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규격 외는 규격 외가 아니다.
카알은 자신이 규격 외임을 검을 들던 때부터 알았다. 종자일 때 모시던 기사를 때려 눕힐 정도였으니까. 집안의 배경이 없었다면 그의 커리어는 그 때 끝장이 났을 거다.
그러나 그 일은 그럭저럭 덮어졌고, 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기사가 되었다.
기사들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기사가 말이다.
기사 한둘은 우습다. 한꺼번에 셋은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길 수 있다. 넷은 학실히 무리다.
그래서 패터슨 남작은 그가 이길 수 있도록 약간의 수작을 부렸다고 했다. 이곳에 나타난 3명의 기사가 그 결과일 것이다.
4명이 아니라 3명.
패터슨 남작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이제 카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순서였다.
저 기사들을 부숴놓으면 끝이다.
목책에 의지해서 용병을 견제하는 정도는 아무리 믿을 수 없는 부하들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맛도 충분히 보게 해줬으니까, 저 단순한 머저리들은 돈을 위해서라도 기를 쓰고 버틸 것이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목책을 부수고 난입한 애송이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부하들의 사기가 무너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앞에서 적들이 달려오는데 활을 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기꾼 출신의 약삭빠른 몇몇은 벌써 몸을 뺄 궁리는 하는지 슬쩍 뒤로 물러난다.
이대로는 용병들이 목책에 들이닥치는 순간 모조리 도망가는 꼴을 구경해야 할 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력을 믿고 싸울 뿐.
그리고 저 놈, 얼굴도 매끈하니 나이도 어려 보이는 것이 전투 경험을 쌓았으면 얼마나 쌓았겠나. 기껏해야 모시는 기사에게서 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겠지.
힘이 세더라도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는 어떻게든 잡아먹을 수 있다.
내 검이 먹은 피가 얼마인데.
그래서 카알은 목책에서 기둥을 잡고 뛰어내렸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정도로 여유 있는 상항이 아니었다.
부하들이 도망치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
나는 등에 지고 온 전투 해머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다. 한 쪽은 망치머리, 다른 한 쪽은 창끝처럼 날카로운 스파이크로 되어 있는 흉악한 놈이었다.
왼쪽의 아래팔에는 작은 방패를 가죽 손잡이로 고정시킨 상태였지만 원체 작은 방패라서 왼쪽팔을 자유롭게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내가 자세를 잡기 무섭게 카알이 쇄도해 들어왔다.
시작은 대검이었다.
목책에서 내려온 카알은 자기 키에 육박하는 거대한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막는 것만으로도 엿 되겠다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무기였다.
맞기만 한다면 사람 정도는 단숨에 두 동강이가 날 것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맞기만 한다면 말이다.
방어 자체를 도외시하듯 대검은 연달아 크게 원을 그리듯 회전하며 나를 노렸다. 대검의 반경 안에만 들어온다면 단숨에 토막을 내버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공격이었다.
나는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대검을 피하다가 틈을 보아 앞으로 달려들었다.
캉!
내려치는 대검을 작은 방패로 비껴 흘리면서 전투 해머로 허벅지를 쳤다. 판금 갑옷에 구멍이 뚫리면서 피가 솟았다.
"윽!"
억누른 신음이 투구 속에서 새어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 그 속에 있었다.
당연했다.
판금갑옷은 기사를 무적으로 만들어준 존재다.
화살을 쏘아도 튕겨 내 버린다. 검으로 쳐도 끄떡없다. 망치로 두드려도 조금 찌그러지고 만다. 곡괭이로 내리 찍으면 좀 효과가 있을까?
방패 같은 것을 들지 않아도 걱정 없이 적들을 향해 닥치고 돌격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전투 해머 따위에 구멍이 뚫려?
물론 한 손으로 들기에 버거워 보이는 상당히 큰 전투 해머지만 그래도 이건 판금 갑옷인데?
나는 불신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춤거리는 카알을 향해 다시 전투 해머를 휘둘렀다. 발등을 가격하고 투구를 올려 쳤다.
발등이 우그러지는 듯한 고통은 턱을 가격하는 충격에 멀리 날아갔다.
카알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
"나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네. 카알."
"그렇습니까?"
"생각해보게. 황제의 제위가 주인을 찾지 못한지 벌써 10년일세. 자그마치 10년 동안 황제가 없었던 거지. 10년은 생각보다 긴 세월이야. 사람들은 황제가 없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은 제게 너무 큰 일이라서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습니다."
"카알 경은 나보다 더 큰 사람 아닌가? 큰 사람이니 큰 일도 해야지. 그래서 내가 갑옷까지 새로 맞춰주는 것이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카알을 향해 아재개그를 던지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넓적한 얼굴에 큰 눈을 가진 그는 여유 있는 태도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런 때가 있었지.
순진하던 때.
패터슨 남작도 좋은 사람이고 나도 충성 하나 밖에 모르던 때.
그 때 판금갑옷을 선물 받고 과분한 선물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쩔쩔 맸는데.
그런 판금갑옷이 망가지다니. 고치는 것도 만만하지 않을 거야.
내가 내려쳤을 때는 멀쩡했는데 왜 그 놈이 치니까 구멍이 뚫린 거지?
그 놈?
어?
카알은 눈을 떴다. 쓰러져 있던 것은 아주 잠시였던 것 같았다.
아직 그의 부하들이 목책 위에서 당황한 얼굴로 우왕좌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원에서부터 데려온 부하들조차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이 멍청하게 서 있었다.
다 끝난 것인가?
용병들의 함성이 아주 가까워진 것 같더니 말을 탄 기사들이 먼저 목책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용병들이 밀려들어왔다.
그제서야 목책 위의 부하들은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항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도망가는 것을 막는 용병에게 발작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자가 어쩌다 있을 뿐, 그마저도 떼거리로 달려드는 용병들에게 제압되어 어디 한 군데는 찔린 채 밧줄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
"이 놈 완전히 정신이 나갔는데?"
"꽤 이름이 있는 놈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소문이 과장되었던 모양이군."
"리암 경. 이 놈이 입은 갑옷. 이것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스벤의 말에 토벌단장이 반색을 하고 지시를 내렸다.
"그렇습니까? 윌리엄 축하하네. 백작님이 후하게 포상하실 걸세. 다들 이 자의 갑옷을 벗기고 포박하도록 해. 사나운 놈이라니까 단단히 묶도록."
토벌단장의 지시에 몇 명의 용병이 달려들어서 카알의 갑옷을 벗기려고 했다. 그때까지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카알은 용병들이 갑옷에 손을 대는 순간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이 놈들이!"
카알은 으르렁대는 듯한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서 갑옷을 벗기려던 용병의 멱살을 잡고 던져 버렸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다른 2명의 용병도 머리를 으깨어 놓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 끝난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기사들은 당황해서 검을 빼서 카알을 향해 찔렀지만 소용없는 공격이었다. 검은 갑옷의 겉면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카알은 몸통박치기로 기사 하나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엉겨 붙으며 쓰러뜨리려고 하던 기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성급하게 투구를 벗었던 기사는 피와 이빨을 날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
아오! 이 아재들이!
저게 지금 정신이 나가서 멍청해 보여도 당신들을 다 잡아먹었던 놈이에요.
저렇게 허술하게 대했으니 그 때 박살이 났겠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2명의 기사가 무력화된 후였지만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 전투 해머가 다시 카알을 향해 휘둘러졌다.
이번에도 카알의 갑옷은 전투 해머를 막지 못했다.
*
옆구리, 어깨, 투구.
카알은 다시 정신이 멀리 날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패터슨 남작.
당신 큰 일 났어.
이번에는 패터슨 남작의 넙적한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
전장 정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투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카알이 모아 들였던 자들은 카알이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들고 있던 무기도 던져 버리고 거추장스러운 갑옷도 벗어 던진 채 일단 목책에서 멀어지는 것이 목적인양 숲으로 벌판으로 흩어졌다.
어정쩡하게 남아 있던 카알의 부하들은 용병들이 무기를 겨누자 마자 손을 들어 버렸다.
포로로 잡히기 싫어서 저항하던 몇몇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싸운 자가 없는 셈이었다.
토벌단의 용병들은 도망치는 자들을 하나라도 더 잡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기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도 못했으니 고용주에게 할 말이 부족했다.
그들에게는 뭐든 내놓을만한 전공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성문 앞에 목을 매달아 버릴 도적은 괜찮은 전공이었다.
잡아들일 자들은 잡아들이고 그 와중에 몇몇은 죽어나가면서 전장 정리가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토벌단장은 일부로는 검문소를 뒤지도록 하고 일부로는 돌로 제법 쌓아 올린 망루를 무너뜨리도록 했다. 목책 역시 떠날 때 태워 버릴 작정이었다.
누구도 이곳에 다시 자리 잡을 수 없도록 하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이 놈의 돌덩어리 무겁기는 오라지게 무거워서 혼자서는 들지도 못하겠네."
"그걸 왜 들어? 지렛대로 무너뜨려야지 그걸 힘으로 하려고 하면 되겠냐?"
"우리 같은 사람은 안 되지만 윌리엄 님은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그렇지. 목책을 쓰러뜨린 것을 보면 보통 장사가 아니야."
전장 정리가 아니라 철거 작업이 되어버린 순간부터 용병들은 수군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전투라도 전투는 전투다.
기사까지 3명이나 있는 우세한 전력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목책까지 끼고 저항하는 도적들을 상대로 하는 전투였다.
재수없는 누군가는 죽을 테고 부상자도 상당히 나리라는 것은 다들 예상하는 바였다.
그런데 뭔가 어이없게 이겨버렸다.
이렇다 할 피해도 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성공보수까지 수령하게 된 용병들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었다.
"역시 그냥 도련님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아직 서임은 받지 않은 분이라는데?"
"마틴 객주의 보증으로 참가했다고 하더군. 우리와는 격이 다르신 분이겠지."
"그건 그렇고, 힘이 엄청나신 것 같아. 자네들도 목책을 넘어뜨린 것 봤나?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니. 보고도 믿어지지 않으이."
*
밝은 분위기의 용병들과 달리 기사들은 반성 중이었다.
한 명은 기절했다가 깨어났고, 다른 한 명은 당분간 죽도 먹기 힘들 정도의 중상이었다. 멀쩡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이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방심하다니! 기사답지 못한 행동이었어."
"그래도 윌리엄 경이 금방 제압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
"고맙네. 윌리엄 경 덕분에 큰 일이 날 뻔한 것을 막을 수 있었어."
"별 말씀을."
"아닐세. 이 일은 내가 반드시 보답하겠네."
"나 역시. 나는 은혜를 잊는 사람이 아닐세."
"어, 음······"
부상으로 제대로 말을 못하는 벤고트 경까지 포함해서 기사들은 감사함과 부끄러움으로 민망한 티를 냈다.
나는 적당한 대거리를 하며 물러서서 그들이 회복할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 여유는 내게도 필요했다.
상태창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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