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능력에 대한 증명
"버로스 경이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은 윌리엄님도 알 거요. 그는 촌장인 내게도 장원에 관한 일이 아니면 거의 입을 열지 않았을 정도요."
"말이 너무 길어."
"아악~"
내 검이 촌장의 손등을 꿰뚫었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손등이었다.
"제발! 제발! 애쉬 남작이야! 그가 버로스 경을 죽였어!"
"왜?"
"버로스 경이 암염 광산에 대한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암염 광산은 애쉬 남작이 잠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선친은 명예를 아는 기사였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버로스 경은 외지인 아닌가? 게하드 백작 사람이라고! 애쉬 남작님이 버로스는 믿을 수 없다고 했대."
암염 광산.
노다지다.
금광에야 못 미치겠지만 웬만한 남작령은 소화가 어려울 정도로 가치가 크다.
만약 새로운 암염 광산이 공개되면 온갖 하이애나가 몰려올 것이라고 누구라도 장담할 수 있을 정도다.
기존의 암염 광산이야 권력으로 누르든지, 칼부림을 하든지, 돈으로 지르든지 상관없이 어쨌든 간에 주인이 누구인지 오래 전에 결정난 곳이다.
그러나 새로운 암염 광산?
요즘 같은 시기에?
일개 남작이 감당할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까 애쉬 남작은 욕심도 욕심이지만 겁에 질린 부분도 클 거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던 기사를 행방불명 시킬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그 기사의 자식까지 암염 광산에 쳐 넣은 것은 좀 지나쳤지.
아무리 후환이 두렵고 일손이 부족했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검을 납도했다.
"작은 장원의 촌장치고는 아는 것이 많군."
"나는, 나는 영지병이었고 그리고 남작님께 정기적으로 소식을 보내기도 했고, 집사님이 도망치지 못하게 잘 지켜보라고도 했고, 그래, 그렇지. 성 안의 높으신 분들과 친분도 있고 하니까, 그러니까, 뭐 또 알고 싶은 거라도 있을까?"
웅얼거리며 발음을 저는 촌장의 눈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애쉬 남작은 이번에도 내 손에 죽겠군."
"뭐? 뭐라고?"
"그래. 촌장. 애쉬 남작은 내 손에 죽을 거야. 이번에는 이유가 더 없이 확실하겠군. 감히 비난할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말이지."
나는 그를 내버려두고 촌장과 그 일행이 야영을 했던 장소를 돌면서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겼다.
동전과 은전, 철을 많이 사용한 무기류 몇 점, 식량도 약간.
그리고 짐말 하나.
갑자기 재산이 확 늘어난 느낌이었다.
나는 야영지를 떠나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닥불은 꺼져 가고 있었고, 쓰러져 있는 사체들 아래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어느새 촌장은 의식을 잃고 숨만 쉬는 중이었다.
나는 숲에게 청소를 맡기고 야영지를 떠났다.
* * *
칼마르는 항구도시다.
강변에 자리잡고 내륙 수운으로 먹고 사는 소소한 나루터가 아니라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양항이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이 정도로 입지가 좋은 도시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상업으로 먹고 살고 있고, 물류 유통에 사활을 건다.
아무리 제국이 혼란에 빠진다고 해도 칼마르를 중심으로 흐르는 재물과 물품을 막을 수는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이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곳의 흐름이 막힐 정도라면 제국은 망조가 들었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당연하겠지만 칼마르의 백작은 파산을 걱정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내가 칼마르까지 온 것이다.
3년이나 일찍.
"창날도 그렇고, 단검도 그렇고, 성하마을에 있는 대장장이가 잡철을 적당히 두드려서 만든 것이군요. 벌목 도끼는 그나마 품질이 괜찮습니다. 그래도 다 녹여서 다시 만드는 것이 낫겠지요. 철을 녹이고 괴로 만드는 것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직접 가지고 오신 것을 감안해서 그 비용은 그냥 제가 부담하는 것으로 하고 철값은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검값도 도끼값도 제대로 쳐 줄 수 없으니까 팔고 싶으면 헐값에 넘기라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한 거다.
나는 저울에 올라가 있는 도끼 머리를 향해 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여기는 항구도시였다.
뜨내기를 토착민이 등쳐 먹는 곳.
항구 도시가 아니라 내륙의 도시였다면 이 정도로 막 나가는 흥정은 하지 않았으리라. 뜨내기가 끊임없이 공급되는 항구도시니까 가능한 흥정이었다.
"어차피 계속 들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웠으니까. 거래합시다."
"대금은 어떻게 드릴까요?"
"뭐가 있소?"
"칼마르 백작가에서 보증하는 통화라면 바로 드릴 수 있습니다. 철괴나 은편으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다른 통화를 원하신다면 광장 북쪽에 환전상들이 있으니까 그곳으로 가셔서 교환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제국 통화는 액면가에서 30% 깎아서 계산합니다. 기타 다른 통화는 종류에 상관없이 절반의 가치를 가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장장이가 아니라 환전상 같군. 그런데 30%나 가치가 차이가 나다니. 칼마르 백작이 무엄하게도 저 높은 곳에 계신 분보다 더 잘 나가는 것 같은데."
"그 분이 안 계신지 벌써 10년이니까요. 무례하다고 호통을 칠 분이 안 계시니 어쩔 도리가 없지요. 환전상 말로는 조폐창이 있는 도시마다 제국 통화를 찍어내다 보니까 점점 엉망이 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10년이라니. 벌써 그렇게 됐나?"
"뭐, 조만간 새로운 황제를 선출한다는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
대통령 유고시의 계승서열까지 줄줄이 정해놓은 곳에서 살다 온 내 입장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정치 상황이었다.
10년이나 황제가 공석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그런데 앞으로 5년 후에도 여전히 공석이다.
그래서 제국은 여러모로 개판이 되었지.
그 이후는 모르겠고.
그런데 그 이후로도 계속 공석이면 진짜 개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될 텐데.
문제는 문제였다.
몇 십 년씩 회귀한 것이 아니라 달랑 5년을 돌아온 나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제국 대부분은 혼란에 빠진다.
최소한의 안전을 담보할 만한 곳도 얼마 없게 된다.
그나마 그럭저럭 굴러가는 지역 중 하나가 이 곳 칼마르 시다.
우리가 그렇게 난장판을 만들었음에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수습하고
결국에는 주변의 평정까지 성공했다.
그래서 내가 칼마르 시로 온 것이다.
이곳에 있으면 그나마 못 볼 꼴을 좀 적게 볼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별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 하나 챙기기에도 빽빽한 상황이라서 말이지.
결국 불안한 마음은 한 켠으로 밀어넣고 대장장이에게서 칼마르 은화를 챙긴 후 숙박할 장소를 찾아 나섰다.
항구에 가까운 곳에 있는 주점 겸 여관은 사양이었다.
벽돌보다 단단한 빵과 밍밍한 술을 물 대신 마시는 선원들을 상대로 하는 곳은 서비스의 기준이 너무 낮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모를까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 살아온 사람이 적응하기에는 난이도가 너무 높다.
침구의 불결함은 감안하더라도 요리는 개판에 술은 너무 독하고 상주하는 매춘부는 지나치게 엉겨 붙는다.
싸움은 또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지!
절대로 나 같은 사람이 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성에 가까운 곳에서 여관을 물색했다.
좀 더 점잖고 좀 더 돈이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
이를 테면 사관급 선원이라든가 여행하는 전문직 종사자, 아니면 마차 정도는 끌고 다니는 상인 정도?
그런 곳은 침구부터가 깨끗했다. 음식도 맛있고 술도 먹을만했다.
물론 식사하는 데까지 와서 매춘부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영업하는 곳과는 다른 수준의 가격을 자랑하기는 했다.
그래도 그 정도의 가격은 지불할만하다고 본다.
게다가 이런 수준 있는 여관은 여러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물품을 보관해주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대신 구매해주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사용인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특히, 상인들이 주로 묵는 여관은 금융업과 창고업, 물품과 사람에 대한 거래까지 주선해 주었다. 상인들을 위한 상인인 것이다.
"마틴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내가 선택한 여관의 주인은 중늙은이였다. 풍기는 느낌이 학자에 가까웠지만 명활하게 움직이는 눈은 상인의 그것이었다.
"윌리엄이라고 합니다. 지나가다가 들으니까 매매 주선이라든가 그런 것도 하시는 것 같던데 그것도 부탁드릴 것이 있고, 조언도 하나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여관에 머무르시는 분께서 요청하시는 일은 최선을 다해 해결해 드리려고 합니다."
내가 찾아간 여관은 상당히 좋은 평판을 가진 곳이었다. 바로 코 앞까지 닥친 일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내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말이다.
이곳의 주인인 마틴은 발이 넓은 사람이라서 그의 인맥에는 칼마르 시의회의 의원도 있고 심지어 백작 자문위의 원로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내가 마틴의 여관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에는 그의 인맥도 있었다.
"일단 마구간에 맡긴 짐말 두 마리를 팔아주십시오."
"예.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쓸만한 짐말은 언제나 찾는 분들이 있지요."
"그리고 조언이 필요합니다."
"어떤 조언일까요?"
"읽고 쓸 수 있습니다. 계산도 능숙하게 합니다. 하지만 가장 잘 하는 것은 싸움입니다. 지금까지 기사로 훈련을 받았고 아직 기사 서임은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실력은 어디에나 통할 수 있을 정도라고 자부합니다. 전투라면 직접 싸우는 것도, 소규모의 인원을 지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런 제가 칼마르에서 자리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 일개 여관 주인에 지나지 않는 제게 기사 지망생이셨던 윌리엄님이 조언을 구하시는 겁니까? 주변의 기사 선배라든가 아시는 귀족분이 있을 텐데요."
마틴의 반문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당연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요청하기에는 이상한 내용이었으니까.
내가 한 것은 잘 아는 손아래 친척이나 할 만한 조언 요청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마틴님처럼 상인을 위한 상인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사람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일반인과는 다르다고 하더군요. 책 속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구하려면 마틴님 같은 분들께 가라고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저는 기사 지망생이 아닙니다. 선친께서 기사셨기 때문에 기사로 훈련을 쌓았지만 반드시 기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선친께서는 명예스럽게 충성을 다하신 기사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충성에 보답을 받지 못하셨지요. 그래서 제게는 조언을 구할만한 선배 기사나 아는 귀족이 없습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용병의 일을 하시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예. 저는 지금 싸움을 잘하는 평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틴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
싸움을 잘하는 평민이라니.
거기다 이렇다 할 배경도 없어!
이것은 나중에 버리더라도 일단은 한 번 써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자기 소개 아닌가 말이다.
마침 쓸 일이 있기도 한데.
그런데 과연 이 젊은이는 굴러들어온 금덩어리일까?
아니면 흔히 보는 허풍선이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집어넣은 썩은 사과일까?
마틴은 인생의 절반을 객주로 살아왔다.
사람을 부리는 것도, 부림을 당하는 것도 그에게는 숨을 쉬거나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넘쳐났다.
지금 당장 문의 열고 밖에 나가면 동전 한 푼을 구걸하는 어린 거지가 있고, 인력 사무소로 가면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죽치고 앉아 있는 남자들이 한가득이다.
아무 주점이나 들어가서 칼을 쓸 사람을 구한다고 고함을 치면 내용은 묻지도 않고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항구에서 선원을 구한다면 손을 들고 나설 사람으로 배 한 척은 뚝딱하고 꾸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부족했다.
하녀는 저택의 비품에 손을 대고 주방장은 식자재를 빼돌린다. 호위로 고용한 용병은 강도로 돌변하고, 한탕을 꿈꾸는 선원은 해적과 손을 잡는다.
거래를 요청한 상인은 납기를 어기고, 심지어 다른 도시로 도망가서 이름을 바꾼 후 다시 상인 노릇을 하기도 한다. 물론 선금으로 받은 물품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었고 믿을 수 없음에도 써야 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신뢰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판단할 수 없다면 판단할 근거를 만들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를 구하면 된다. 자신의 평판 때문이라도 해야 할 일은 해줄 테니까.
"좋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언제나 필요하지요. 전투에 능숙하다. 그렇게 보일 나이는 아니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니 믿어드리지요. 그런데 윌리엄이 조언을 요청한 저는 상인입니다. 상인은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법이지요. 그러니 묻지요. 제가 왜 윌리엄에게 조언을 해야 합니까? 윌리엄은 제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습니까?"
*
나는 마틴의 말에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마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나는 검은 맥주를 담는 큰 청동잔을 세로로 갈라버렸다. 그러나 청동잔이 놓여 있던 탁자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검이 청동잔을 자를 정도로만 움직이고 탁자 바로 위에서 멈춘 것이다.
*
마틴은 이런 기교를 본 적이 있었다.
전대 칼마르 백작의 호위기사였던 마스터 요한이 비슷한 일을 했었다. 검을 휘둘러서 목걸이만 자르는 위력시위였다. 물론 위력시위의 상대였던 시의회 의원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일은 없었다.
기절을 해서 그렇지.
건방지게 고개를 치켜들던 시의회의 의원들이 자라목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것을 또 보다니.
"저는 검을 아주 잘 씁니다. 마틴 객주님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제가 필요한 일이 있을 겁니다."
"그래. 있지. 없어도 있을 걸세."
마틴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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