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4화 (4/248)

4. 수적 토벌

칼마르 시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항구다.

외부와의 교역은 바다를 통해 하지만 국내로의 유통은 강을 통해서 한다.

강을 통한 물품의 이동은 마차를 이용한 운송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강에 뭔가 문제라도 생기면 마차 몇 대가 운행을 하지 못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연히 그 문제에 멱살이 잡힌 사람들의 생계도 마차 몇 대에 걸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달라벤 강에서 생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된 상태인가?"

"그렇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습니다."

"자격도 없는 놈들이 멋대로 검문소를 세우고 통행세를 걷는 상황인데 거기서 무슨 문제가 더 생긴다는 건가?"

"영지민들을 끌어다가 부역을 시키고 있는데 아무래도 망루를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겸해서 망루 옆에는 제법 튼튼한 목책까지 만들었습니다."

"미친 놈 아닌가? 기껏해야 기사 나부랭이가 무슨 배짱으로 그런 짓을 벌이는 것이지? 패트슨은 뭐라고 하던가?"

"장원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넘긴 상태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미안하다고 합니다"

"한 통속이군. 패트슨 남작 그 놈과 장원의 그 기사 놈 둘이서 짰어."

고성으로 창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고함이 욕설이 되었을 때는 보고를 위해 들어왔던 서기관의 얼굴도 창백해지다 못해 시퍼렇게 변했다. 누군가 당장 걷어 채이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때 영주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부터 마스터 요한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죄송합니다. 백작님. 쓸데없이 자꾸 고함만 질려서 시끄럽게 해드렸습니다."

영주 집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칼마르의 여백작이었다.

전대 칼마르 백작이 1년 전에 사고로 죽은 후 임시로 가문을 이어받은 상태였다.

"그들이 한통속일 것이라는 점은 이미 자문위원들도 예상한 일이었지요."

"그렇습니다. 패트슨 남작이 음흉한 것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칼마르의 여백작과 함께 들어온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백작 자문위의 원로인 린드스톰으로 여백작의 요청에 따라 영주성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너구리 같은 작자이기는 해도 상식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스터 요한은 한탄하듯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다. 특히 전대 칼마르 백작이 죽은 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멀쩡하던 것까지 맛이 가 버리는 모양이었다.

시절이 수상해서 그런가?

"청혼을 거절했더니 앙심이라도 품은 모양이지요."

여백작의 말에 마스터 요한은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런 음흉하기 짝이 없는 소인배를 들이시겠다고 했으면 저부터 드러누워서 반대했을 겁니다. 저는 돌아가신 백작님을 뵙게 될 때 떳떳하고 싶습니다."

"자문위에서도 반대했던 일입니다. 패트슨 남작은 막시밀리언 선제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냥 같은 파벌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고 적극적인 지지자라니. 그런 그와 연결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전략적 모호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익입니다."

"알아요. 알긴 아는데 이제는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내가 너무 얕보이나 싶어서 그렇지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참아보기는 하겠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군요."

칼마르의 여백작은 살짝 거친 태도로 집무실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마스터 요한의 눈짓에 지금까지 함께 있었던 서기관과 여백작을 따라온 시녀가 집무실을 나갔다. 집무실 안에는 3명뿐이었다.

"망루는 부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패트슨 남작이 우리에게 들이댄 기사 역시 죽여야 합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마스터 요한. 시의 경비대를 쓸 수는 없습니다. 경비대가 나서면 너무 일이 커진다는 것은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느 한 편을 지지할 생각이 없지만 반대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린드스톰 경? 그 기사 놈 제법 명성이 있는 녀석입니다."

"상인들이 강탈당한 물품을 찾기 위해 나설 겁니다. 명예롭지 못하게 강도질을 했던 기사는 더 이상 기사라고 할 수 없겠지요, 결국 상인들은 정의를 이루어 낼 겁니다."

"통행세만 걷은 것이 아니라 물품을 강탈까지 했다는 겁니까? 이것은 도를 넘은 행동입니다!"

요한은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여백작은 린드스톰의 말을 이해했다.

"아닙니다. 마스터 요한. 상인들이 물품을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어쩌면 배까지 침몰시켰다고 할 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저들은 통행세만 걷었을 뿐 물품을 강탈한 적은 없다고 항변하겠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겠지요. 통행세만 걷었을 뿐 인데 상인들이 독이 올라서 목숨까지 걸고 덤벼올 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아. 그런 거군요."

그제서야 요한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했다.

그러나 칼마르의 여백작은 문제해결을 전적으로 상인들에게 맡겨놓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용병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실패하며 칼마르는 곤란해집니다. 지금은 망루 하나뿐이지만 확신을 얻게 된다면 망루 정도가 아니라 성채를 쌓는 자도 나올 겁니다. 칼마르를 뜯어 먹겠다고 너도나도 뛰어드는 꼴을 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인들은 용병만으로 정의를 이룬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고 그 돈이 가지는 힘도 잘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대하겠습니다."

*

달라벤 강에 자리잡은 수적을 쓸어버리고 빼앗긴 상품을 되찾기 위해 상인들이 결성한 토벌단이 출발한 것은 내가 마틴과 만난 날로부터 불과 5일 후였다.

아무리 마틴의 보증이라고는 하지만 토벌단이 출발하기 직전에 낙하산으로 떨어진 격이었으니 경험 많은 용병들은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살펴보며 경계했다.

그들의 경험상 이런 경우는 대개 도련님의 경험쌓기이지만 드물게 물주가 적과 내통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벌단의 머리를 이루는 3명의 기사들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타락한 기사를 처벌하고 수적을 토벌해서 명성을 높일 기회가 온 것에 대해 흥분한 상태였다. 누가 먼저 타락한 기사와 일전을 겨룰 것인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정말 끝내주는 전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어이가 없군. 아예 성을 지어놨는데?"

"그래 봤자 목책으로 둘렀을 뿐이다. 해자도 없는 데 성은 무슨."

"해자까지 파 놨으면 진짜 성이지. 내 말은 저 도적놈이 준비를 잘해 놓았다는 걸세. 부랑배 무리를 끌어 모아서 한탕 해 먹으려는 정도가 아닌 것 같으이."

토벌단을 이끄는 3명의 기사는 상대해야 할 적이 예상보다 더 큰 규모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되자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3명의 기사 모두 칼마르의 상인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 출발 전에 듣던 것과는 다른 상황에 불만을 품었지만 대놓고 불만을 터뜨리지는 못했다.

이제 곧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돈으로 고용한 용병들까지 있는 상황인데 소란을 피워봐야 좋을 것이 없다. 나중에 한마디 하더라도 지금은 그냥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사기를 북돋기 위해 뻔한 말을 하는 토벌단장의 말에 맞장구까지 쳐 줘야 했다

"목책은 제대로 세운 것 같습니다만. 또 모르지요. 밀면 그냥 넘어가 버릴지도. 부랑자 놈들이 삽질이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부랑자란 제대로 정착도 못하고 떠돌던 놈들을 의미한다지요? 그런 놈들에게 창을 들리고 화살을 재워서 목책에 올렸다고 제대로 된 병사 노릇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리암 경."

"부랑배는 아무리 모아 보았자 농민이 창을 든 것만도 못 하오. 지킬 재산도 가족도 없는 자들은 조금만 불리해져도 도망칠 궁리만 하기 마련이지.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소. 기사만 주목하시오. 이 토벌은 패터슨 남작과 절연을 했다는 기사만 잡으면 끝이니까."

"그래서 여러분을 모셨지요. 믿겠습니다."

부드러운 말은 거기까지였다.

토벌단장은 쫑긋하게 귀를 세우고 높으신 분들끼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병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잘 들었지? 우리는 저기에 머리를 바닥에 쳐 박고 숨어 있는 놈을 끄집어 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기사님들이 알아서 해주실 거다. 그러니까 돈값을 해라. 가자! 주정뱅이들아!"

토벌단장의 명령에 토벌단은 멀리 보이는 목책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나 역시 그들 사이에서 말을 끌고 같이 걷고 있었다.

나와 용병 사이는 아직 가깝다고도 멀다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거리가 있었다.

갑자기 끼어든 도련님은 관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예민할지, 맞먹어도 될지, 혹시 이용해 먹을 만한 건덕지는 있을지 등등.

그래도 나를 향한 용병들의 간보기는 정말 조심스러웠다.

나는 고향을 떠나면서 가지고 나온 갑옷과 무기로 무장했다. 집안에서 내려오거나 선친의 손길이 닿은 무구였다.

판금 갑옷 같이 대놓고 기사의 갑옷은 아니었지만 흉갑의 만듬새, 가죽 보호구에 찍힌 장인의 문장, 검과 흉갑에 보이는 공통된 돋을 새김 장식 등, 어떻게 보더라도 용병보다는 기사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차림새였다.

거기다 내가 말을 다루는 기술이나 무기를 다루는 방식, 주변의 용병들을 대하는 태도는 베테랑 기사 그 자체였다.

회귀했다고 해서 내가 야전에서 구른 짬이 어디로 가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나이는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풍기는 분위기는 실력자 같다.

용병들이 보기에는 좋은 가문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실전까지 치른 인재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운 것이다.

덕분에 나는 별다른 텃세도 없이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처럼 목책을 볼 수 있었다.

망루도.

그제서야 나는 의문점을 풀 수 있었다.

기사가 3명이나 모였고, 토벌단의 규모도 만만하지 않은데 도적놈들 주제에 도망가지 않았다고?

오히려 목책을 세우고 이곳을 지키려고 해?

아무리 장원 기사가 하나 있다지만 이 놈들, 과연 제 정신인가?

답변은 하나였다.

이길만하니까

이길만하니까 버티는 것이다.

기사가 3명이 있든, 토벌단의 규모가 어떻든 상관이 없다.

망루를 보니 기억을 할 수 있었다.

저 곳에 누가 있는지를.

스마바스타 장원의 기사, 카알.

3명의 기사를 한 번의 싸움에 죽인 것으로 유명한 자였다.

그러니까 지금 앞에 가고 있는 저 3명의 기사는 원래 오늘이 죽는 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은 없던 일이 되겠지.

대신 내가 목이 잘릴 때까지도 통행세를 잘만 받아먹으면서 선제후의 부름에도 배짱을 부리던 카알이 죽을 것이다.

*

어느새 토벌단은 목책 앞까지 도달해서 고함을 질러댔다.

목책 위에도 토벌단의 머리수에 한참 못 미치는 숫자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맞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십대조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훈훈한 풍경은 오래가지 않았다

토벌단을 대표하는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두 손을 쳐 들며 진정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지르던 고함소리가 좀 잦아들자 앞에 나섰던 사람이 외쳤다.

"나는 칼마르의 상인 보우라고 한다. 또한 시의회에서 발언권을 가진 자이기도 하다. 나와 동업자들은 달라벤 강에 배를 띄워서 운송할 수 있는 권리를 칼마르의 행정청에서 받았고 그에 따른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 달라벤 강에 갑자기 나타나서 도적질을 하고 있는 너희들에게 나와 동업자들의 배가 실려 있는 상품째 강탈당했다. 이에 나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내 전 재산을 들여 용병을 고용하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명예스러운 기사, 리암 경, 벤고트 경, 스벤 경이 내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를 위해 나서 주시기로 했다. 너희 수적들은 더 이상 강에서 도적질을 하지 못할 것이다. 비루한 목숨이나마 구하고 싶다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생명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감히 주군과의 맹세를 어기고 기사의 도리를 무시한 너 카알은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개소리 하지 마!"

피를 토하듯 외치던 상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욕설이 날아왔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두 배는 될 법한 덩치.

스마바스타 장원의 기사, 카알이었다.

"통행세를 받은 적은 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배를 강탈하다니!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정직한 자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의 말을 누가 믿겠나? 나는 내 전 재산을 들여서 용병을 고용해 이곳까지 왔다. 너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냐? 전 재산을 써가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네 놈의 배가 진짜 강탈당했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했겠지. 적어도 나는 아니다."

"이 곳, 스마바스타에서 강탈당했다. 내 배와 내 물품을!"

"씨발. 작정하고 왔구나! 도시의 사기꾼 놈! 어디 네 놈이 혀를 잘리고도 거짓말을 지껄일 수 있을지 보자."

한참은 더 말싸움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그 순간에 갑자기 전투가 시작됐다.

아무런 예고 없이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스벤을 때리고 튕겨져 나갔다.

그 화살이 신호가 된 듯 목책 위에서 일제히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이 놈들이 비겁하게!"

"스벤 경. 괜찮습니까?"

"전신 갑주를 입고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새로운 열처리 방식으로 만든 것이라서 저런 화살 같은 것으로는 흠집도 내지 못합니다. 가까이에서 석궁이라도 쏜다면 모를까."

"다행입니다. 하지만 용병들이 문제군요. 아무래도 갑옷이 부실하니까요."

"들이칩시다.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소!"

3명의 기사는 서로 간에 대화 비슷한 것을 하다 말고 갑자기 쏟아 보낸 화살비에 오히려 분노했다.

그래서 목책을 향해 돌격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

*

나는 첫 번째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앞으로 달렸다.

첫 번째 화살을 따라서 쏘아진 화살들은 미리 약속한 듯 용병들을 향해 날아갔다. 덕분에 나는 방해를 받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목책 위의 적들은 늦게나마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목책에 거의 다 다다른 후였다.

내가 목책에 가까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적들 사이에서 혼란이 유발됐다. 어떤 자는 나를 향해 활을 쏘고 어떤 자는 용병을 향해 활을 쏘았다.

어느 쪽이든지 충분한 공격은 아니었다.

내가 입은 것은 전신 판금 갑옷이 아니다.

금속제의 갑옷은 흉갑 하나 뿐 나머지는 모두 가죽이었다.. 그러나 화살은 나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몸이 가벼웠다.

움직일수록 더욱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보이기도 정말 잘 보였다.

날아오는 화살 하나하나의 모습을 다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가까이 다가오는 화살은 화살촉의 날카롭고 무딘 부분까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가까이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모두 비껴냈다.

말을 타고 달리니 목책은 금방이었다. 바로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목책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목책에 몸통째 부딪쳤다.

목책은 대포알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한 길이 넘는 넓이의 목책이 한꺼번에 넘어갔다. 가로로 대 놓은 통나무는 반동으로 뒤로 튕겨나갔다.

재수 없게도 넘어간 목책 위에 있던 궁수는 어디가 부러졌는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병사들이 무리지어서 몰려와도 충분히 통과할법한 구멍이 목책에 뚫린 것이다.

나는 그 구멍을 뒤로 하고 적들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스마바스타의 기사, 카알이 있었다.

지금 죽을 자였다.

*

"뭣, 뭐야!"

"목책이 넘어갔다!"

"투석기가 있었나? 없었잖아!"

"기사가 들어왔다!"

모두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기사로 보이는 애송이 하나가 돌격해 들어와서 몸으로 목책에 부딪치자 목책의 일부가 넘어간 것이다.

통나무를 잘라서 바닥에 박은 후 지지대를 댄 목책은 보기보다 튼튼하다.

사람이 미는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론 급하게 만드느라고 기초가 약했기 때문에 지지대를 어설프게 댔다면 넘어갈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조금이라도 말이 되니까.

그래도 사람 하나가 저 짓을 한다고?

공성추도 아니고?

저거 인간이 맞기는 맞나?

카알은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말을 탄 기사 3명이 용병들과 함께 몰려오고 있었다.

목책에 웅거하고 있었던 부하들은 30여 명.

그나마 대부분이 길에서 잡아온 자들이다.

밤도둑, 노상강도, 거지, 사기꾼, 날품팔이 일꾼.

힘과 돈으로 억눌러 놓았을 뿐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믿을 수 있는 자들은 자신이 직접 키운 몇 명의 장원 출신 병사들뿐이었다.

그러나 몰려오는 자들은 1백여 명이 넘었다.

용병들.

돈을 받고 싸움 기술을 파는 자들.

저기서 달려오고 있는 용병 하나가 목책 위의 어중이떠중이 두셋은 우습게 상대할거다.

심지어 인간 병기라고 할 수 있는 기사도 3명이나 된다.

누가 봐도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카알은 자신이 있었다.

이것은 소수의 싸움이었다.

수천 수만이 어우러져서 싸우는 지옥이 아니라 기껏해야 1백여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는 소규모의 전투다.

큰 규모의 전투에서는 숫자가 바로 승리를 의미하지만 이런 작은 전투에서는 규격 외의 싸움꾼이 종종 의외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아주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한 명의 기사가 수백 명을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할 수도 있다.

압도적인 실력과 공포가 부리는 마술이다.

싸움을 하는 자들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카알은 자신이 규격 외의 기사임을 자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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