭉치는 가공을 기다리며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장의 한 편은 각종 곡물과 가공된 식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갓 수확한 그대로의 밀과 쌀, 보리와 귀리, 가루를 낸 곡물 포대, 여러 종류의 기름과 훈제된 고기가 연이어 늘어선 상점마다 종류별로 쌓여 있었다.
그 거대하고 다양한 무더기를 지나면 좀 더 아기자기한 품목들이 나온다.
각종 약재와 야생 동물의 다양한 부위, 향료의 재료가 되는 나무와 풀 등 보기만 해서는 뭐가 뭔지 모를 것들을 드러내놓고 또는 상점의 구석에 숨기듯이 진열해 놓았다. 아는 사람에게는 보물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잡동사니 그 자체였다.
내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들 사이에 있었다.
정력제 겸 강장제.
원래는 급체했을 때 뜨거운 물에 타서 먹는 약재였는데 여기에 일정 비율의 술을 섞으면 강력한 강장제 겸 정력제가 된다고 한다.
정력제 중에는 사람의 원기를 끌어내어 일시적으로 활력을 돌게 만들어서 결국은 몸을 상하게 만드는 놈도 있는데 그런 것은 독이나 다름없다.
내가 만들 이것은 허약한 사람을 위한 강장제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통을 걷는 강장제 겸 정력제다.
그 따위 독인지 약인지 애매한 그런 물건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귀물인 것이다.
회귀 전에 한참 통행세를 걷으면서 잘 나갈 당시에 처음으로 알려진 처방이니 현재는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보면 된다.
약재를 선점하고 적당히 가공해서 사업을 벌이면 어떨까 싶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잘 팔아먹을 수 있을 것 같고, 적당한 시기에 유통망의 명목으로 헐값에라도 다른 상인에게 넘기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신 판금 갑옷 등을 판 돈이 들어올 테니까 그걸 기초 자금으로 삼아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무턱대고 시장에 온 것인데,
이거 시장 조사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일단의 병사들이 3층짜리 상점 건물 하나를 덮치고 있었다. 일부는 상점 입구에서 대치 중이었고 일부는 사다리를 타고 곧장 건물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외곽에는 칼마르 시의 경비병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심지어 말을 탄 기사도 몇 명 그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며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게 대기 중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풍기는 분위기도 달랐지만 그들이 같은 편이라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들의 적은 상점 쪽 사람들이었다.
상점 건물 입구에는 건장한 사람들이 방패와 칼을 들고 상점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막고 있었다.
이미 접전이 벌어졌었던지 바닥에는 쓰러진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나는 차고 온 짧은 검과 단도를 다시 확인했다. 아쉽게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가죽 조끼를 걸쳤으니 급한 대로 임시방편은 되었다.
보아하니 칼마르의 공권력이 상회 하나를 때려잡는 중이었다.
나는 지금 칼마르 편이니까 이럴 때 끼어들어서 생색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싸워야 한다면 한 사람 몫 이상은 해야 내 평판에 누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
2층의 창가에 서서 밖을 살피던 브람 상단의 상단주 브람은 죽어 넘어진 부하들을 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아직은 건물 입구쪽에서만 사망자가 나왔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몰린다면 여기서 몇 명이나 살아나갈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상단을 공격하는 자들은 이곳 칼마르 시의 상인들이 보낸 사병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같이 술을 마시며 거래를 의논하던 자들이 오늘은 사병을 보낸 것이다.
상인들이 돈으로 꾸린 무력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그들 중에는 웬만한 기사 못지 않는 실력을 가진 자도 섞여 있기 때문이다.
명예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칼마르 시의 경비대.
사방의 길은 칼마르 시의 경비대가 틀어막고 있고, 그 중에는 기사까지 끼어 있었다.
이 싸움이 개인간의 다툼이 아니라 칼마르 시의 의지이며 절대로 도주는 허용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평소에 경비대에 적당히 기름칠을 해왔으니 이런 상황이라도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을까?
설마?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기사까지 동원하다니. 칼마르 놈들. 역시 알아챈 것일까?"
"아마도?"
"내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뿌린 돈이 얼마인데!"
"비밀은 상대방도 지켜줘야 비밀이겠지. 고문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자를 나는 본 적이 없네. 몰려온 꼴을 보아하니 나불나불 다 지껄인 것 같기는 하군."
브람의 옆에는 선제후인 글렌 공작이 보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브람의 굳어진 얼굴을 흘낏 보고 혼잣말처럼 대답을 했다.
그러나 브람은 그의 혼잣말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 했다.
브람 상단의 상단주인 브람은 10여 년도 더 전부터 상품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면서 주기적으로 칼마르의 상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주력 상품은 암염.
적당한 가격과 손해를 보더라도 계약을 이행하는 확실성으로 점점 거래 규모를 늘려나가고 경쟁 상인도 여럿 잡아먹었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는 칼마르의 항구 근처 시장에 아예 건물을 하나 매입하고 정식으로 상회의 간판을 내걸었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이름의 기득권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칼마르의 상계에 오랜만에 등장한 신참은 제법 많은 시간 동안 공을 들인 덕분인지 나름대로 고인물들의 인정을 받아가며 안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브람 상단의 배후가 선제후인 글렌 공작이라는 소문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브람 상단의 족쇄이기도 했다. 칼마르의 고인물들은 브람 상단을 거래 대상으로만 취급했을 뿐 그들 중의 하나로는 대하지 않았다. 칼마르 상인들 사이에 흐르는 정보의 습득에서 언제나 한 발 늦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위험한 시기에는 집중적인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결과가 지금 이 꼴이었다.
쾅!
큰 소리를 내면서 2층 창문에 사다리가 거칠게 놓여졌다.
거의 동시에 상인들의 사병이 사다리를 타고 2층 사무실로 뛰듯이 올라왔다.
그리고 올라오자마자 곧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명예보다 돈이 더 필요한 자는 칼마르 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브람의 부하들 중에도 그런 자가 여럿이었다.
그런 자 중 하나가 창문 앞에 서서 방패로 밀어낸 것이다.
3층짜리 건물은 작은 성채나 다름 없었다.
농성하는 성을 점령하려면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크리스토퍼 경. 만약 우리가 항복한다면 어떻게 될까?"
"목이 매달리겠지. 칼마르의 멍청이들은 새로운 영주에게 보여줄 실적이 필요해. 계속 신뢰받는 신하로 남아 있으려면 여백작에게 자신들의 유능함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냥 첩보만 수집하고 있었다는 말은 안 믿어주겠지?"
"당연하지. 전대 백작의 사고사를 우리에게 뒤집어 씌우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 걸."
"쯧쯧. 애초에 소금을 밀매하던 놈들이 양지에 머리를 들이민 것부터가 잘못이었나? 그냥 소금 밀매나 하지 뭘 받아먹을 것이 있다고 귀족 밑에 가서 이 고생이람."
"우리 어르신이 자네에게 남작위와 영지를 약속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게. 자네 부하들은 범법자가 아니라 선량한 영지민이 되겠지. 그걸 받아 먹겠다고 자네가 이 고생을 하는 거야."
"하. 지랄. 부하들에게 면목이 없군 그래. 명예보다 돈이 좋다고 해놓고 막상 나는 명예를 쫓고 있었으니."
브람은 한탄을 내뱉었지만 그의 태도와 달리 아직 마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비록 포위된 성채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지만 그에게는 약속된 구원군이 있었다.
브람의 부하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두목! 버티면 됩니다! 오늘은 창고로 밀염이 들어오는 날입니다. 형제들이 지원하러 올 겁니다."
"그래. 형제들. 우리의 형제들이 온다. 조금만 더 버티자!"
브람은 자신의 대도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크리스토퍼 경 역시 자신의 전투용 망치를 들고 그를 따라갔다.
*
"억!"
짧은 비명과 함께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동료가 무너졌다. 방패 뒤에서 튀어나온 단창에 배를 찔린 것이다. 얼마나 기세가 맹렬했던지 가죽 갑옷은 천으로 된 옷과 다름 없이 구멍이 나고 말았다. 가죽 갑옷보다 보드라운 뱃가죽 역시 구멍이 뚫렸다. 구멍이 뻥 뚫린 남자는 일어나지 못했다.
제법 명망있는 상인의 사병으로 평소에는 창고를 지키거나 상행의 호위로 일했던 패터는 옆의 동료가 쓰러지자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칼을 휘둘렀다.
옆의 동료 때문에 칼을 편하게 휘두를 공간이 안 나와서 쩔쩔 맸지만 막상 옆이 비어버리니 당장이라도 창이 찔러올 것 같은 위태로움에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칼마르 시 같이 치안이 안정적인 곳에서의 창고지기는 지루한 일이 되기 쉽지만 주기적으로 떠나는 상행의 호위는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임무였다. 적어도 실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도적이나 강도는 겪을 만큼 겪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 임무는 쉽지가 않았다. 그와 같이 경험이 많은 자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사방이 경비대고 기사까지 있다.
상인들이 동원한 사병은 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몇 배를 상회한다.
대개 이 정도로 세가 기울면 도망을 치거나 항복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상점의 입구를 지키는 자들은 악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도 정말 독하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 자들이었다.
경험상 이런 자들은 정말 위험했다.
광신으로 미쳤거나 약에 미쳤거나 신념에 미친 자들이다. 간혹 돈에 미친 자들도 있기는 한데 정도는 덜하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 자들이다.
"멍청한 놈들 비켜라!"
사병들 중에서도 선임 노릇을 하던 자가 건물의 입구에서부터 교착상태에 빠진 채 도무지 진전이 없는 꼴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방패 따위는 단숨에 박살을 낼 것 같은 거대한 도끼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그 아래에 사람이 있다면 분명 두 조각이 날 것이라는 점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막혀버렸다.
캉!
그 거대한 도끼 못지 않게 거대한 검이 도끼의 공격을 튕겨내고 오히려 검에 달린 커다란 손잡이로 상대방의 미간을 찍어버렸다.
아무리 전투 중이라는 상황을 상정하더라도 이마까지 으깨지는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라서 뭔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을 이마까지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단지 공격해 들어간 우리편이 얼굴이 뭉개진 채 쓰러졌다는 사실에 상대방의 실력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인상을 쓰는 정도였다. 간혹 예민한 자들이 뭔가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에 몸을 떨었을 뿐.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브람의 거대한 검은 휙휙 회전을 하며 사람을 찍어댔다.
지금까지의 대치 상황은 실력자가 나서기 전의 줄다리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듯 가슴이 박살난 사람, 머리가 깨진 사람,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이 속출했다.
대치하고 있던 양편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상인들의 사병은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연신 뒤로 물러섰다. 사병들 사이에서 선임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허무하게 쓰러지곤 했다.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결국 건물의 입구에서 벌어진 전투는 순식간에 대로변까지 밀려났다. 칼마르의 경비대가 진치고 있는 곳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