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체력은 MAX. 불안도 MAX.
[체력 : MAX]
상태창에 나와 있던 정보 중 하나다.
처음에는 그냥 체력이 최고로 차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생명력이 가득 차 있다거나.
부상을 입거나 과로를 하면 MIN이나 MID따위로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칼마르까지 오는 동안 체력의 상태가 변하는 일이 없었다.
짧지만 강렬한 전투를 경험하며 사람을 죽였을 때도,
잠을 제대로 자지 않고 며칠씩 이동을 했을 때도,
체력의 상태는 언제나 MAX였다.
분명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살짝 피곤을 느끼기도 하고, 강렬한 전투 후의 가벼운 탈력감을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체력 : MAX]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그 동안 계속 의문이었다.
······하나 짚이는 것이 있기는 했다.
힘이 세졌다.
내가 그것을 처음 느꼈을 때는 샌드호그에서 떠나기 위해 물건을 정리할 때였다.
전투 해머가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게 일반적인 전투 망치와 달리 제법 크기가 있어서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버거운 감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진 것이다.
그냥 편하게 휘두를 수 있었다. 심지어 좀 가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 적당히 납득하고 넘어갔다.
몇 년 동안 야전에서 구르다가 돌아온 셈이니까 몸도 더 전투에 적합하게 변하고 무기를 다루는 감각도 좋아졌나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찜찜함은 구석에 밀어둔 채.
그러나 숲에서 촌장 무리를 상대할 때 더 이상 이 찜찜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의 몸이, 신체의 위력이 크게 변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 너무 쉬웠다.
저항하지 않는 허수아비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홀로 떨어진 적의 목을 비틀 때도 그 자는 분명이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지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도끼를 던졌을 때 뭔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세게 던졌다면 저 머리가 터져나갔을 것이라고.
마치 대포알에 맞은 것처럼 순삭되었을 것이라고.
그냥 알 수 있었다.
힘이 세졌다.
아주 많이.
MAX.
그러니까 지금 이 몸으로 낼 수 있는 MAXIMUM의 가능성을 끌어내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까?
그래서 MAX인 걸까?
사실 나는 그 때 불안함을 느꼈다.
갑자기 힘이 강해진다면 힘을 사용하는 몸이 오류를 일으킨다.
아무래도 힘을 사용하는 감각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이니까 자신이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힘과 실제로 사용하는 힘이 차이가 나게 된다.
그래서 갑자기 힘이 강해진 초인이 몸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클리셰가 창작물에서 종종 나오는 것이다. 그게 합리적이니까.
그러나 나는 그런 괴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냥 사용할 수 있었다.
달걀을 손에 쥐고 나르는 것도, 나무젓가락으로 콩을 집는 것도 가능했다. 여자의 몸을 고통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애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확실히 비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규격 외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신체적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게 현실이니까.
상태창은 그런 내 상태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하자.
뭔가 내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상태창이 알려주겠지.
걱정은 그만하기로 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노력 없이 능력을 얻었다는 것은 그 능력이 내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능력이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런 어리석은 기대를 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 원래 받았어야 할 것을 뒤늦게 받은 것이 아닐까?
아무 것도 모른 채 맨땅에 헤딩하던 그 시절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닐까?
아주 많이 사심을 담아서 기원한다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이곳에 보낸 누군가가 뒤늦게라도 자기 일을 한 것이기를!
혹시 시스템 같은 것이 있어서 버그 났다가 회귀를 하면서 리셋되어서 버그가 고쳐진 것이기를!
제발!
* * *
달라벤 강에 자리잡은 검문소는 깔끔하게 제거되었다.
망루와 목책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서 처음 본 사람은 여기에 뭐가 있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통행세를 걷던 자들은 수적으로 간주되어 모두 목이 매달렸다. 특히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타락한 기사 카알은 목이 잘려서 벌판에 버려졌다. 그의 장원은 압류되어 피해를 입은 상인들에게 배상으로 주어질 예정이었다.
이렇게 실력을 행사함으로 칼마르 시는 자신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들이미는 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여백작은 이 일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예상과 너무 다른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예상보다는 좋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겠군요. 토벌단이 큰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카알이라는 자는 명성에 비해 부하들을 이끄는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작님.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무너진 것으로 보아서는 돈과 폭력을 사용해서 억지로 사람들을 모아놓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카알이 제압 되니까 전투랄 것도 없이 끝나버렸지요."
"린드스톰 경의 말이 맞습니다. 카알이라는 자가 핵심이고 또 전부였던 것이죠. 윌리엄이라는 기사 지망생이 초기에 카알을 상대해서 제압한 것이 컸습니다. 사실상 토벌은 윌리엄이 다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스터 요한의 말에 다들 동의를 표시했다. 윌리엄의 공적이 이번 토벌에서 가장 크다는 것에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상인들이 모셔왔다는 3명의 기사는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만약 마틴이 뒤늦게 윌리엄을 토벌대에 끼워넣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하기조차 두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상인들을 과대평가한 모양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저부터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린드스톰 경이 책임질 일은 아닙니다. 관행적이기는 했지만 상인들에게 너무 큰 권한을 줬던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달라벤 강에 대한 문제를 백작인 내가 직접 처리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맡겨서 처리하려고 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고 무책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백작님. 그렇지 않아도 상인들에 대해 한 번 짚어보기는 해야 했습니다. 토벌이 성공하기는 했지만 석연치 않았던 점도 있고 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는 중입니다."
"마스터 요한. 석연치 않았던 점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정보가 센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입니다."
요한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대 백작이 죽은 지 1년이 지났다.
사고로 죽었다지만 그게 사고인지 암살인지 확신할 수 있는 자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사고일 개연성은 높았다.
선대 백작은 상인에 가까운 성향이었고, 승마는 기본 소양에 지나지 않았다.
뭔가에 갑자기 놀란 말이 날뛰고 선대 백작이 낙마하는 것.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낙마로 인한 큰 부상.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부상이 없는 쪽이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하루도 안돼서 사망까지 했으니 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몇몇 사람들은 암살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낙마 같은 불확실한 방법으로 암살을 꾀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기에 의심은 의심으로 그쳤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대 백작은 입장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각오하라는 협박을 두 명의 선제후로부터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낙마하기 바로 며칠 전에도 그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었다. 물론 은유와 암시로 점철된 예의 바른 안부 편지였지만 의미하는 내용은 예의만큼이나 살벌했다.
그래서 사고였구나 싶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암살일 가능성, 적어도 협박을 하려다 사고가 터졌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도 성 내에 암약하는 자들을 잡아내지 못했지요?"
"의심 가는 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확증이 없습니다. 성 내에서 정원을 가꾸는 자들조차 몇 대씩 내려온 가문이다보니 의심만으로 손을 대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습니다."
칼마르 백작가는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다.
지방의 유력자였던 시절까지 포함한다면 사실상 칼마르와 역사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닌 가문이다.
그러니 이런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대를 이어 일하는 것이 드물지 않다. 오히려 신입으로 일하는 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마스터 요한은 백작가를 구성하는 토대 같은 자들에게 손대기가 영 껄끄러웠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계속 정보가 새고 서로간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문제가 컸다.
백작 후계자의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후계자는 결단을 미루기로 했다.
"아직은 좀 더 두고 보도록 하지요. 신뢰를 한 번 잃으면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마스터 요한이 좀 더 고생해 주세요. 그런데 정보가 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토벌단이 습격하기 얼마 전에 망루를 건설하던 영지민들이 일제히 철수했습니다. 모두 장원으로 돌아간 것이지요. 목책에 남은 자들은 모두 카알이 거느린 도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벌단의 동정에 대해 알려주는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벌단의 출발은 기밀이었으니까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상인들도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군요."
후계자의 차가운 어조에 린드스톰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
"아무래도 상인들이다보니 다른 곳과 연이 닿은 자들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영지의 행보에 선택지가 많아지는 것이니까요. 단지 문제는 선대 백작이 서거하신 후 백작님께서 아직 정식으로 백작위를 계승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다."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공녀 리네아는 차가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린드스톰의 조언은 선대 백작이 서거한 바로 다음날부터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 내용이었다.
즉시 백작위를 계승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조언을 무시하며 1년 넘게 시간을 끌어왔다.
그래서 모두가 그녀를 백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녀는 아직 백작이 아니었다.
선대 백작의 유일한 자녀이고, 4촌 이내에는 혈족도 없기에 제국법으로나 계승법으로나 종법으로나 그녀가 유일한 후계자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한 가지만 갖춘다면 그녀는 곧장 백작이 될 것이다.
바로 남편.
단순한 작위의 상속이라면 혼인 여부가 상관없지만, 영지의 상속은 달랐다.
제국법에 따르면 기혼자만이 영주가 될 수 있다. 만약, 미혼이라면 1년의 유예를 둔다.
칼마르 백작위는 단순히 작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칼마르의 백작.
그 이름 그대로 칼마르와 그 주변 일대를 아우르는 영역이 칼마르 백작위의 영지로 따라 붙는다.
그러니 리네아 공녀가 백작위를 상속받으려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공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백작위를 받게 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백작위는 계속 공석이고 때문에 영지의 운영은 차질을 빚고, 그만큼 약점을 노출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모두가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혹시나 리네아 공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기에 모두가 입에 올리지도 않는 문제였다.
"토벌이 끝나니까 진짜 중요한 문제가 해결을 기다리는군요."
"이미 법적인 유예기간은 지났습니다. 어차피 황제도 궐위 중인 마당에 따질 사람이 있으랴 싶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렇겠지요.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며 시간을 끄는 것도 이제는 한계인 것 같군요. 자문위에서 적당한 사람으로 추천해 주세요. 한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은 칼마르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중립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금고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자문위에서 추천해 주시는 사람은 그것에 동의해야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백작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작님."
이너 서클에서의 합의가 끝나자 방문객들은 집무실을 떠났다.
그리고 장래의 여백작, 리네아 공녀, 18세의 소녀는 그들이 떠난 집무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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