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벼락부자는 신중하게 지뢰를 피했다.
대박이었다.
나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물론 진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당분간 돈걱정 없이 살 정도는 되었다는 뜻이다. 도적들이 내게 돈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관례상 도적을 토벌하는 경우 일반적인 전리품은 공동으로 모았다가 참가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
그러나 여기에 예외가 있는데 적의 우두머리나 그에 준하는 자와 싸워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경우, 승리자는 상대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독차지 할 수 있다.
내가 카알을 때려잡은 경우는 너무도 명백하게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였다. 도와준 사람도 따로 없어서 지분을 나눠줘야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카알이 걸치고 있던 갑옷과 무기는 모두 내게 주어졌다.
"이게 바로 그 전신 판금 갑옷이군요."
"그렇습니다. 수리가 필요하지만 품질은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하더군요. 뭔가 새로운 방식의 열처리를 해서 화살도 튕겨낼 정도로 강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치고 신발에도 구멍이, 허리에도 구멍이, 심지어 투구는 찌그러졌군요. 수리 비용이 장난 아니게 들겠습니다."
"마틴 님. 그냥 알아서 다 팔아주십시오.
"크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윌리엄 경. 주문품이라면 기사의 몇 년 수입액을 상회할 정도로 비싼 물건이지만 이 갑옷은 타락한 기사가 쓰던 갑옷인데다가 파손이 심해서 가격이 많이 떨어질 겁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판금 갑옷은 판금 갑옷이니까요. 아무리 가격이 헐해도 제가 지금껏 가져보지 못했던 금액일 겁니다."
"무기까지도 함께 처분하겠습니까?"
"예. 제 전리품은 모두 처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내가 분배 받은 전리품의 판매를 모두 객주 마틴에게 부탁했다.
내가 받은 전리품의 가치가 아무 상인에게나 맡기기에는 지나치게 큰 데다가 마틴과 만났을 때부터 마틴과 잘 사귀어 놓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마틴은 회귀 전의 나조차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발이 넓은 상인이었다. 과연 그 이름값이 헛소문은 아니었던 듯 마틴을 통해 카알 토벌이라는 중요한 사건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 회귀 전과 크게 달라지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원래는 카알이 토벌대를 막아내고 오히려 토벌대의 기사 3명을 모두 죽이는 기염을 토한다.
그 결과 칼마르 백작은 달라벤 강에서 카알과 같은 짓을 하려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사태를 맞이했다.
그들 중 하나가 나였고
부끄럽지는 않다.
암염광산에서 도망 나와서 길에서 죽어갈 때 구명의 은혜를 입었으니 한 패로 가담하는 것이 당연했고, 선제후들간의 다툼에 줄을 선 귀족들과 얽혀서 개판이 된 지역 상황이다보니 자력구제가 일상이었다.
나는 먹고 살려고 나선 사람들과 함께 했다.
도덕을 찾다가 앉아서 가족과 함께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 때는 나쁘지 않았다.
칼마르에서 흐르는 물류에 빨대를 댄 것만으로도 한 마을이 먹고 살 정도였으니까.
먹을 것이 하늘이라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그 끝도 좋았다면 행복했을텐데.
농민 반란으로 취급되면서 진압이 너무 잔인해졌다.
그런데도 카알이라는 놈은 기사랍시고 큰소리치면서 잘만 지냈지.
분명히 앉아서 죽기 싫어서 나선 우리와 달리 그 놈 배후가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카알을 생포했다. 그리고 그 놈은 칼마르 시까지 끌려와서 목이 매달렸다.
역사가 바뀌었다. 그리고 내 처지도 달라졌다. 전에는 칼마르를 털어먹는 입장이었다면 이번에는 칼마르 편에 서는 쪽으로 입장을 새롭게 한 것이다.
목이 한 번 잘려봤는데 실패한 길을 다시 가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월리엄 경. 전리품의 판매 대금이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텐데, 아무래도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까 말입니다. 그 동안 그냥 쉬실 건가요?"
"아직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마틴 님이 주선하시는 것이라면 움직여 봐야지요."
"그렇다면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가능한 도와드려야지요. 오히려 이번처럼 감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미 마틴과의 첫만남에서 결정했듯이 나는 마틴과 잘 사귈 수 있다면 환영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지는 몰라도 카알의 토벌처럼 영양가 있는 일이 되리라고 충분히 기대할 만했다.
마틴처럼 발이 넓은 상인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사소한 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과연 내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마틴이 내게 제안한 것은 결투 재판의 대전사였다.
그것은 잘하면 명성도 얻고, 쓸만한 연줄도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윌리엄 경은 기사 훈련을 받으셨다니까 결투 재판에 대해서도 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상식 정도입니다. 복잡한 것은 모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시겠지만 결투 재판 자체가 관습법인지라 적용 범위가 넓고 애매모호해서 반역죄조차 결투 재판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까지 있었지요. 그래도 확실한 것은 민사와 형사 부분만큼은 결투 재판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투 재판이 귀족에게 너무 유리하기 때문에 평판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결투 재판은 피한다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평판을 생각하는 정상적인 귀족이라면 결투 재판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특히 강간죄 같은 것이 엮인다면 말입니다."
"피해자가 자기 대신 싸워줄 대전사를 구하는 모양이군요."
"정확히는 피해자의 부모가 대전사를 구하는 중입니다. 피해자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는 내 스스로가 눈치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특히 악의를 가지거나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작업을 치는 사람을 잘 분간해 내는 편이었다.
수십 년간 영업맨으로 일선에서 구른 짬밥이 살아가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저곳이나 이곳이나 살아가는 사람은 그다지 다를 바가 없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내 입장에서 단언하자면 지금 마틴은 작업을 치고 있었다.
가끔 다른 생각으로 빠지는 눈빛, 살짝 어색한 손동작, 평소보다 좀 더 많은 미소, 좀 더 친근하고 호소력 있는 어조.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내 가치가 아깝지는 않을까? 그러나 뭔가 마틴 나름대로의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게 호의일지라도 말이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 겁니까?"
"행실이 나쁜 귀족 젊은이가 평민 여자를 강간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 당했음을 알리고 자살했습니다. 여자의 오빠는 이 일을 시의 재판부에 고소했습니다. 귀족 젊은이는 자신에 대한 모함이라며 무고죄로 오빠를 맞고소했습니다. 그리고 결투 재판을 신청했지요. 귀족 젊은이가 제법 실력이 있는 자인데다가 오빠는 상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대전사를 구하는 중이지요."
"마틴님은 제가 오빠 되는 사람의 대전사로 나서기를 원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윌리엄 경에게 매우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좋은 기회라는 마틴의 말에 흥미가 싹 가셔버렸다.
좋은 정보, 좋은 아이템, 좋은 기회.
사기꾼이 흔히 치는 작업 멘트이고 생각보다 쉽게 먹혀 들어가는 말이다.
욕심에 눈이 가리면 장님이 되니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싶으면서도 그냥 질러버리고 남 좋은 일을 시켜주고 만다.
호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알지 못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수는 없다.
귀족과 얽힌데다가 치정문제다. 어떤 지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나는 마틴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글쎄요. 함부로 남의 송사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윌리엄 경. 경이 기사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 기사는 아닙니다. 경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니지요. 단지 윌리엄 경의 공적이나 실력을 보건대 조만간 기사 서임을 받으실 것으로 보기 때문에 다들 존중하는 의미로 경이라고 불러드리는 겁니다. 기사 서임 자체는 자격만 증명한다면 어렵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사 서임을 누구에게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기사라고 하더라도 왕에게 기사 서임을 받은 기사와 시골 영주에게 기사 서임을 받은 기사가 같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명성이 필요합니다. 이번 사건은 매우 자극적인 내용입니다. 사악한 귀족 자제와 순결한 처녀, 복수하려는 오빠와 오히려 보복 당하리라는 위협, 그리고 정의를 위해 대전사를 자처하는 기사. 결투 재판에서 승리까지 한다면 완벽하겠지요. 여러 지방에 걸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윌리엄 경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이번 토벌로 윌리엄 경의 실력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지만 그것을 명성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판이지요. 윌리엄 경. 경이 고위 귀족에게서 기사 서임을 받고 싶다면 명성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뭔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칼마르에 자리를 잡고 싶은 것이지 명성을 얻고 출세하기를 바란 것이 아닙니다."
내 거절에 마틴은 납득을 했다는 태도를 취하며 물러섰다.
*
마틴은 조급하지 않기로 했다.
강요는 거부감을 넘어 반발심까지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처음에 세웠던 계획은 포기하기로 하자.
불량한 귀족과 척져서 곤경에 처했을 때 백작가에서 기사 서임을 하는 방법으로 손을 내미는 그림은 모양이 괜찮아 보여서 아쉽기는 했다.
윌리엄이 칼마르에 계속 머문다고 하니 좀 더 나중에 백작가의 가신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마틴은 다음을 기약했다.
*
나는 며칠 후 칼마르의 절반을 차지하는 항구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외국과 거래하는 상인들의 상점이나 창고, 여러 상인 집단의 본부를 겸한 상점과 창고들, 왕과 귀족들의 대리인들이 낸 사무소 등 칼마르의 일반 시민들이 이용하는 시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었다.
막대한 상품과 돈이 흐르고 머무는 칼마르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나는 이곳에 일종의 시장조사를 나온 참이었다.
나 자신에 대해 알았으니 내가 살아야 할 곳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 그렇다.
이제는 내가 제법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무력을 팔아서 일가를 이루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쩌면 옛날, 아니 미래의 부하들을 데려다가 부려먹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자꾸만 행복회로를 돌리게 된다.
그러나 일가를 유지하는 것은 개인의 무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돈과 인재는 필수다.
말 위에서 나라를 세울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용병대를 만들어서 용병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일개인의 강한 무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권력자의 도구로 쓰일 뿐.
혹시 그 무력이 일당백, 일당천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항구 쪽의 시장을 찬찬히 뒤지듯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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