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으로 돌아왔다.
전쟁터에서 죽을 줄 알았다.
누군가의 칼에 찔려서 아니면 워해머에 머리가 깨진다던가.
어쩌면 난전 중에 날아온 눈먼화살에 맞아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침대에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결박이 된 채, 무릎을 꿇고 목에 떨어질 칼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튓! 입이 말라서 침도 안 나오는군."
"병사! 죄인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줘라."
물을 탄 포도주가 내 입에 들이밀어졌다. 절반은 마시고 절반은 흘렸지만 며칠 만에 입에 뭐든 들어가니 정신이 좀 들었다.
"이따위 구정물 말고 제대로 된 것은 없나? 가는 길에 한 잔 하고 싶은데."
"반역자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군."
"그래도 한 때는 서로의 등을 맡겼던 사이였는데 자비를 베푸는 것은 어때?"
"아직도 그런 정신머리가 꽃밭인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래서 네가 지금 이 꼴이 된 거다. 그 정도로 당했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고개를 들어서 눈 앞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얼굴,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는 꽤나 옷태가 나는 외양이었다.
구겨짐 하나 없이 잘 손질된 예복도 그렇고 깔끔하게 정리한 손톱까지, 어딘가의 파티에서 술잔이나 들고 있으면 어울리지 않을까?
인간의 바닥까지 긁어내야 하는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 모습으로 나를, 내 부하들을 박살냈지.
전투라면 제법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손 쓸 틈도 없이 무너졌다.
뭐, 배신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거야 전쟁터에서 패시브 아니던가. 당한 놈이 병신이지.
그래. 내가 바로 그 병신이다.
"정신을 차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어설프게 독하고, 어설프게 자비롭고, 어설프게 눈치보고, 어설프게 반항하고. 심지어 죽을 때조차 어설프군."
그건! 오해야.
내가 아직 현대인 감성을 다 벗어버리지 못해서 그랬어.
이십 년을 넘게 회사원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칼로 벌어 먹고 살라고 하면 그게 되겠냐고. 나름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원주민이 보기에는 뭔가 어설플 수 밖에 없었겠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내 출세의 첫 번째 발판이 되어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두 번째, 세 번째의 발판도 너처럼 잘 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여백작, 그리고 선제후."
"미친 놈."
"잘 가게. 윌리엄."
내 어이없음을 무시하고 녀석은 몸을 일으켰다. 단정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미소가 얼핏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반역자의 처형을 집행해라.
"예. 의원님."
그와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헉!
처형 집행자의 칼이 목을 치는 순간, 목 전체가 화끈해지는 느낌이었다.
고통이 목 안에서 머리 안으로 폭발하는 것처럼 퍼져갔다. 뒤틀린 얼굴이 소리없는 비명을 토해낼 때 나는 상반신을 튕기듯 일으키며 깨어났다.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으로 손이 갔다.
더듬더듬.
목은 제대로 붙어 있었다.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이 축축함은 땀이지 피가 아니었다.
가쁜 숨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을 때 즈음, 내 눈도 어두움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기는 내 고향집.
빙의인지 환생인지 모르겠지만 지구에서 한국인으로 살던 기억을 가지고 깨어났던 곳이었다.
그리고 달빛에 비친 달력은 지금이 바로 내가 깨어났던 그 당시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야? 죽었다가 깨어나니까 이번에는 회귀야?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평생 펜대만 잡았던 놈을 칼 들고 날뛰는 야만인들 사이에 떨어뜨려서 고생만 죽도록 시키더니, 그 짓을 또 하라고? 아! 그래. 이제는 칼밥을 좀 먹었으니까 아무 것도 모를 때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그저 그런 놈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잖아. 난 그냥 평범한 기사 나부랭이였다고! 이봐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를 이 곳에 보내신 분. 도대체 목적이 뭡니까? 뭔가 목적이 있으면 알려줘야 할 것 아닙니까? 아니면 무슨 몰카라도 찍는 겁니까? 사람이 박박 기면서 고생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아닐 말로 이런 곳에 사람을 떨어뜨려놓을 것 같으면 그 뭐냐? [축복]이라든가 [스킬]이라든가 하다못해 [상태창] 같은 것이라도 줘야······"
나는 말을 멈췄다.
맹렬하게 펌핑되던 아드레날린도 멈췄다.
싸늘하게 식은 두뇌가 내 눈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눈 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 있음을.
* * *
상상만 하던 일이었다.
상태창처럼 다른 사람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웬 중세 판타지 세상에 던져져서 난세를 살아가라고 하면 상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대를 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서 깨어난 후 얼마 동안은 혹시나 싶어서 남몰래 상태창을 외쳐보기도 했다. 상태창 뿐 아니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단어를 외쳐보았다.
거기까지였다.
특별한 능력에 대한 미련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웃긴 일이지만 이곳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의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일하던 곳이 제법 빡 센 곳이었거든.
진짜 큰 문제만 안 일으킨다면 저 놈도 못 자르고, 나도 안 잘리는 그런 곳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 곳에서 한 사람 역할은 충분히 하면서 중견 간부까지는 올라갔으니까 나름 능력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그래 봤자 월급쟁이인데.
지나치게 충성한 대가로 몸과 마음은 닳아버리고 결혼 생활도 그냥 그랬다.
약간 번아웃이 왔다고 할까, 아니면 우울증?
그 효율적인 조직이 그건 또 두고 못 보지.
이대로라면 조만간 퇴사각이 잡힐 거라는 것을 말단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중세 유럽풍의 판타지 세계로의 빙의? 환생? 그런 것은 내게 휴가 비슷하게 다가왔다.
실제로도 1년 정도는 잘 쉬었고.
그 이후가 문제였지.
그 이후가.
생각만해도 PTSD 오지네.
그래서 결정했다.
지금 당장 이 곳을 떠나기로.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간단했다.
나는 먼저 촌장의 집으로 갔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윌리엄님."
"정오가 되기 전까지 장원의 사람들을 모두 내 집으로 모이도록 해 주게."
나이차가 30이 넘게 나는 촌장은 내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 얼굴에 쓰여진, '이 녀석이 뭘 잘 못 먹고 이 지랄이지?' 라는 의문문은 지금 내가 내린 결정에 몰입해버린 나조차 금방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촌장은 내 선친과 친구 비슷한 관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주변에서 다 그렇다고 했으니 그렇다고 하기로 했다.
신분의 차이가 있고, 옆에서 보면 아래위가 명백하게 구분되지만 그래도 서로 존대하는 사이 정도?
그런데 그 아들인 내가 와서 대뜸 명령을 내리니 이게 뭔지 싶은 거겠지.
"못 들었나?"
"······예. 지금 연통을 하겠습니다."
"그래. 서두르게."
대놓고 신분제의 위력을 보여준 후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던 내 뒤쪽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촌장은 개인감정과 상관없이 할 일은 해주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서 정오가 되었을 즈음에는 장원에 속한 사람들 전체가 내 집 앞에 모였다.
50여 가구. 3백명이 조금 안 되는 숫자.
샌드호그 장원에 속한 사람들.
모래둔덕이라는 의미를 가졌을 정도로 척박한 땅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는 별 유감이 없었다.
그래서 부른 것이기도 했다.
"갑자기 모이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궁금했을 거다. 간단히 이야기하지. 나는 이 곳을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쓰지 않을 물건들을 너희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이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의 갑작스러운 말이 이해되지 않은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윌리엄님이 떠난다고? 윌리엄님은 여기 기사님이 아니시던가?"
"영주님의 허가가 있어야 할 텐데······"
"안 쓰는 물건이란 것은 뭐지?
웅성거리는 소음 사이에서 날카로운 고음이 솟아났다.
"아니, 잠깐! 윌리엄. 무슨 말입니까? 떠난다니!"
"떠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나?
"장원을 포기한다는 겁니까? 선친의 장원이지 않습니까? 그보다 영주님의 허락은 받으신 겁니까?"
촌장은 흥분으로 얼굴이 빨개져서 내게 물어왔다.
"법적으로 이 장원은 나와 관련이 없네. 선친의 장원이었고 이제는 애쉬 남작에게 돌아갔지. 누가 이 곳으로 올지는 남작이 정하지 않을까?"
"윌리엄! 일단 남작님께 가서 이야기를 드려봅시다. 버로스 경이 남작님께 봉사한 기간이 얼마입니까? 그렇게 간단히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샌드호그가 비록 작은 장원이지만 위치 때문이라도 앞으로 중요해질 겁니다. 그런 장원을 포기하다니요. 그건 아닙니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뻔히 아는 놈이 저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다니.
그 위치라는 것이 문제라서 이 지랄이 아니던가?
"되었네. 촌장. 나는 결정했어. 그러니까 닥치게."
평소와 다른 내 말투에 촌장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그제서야 나를 제대로 보고 흠칫했다.
*
안에는 모직옷을 입고 그 위에 강철 흉갑을 걸쳤다. 가죽 보호대로 팔과 다리를 감싸고, 몇 개의 단도를 몸 곳곳에 고정시켰다.
거기다 장검은 언제라도 뽑을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었다.
먼 길을 떠날 사람이라기 보다는 전쟁터로 나갈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풍기는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 같았다.
심지어 붉은 기가 노는 눈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느낌까지 줬다.
촌장은 평소 아직은 애송이라고 생각하던 윌리엄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오래 전 증세를 항의하던 농민들의 몸뚱이를 토막 내던 기사에서 느꼈던 바로 그 공포였다.
*
나는 촌장의 눈에 서서히 떠오르는 공포감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촌장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동안 샌드호그의 여러분들 덕분에 선친과 나는 잘 지낼 수 있었다. 그 보답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가구와 집기들을 남기겠다.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면 장원의 공동 창고에 넘기는 것으로 하지."
그리고 나는 그들을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하기로 했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해 줄 생각이었다.
*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을 금방 잊고 윌리엄이 남긴 가구와 도구를 보러 몰려갔다.
그러나 촌장은 그럴 수 없었다.
"촌장님. 윌리엄님이 남긴 가재도구들을 나누어야 합니다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런 것은 빌 영감이 가장 나이가 많으니까 그 영감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
촌장은 평소 자신이 부리던 부하들을 데리고 마을 창고로 갔다. 그곳에는 마을에서 사용하는 공용도구와 무기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애송이 놈이! 건방지게! [그러니까 닥치게] 그 따위로 지껄이다니, 지 애비도 내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 눈치도 더럽게 없던 놈이 도망을 쳐? 갑자기 없던 눈치라도 생겼나. 젠장. 집사에게는 뭐라고 하지?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희들. 무기를 챙겨."
"예? 아니 무슨 말이십니까요? 아까 보니까 윌리엄님이 제대로 무장을 하고 가셨던데! 무리입니다. 무리."
"기사 서임도 못 받은 애송이야. 지 애비가 죽고 난 후에는 훈련하는 꼴을 보지도 못했다. 체력조차 자경대의 젊은 놈들이 더 나을 걸. 게다가 우리는 넷이야!"
잠깐이지만 겁에 질렸다는 것은 한 때 영지병으로 근무했던 촌장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자존심을 손상당한 남자는 어쩌다가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촌장에게는 지금이 그때였다.
*
그러나 장원을 떠난 내게 촌장은 이미 관심 밖의 존재였다.
나는 두 마리의 말을 끌고 장원을 떠난 후부터 새벽에 내가 발견한 것에 대해 몰두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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