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화 (2/248)

2. 첫 충돌

"상태창."

혹시나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반투명한 상태창은 내 눈 앞에 부드럽게 나타났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 있는 X 모양의 문양에 손을 대자 점점 투명해지더니 사라졌다.

"상태창."

다시 나타났다.

뭔가 착각하거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젠장. 상태창이라고!

이것만 있었으면 어제 내가 목이 잘릴 일이 없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고!

아, 아니, 그건 아닌가?

상태창이 있다고 해도 내가 갑자기 무쌍을 찍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은 많이 다른 이야기겠지? 아마도?

내가 목이 잘렸던 것은 좀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었다.

우선 숫자가 너무 딸렸으니까. 명분도 약했고.

그랬던 것 치고는 잘 싸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런 혼란기에 졌잘싸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를 따랐던 놈들은 몇이나 도망을 치는데 성공했을까?

내 피가 서서히 식어갔다.

흥분된 가슴도 가라앉았다.

나는 그제서야 천천히 상태창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가장 위에는 이름이 있고, 그 아래에는 능력치가 숫자로 나타난다.

다시 그 아래쪽에 특별한 능력이나 특징을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미니맵이나 인벤토리 같은 것을 열 수 있는 링크를 둔다.

지구에서 게임을 할 때 흔하게 접했던 형식의 상태창이었다. 당연히 내게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게임은 우리 세대의 오락 아니었던가.

게다가 웹소설도 가끔 봤으니까 상태창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게임에서야 캐릭터의 능력치를 객관화시켜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웹소설에서의 상태창은 단순히 캐릭터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작가가 웹소설의 주인공에 치트키를 선사하는 설정이다.

상태창이 없다면 웹소설의 주인공은 박박 구를 것을 각오해야 한다.

내가 지난 생애에서 그러했듯이.

그런데 지금 상태창이 주어졌다.

왜 주어졌는지는 모른다. 앞으로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유 따위는 몰라도 상태창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 그거면 됐지.

너무 많은 것을 원하면 균형을 맞춘답시고 '시련'을 내릴지도 몰라.

지금도 영혼의 어딘가를 간질이는 감각이 자제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나는 상태창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인간 : 윌리엄 버로스]

좋아. 내게는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이 없는 모양이군. 버로스 집안의 인간 윌리엄. 간단하네. 오히려 용족혼혈 따위가 나왔다면 욕했을지도 몰라. 혈통값 못하는 병신이라고.

[체력 : MAX]

[지력 : NORMAL]

[마나 : UNDECIDED]

나는 잠깐 멈칫했다.

체력 좋고 머리는 평범하니 기사가 맞기는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마나?

마나 같은 것은 느껴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아직 결정되지 않음으로 나오는 건가?

그리고 숫자로 표현이 안 되네?

그렇다면 MAX나 NOMAL따위의 의미가 중요할 텐데?

이거 너무 애매모호하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칭호 : LOCKED]

[축복 : LOCKED]

[스킬 : LOCKED]

그래. 이것은 이해 할 수 있겠다. 이제 시작이니까 다 잠겨 있는 것이 정상이겠지. 과금을 지른 것도 아니니까 특별대우는 없다. OK.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아쉬운 감정을 삭이며 자기합리화를 시전했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를 섞어서 그 아래를 보았다.

[미니맵] [LOCKED] [LOCKED] [LOCKED]

빙고!

하나 나왔다.

"할 말이 없네. 이건 그냥 게임이잖아. 이 미니맵을 누르면 주변의 지도가 나오는 건가? 여행할 때 도움이 될 것 같고. 전쟁할 때는 정말 치트키가 따로 없겠군."

나는 손을 뻗어서 [미니맵]을 건드렸다.

반투명한 창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거기에는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간략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안 가본 곳은 가려져 있다든가 하는 핸디캡 없이 주변이 다 밝혀져 있는 지도였다.

"대박이네. 이러면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아지겠는데."

이를 테면 나와 내 부하들이 박살 났던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던가.

나는 체감상 바로 며칠 전에 내가 겪었던 전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지도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현지인의 조력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매복에 당하지 않았으리라.

만약 상대편이 미니맵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역습도 가능했을 테고.

그럼 정말 죽여줬을 텐데.

"그런데 이건 뭐야?"

언제부터인지 미니맵에 붉은 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 붉은 점. 위험을 알리는 붉은 색.

대충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도 피는 붉은 색이니까.

그래도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

숲에서 어둠은 부지불식간에 덮쳐온다.

해가 나무 사이로 사라지면서 어두워진다 싶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오는 것이다.

나는 미리 모닥불을 피우고 두 마리의 말을 주변에 묶어 두었다.

한 마리는 승용마이고 다른 하나는 짐말이다.

짐말에는 내 전 재산이 실려 있다.

옷과 식재료, 양념류 약간, 무기, 식기와 책 몇 권.

현금으로 따진다면 제법 큰 액수가 되지만 대부분의 지분을 무기가 차지하니 사실상 가난뱅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써야 할 장검이나 갑옷을 팔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누가 무기를 주기라도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돈으로 바꿀 생각이다. 그래서 미니맵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 붉은 점이 무기를 줄 것 같거든. 검이라든가 도끼 같은 것 말이다.

붉은 색의 점은 내 이동을 따라왔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운 후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새벽 즈음에 비몽사몽간에 있을 때 덮친다는 계획이겠지. 아무리 조심성이 있다고 해도 밤을 꼬박 세우면서 경계를 한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이래서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거나 자신의 실력을 확신하는 베테랑뿐이다.

그렇다면 저 붉은 점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애송이.

기사로 훈련을 받았지만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았고, 아직 전투 경험도 없는 어린 녀석.

장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영주성을 방문할 때 말고는 거의 없었으니까 여행이라는 것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젊은 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원래의 월리엄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나는 지옥을 겪었고, 회귀까지 했거든.

붉은 점은 그것을 모르지.

그러니 방심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새벽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좀 더 일찍 방문하기로 했다.

그래야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말이다. 여행의 목적지인 칼마르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다.

나는 가죽 보호구를 걸친 가벼운 차림으로 단검과 짧은 검, 던지기 겸용의 손도끼를 챙겼다. 혹시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날까 싶어서 천으로 감싸는 것도 확실히 했다.

사람이 없는 숲에서 금속 소리는 생각보다 멀리 간다. 숲에서는 생경한 소리라서 더 잘 들리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숲에서 전투를 겪어본 사람들은 준비를 단단히 하는 편이었다.

나는 보름달이 높을 때 모닥불을 떠나 붉은 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름달이 떴다고는 하지만 평지와 달리 숲 속은 보름달이 뜨나마나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작은 불빛도 멀리서 잘 보였다.

나는 작은 불빛을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자고 있는 녀석이 둘, 부주의하게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녀석이 둘.

다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다.

촌장과 그의 직속 부하들이었다.

나는 숲 속에서 조용하게 기다렸다.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기다림은 보답을 받았다.

"어디 가는 거야?"

"물 좀 빼고 온다."

"야. 멀리 가. 냄새 풍기지 말고."

"아 씨. 어두워서 안 보여."

모닥불에서 몇 걸음 더 숲으로 들어가면 어둠이 빛을 잡아먹는다. 오줌 누는 소리는 들리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모닥불 옆의 남자는 보지 못했다.

나는 오줌 누던 사내의 뒤로 다가가서 입을 막고 목을 돌려버렸다. 반항이고 자시고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깔끔한 한 수였다.

그리고 목이 꺾여서 축 늘어진 사내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당연했다.

어제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게 어제는 5년 전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따라온 자들 중 하나였다. 망설임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판이었다.

첫 단추는 제대로 끼워졌다.

하나씩.

그리고 이번에는 다음 하나.

나는 손도끼를 들고 모닥불을 향해 걸어갔다.

모닥불에 있던 남자는 잠깐 자리를 비웠던 동료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지루한 불침번에 동료를 향해 신소리나 하려고 고개를 들었던 그는 뭔가가 눈 앞에 날아오는 것을 바로 코 앞에서 보았다.

고통은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퍽!

날아오는 도끼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 이마가 부서지며 뒤로 넘어갔다. 그는 모닥불에 쓰러지면서 요란한 소음을 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자고 있던 둘은 선잠을 자고 있었던지 금방 깨어났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중이라서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닥불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뜨거운 철판에 손을 댄 사람처럼 소스라쳐서 튀듯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모닥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뒤를 봤어야 했다. 나는 짧은 검을 손에 쥐고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서 있는 사람 중 하나의 등을 찌르고 빼고 다시 찔렀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향해 휘두를 때까지 그들은 자신의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크르륵."

등에서 가슴까지 관통하는 검에 찔린 남자는 앞으로 엎어졌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에서 흘리는 피가 그를 막았다. 그는 손을 떨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누구도 그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

내 검은 그의 양쪽 폐를 헤집었고 그는 자신의 피로 익사하는 중이었다.

"아······ 내 팔!"

마지막 남자는 촌장이었다. 그를 향해 휘두른 칼은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거인이 휘두른 것 같은 기세의 검은 그의 어깨를 부수고 팔을 날려 버렸다.

촌장은 패닉에 빠져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 때 내가 촌장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촌장은 손을 뻗은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윌리엄······ 어떻게?"

"어떻게? 촌장.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촌장에게 중요한 것은 촌장이 여기서 죽는다는 것, 그런 거겠지."

"살려주게. 제발."

"내가 왜 후환을 두고 가야 하지?"

"살려주면 자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겠어. 애쉬 남작이 관련된 거야."

나는 검을 그의 손 앞에 꽂았다.

"그래? 그렇다면 촌장의 목숨값이 얼마인지 한 번 들어는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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