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드디어 지구에 갈 수 있는 건가?’
투황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긴장을 풀었다.
지구.
강현수의 고향 행성.
전쟁이 끝난 직후 곧바로 가고 싶었지만.
아틀란티스 재건 작업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지구에 방문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플레이어이자 수인족들의 수장 중 하나인 투황이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고.
이에 투황은 곧바로 그간 미뤄 뒀던 지구 방문을 결정했다.
적잖이 기대가 되기는 했다.
그간 지구에서 넘어온 물자들이 아틀란티스 재건에 꽤 큰 도움이 되었기에.
아틀란티스보다 발전된 문명이라는 지구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다.
“현수 씨는 언제 우리를 불러 주실까요?”
유카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투황에게 물었다.
사실 지구 방문을 가장 기대하던 사람은 투황보다는 유카였다.
“너 정말 지구에서 살 생각이야?”
투황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유카에게 물었다.
“당연하죠.”
유카의 확답에.
“에휴!”
투황이 철없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유카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투황과 유카는 아틀란티스 수인족들의 수장이다.
투황은 만장일치로 토인족들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자신의 오랜 염원이던 토인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끊어 냈다.
어디 그뿐인가?
투황은 단순히 토인족의 수장을 넘어서.
모든 수인족의 영웅이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수장이 되었다.
견인족과의 혼혈인 유카는?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견인족의 수장이자.
투황과 마찬가지로 모든 수인족의 영웅이며 투황 다음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수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지구에 정착해서 살겠다고 한다.
“전 원래부터 반은 지구인이거든요.”
유카의 말에 투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피만 물려받은 거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아틀란티스에서 살았잖아. 지구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으면서 지구인은 무슨.”
투황은 지구에 정착하겠다는 유카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현재 수인족은 적은 인구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오랜 염원이던 독립 왕국 건국에 성공했다.
이는 전적으로 아틀란티스 대륙 전체에서 엄청나게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투황과 유카의 존재감 때문이다.
한데 그 축 중 하나가 지구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겠다니?
투황으로서는 당연히 그런 유카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냥 현수 곁에 있고 싶어서 지구에 정착한다고 하는 거잖아.”
투황의 말에.
“맞아요. 왜, 그러면 안 되나요?”
유카가 선선히 자신의 본심을 인정했다.
“넌 하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투황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지만.
“제가 왜 미안해야 하죠?”
유카는 당당했다.
“그래, 너 알아서 해라.”
결국 투황도 포기했다.
사실 유카가 지구에 정착한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할 것도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로 수인족들의 나라 수장 자리에 이름만 올려놓고 생활만 지구에서 한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수인족들이 유카에게 바라는 건.
그녀가 가진 힘과 영웅이라는 명예지 실무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건 투황도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평생 주먹질만 하며 살아온 투황이 실무에 대해 뭘 알겠는가?
단지 일족과 동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투황의 입장에서.
일족과 동족보다 강현수라는 남자를 우선시하는 유카의 행동이 꼴 보기 싫었을 뿐이다.
-이제 부를게.
그때 강현수의 목소리가 투황과 유카의 머릿속을 울렸다.
-어.
-준비 끝났어요.
두 사람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투황과 유카가 아틀란티스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어서 와.”
강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투황과 유카를 반겼다.
“어.”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간단하게 인사를 한 투황과 유카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지구?”
“신기한 게 많네요?”
“난 보이지도 않니?”
그때 송하나가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을 소환한 곳은 송하나의 집이었다.
“아, 하나야, 반가워.”
“반가워요.”
두 사람은 대충 인사를 하고 집 안 이곳저곳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엄청 높네.”
“저 액자에는 왜 아무 그림도 없어요?”
투황과 유카가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지구에는 고층 건물이 많거든. 그리고 저건 TV라는 건데.”
강현수가 차분히 두 사람의 궁금증을 해소해 줬다.
‘일단 외형부터 감춰야겠네.’
수인족인 두 사람의 외형은 지구에서 너무 튀어 보였다.
“위장 스킬을 하나씩 줄게.”
강현수가 투황과 유카에게 위장 스킬을 부여했다.
귀와 꼬리 같은 수인족의 특징을 감출 수 있는 스킬이었다.
“오, 고마워.”
“감사해요, 현수 씨.”
두 사람이 곧바로 스킬을 사용하자.
투황과 유카의 몸에 있던 수인족의 특성이 말끔하게 사라지며 평범한 인간처럼 외형이 바뀌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강현수가 두 사람에 일상복을 내밀었다.
아틀란티스에서 입던 옷은 지구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저대로 나가면 영화 촬영하다 온 줄 알겠지.’
강현수가 미리 준비한 옷을 내밀자 두 사람이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쇼핑부터 하러 가자.”
임시로 준비해 놓은 옷은 몇 벌 되지 않았다.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것도 아니고.
투황은 보름 정도 머물 예정이었고.
유카는 아예 정착할 생각이었으니.
일단 옷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겸사겸사 지구의 문물도 소개를 해 주고 말이다.
‘언어 문제도 해결을 해 줘야겠네.’
플레이어들은 모든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들을 수 있는 것뿐 내뱉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들끼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투황과 유카가 일반인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할 줄 알아야 했다.
물론 그런 건.
‘그냥 스킬을 만들어서 부여해 줘야겠네.’
강현수가 투황과 유카에게 언어 스킬을 만들어 줬다.
수많은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언어 스킬을 부여하는 건 어느 정도 대가가 필요하지만.
투황과 유카 단 두 사람에게 부여하는 건 너무도 간단했다.
“그럼 가자.”
강현수와 송하나가 투황과 유카를 데리고 쇼핑에 나섰다.
“말 없는 마차가 있다니? 이건 어떻게 굴러가는 거야?”
“지구에는 정말 신기한 게 많네요.”
투황과 유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드높은 빌딩 숲, 자동차,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도로, 광고판, 수많은 상점들까지.
강현수는 차분하게 지구에 대해 설명하며, 일단 두 사람에게 옷을 선물했다.
“이렇게 다양한 옷들이 있는 곳은 처음이야.”
투황은 놀라워했고.
“전 이걸로 할게요.”
유카는 옷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쇼핑을 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엄청 맛있어!”
“종류도 엄청 많아요!”
투황과 유카에게 지구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구의 중세 정도의 경제 규모와 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아틀란티스 차원 출신인 두 사람에게.
지구라는 차원은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별천지나 마찬가지였다.
“저건 뭐 하는 곳이야?”
“영화관이야.”
“영화관?”
“한번 가 볼래?”
“그러지 뭐.”
투황과 유카는 영화를 관람했고.
“엄청 재밌다! 다른 것도 볼 수 있어?”
투황은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반면 유카는.
“나중에 보면 되잖아요.”
영화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투황과 유카는 영화 관람을 끝으로 지구 관광 첫날을 마무리했고.
저녁에는 강현수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지구 투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보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다.
* * *
지구 관광이 끝나는 날.
투황은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아! 궁 쓰라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구 관광은 꽤 재미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그러나 투황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기는 했어도 그렇게 큰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다.
가장 크게 흥미를 느낀 건 영화였다.
이에 강현수는 투황에게 스마트폰, 컴퓨터, TV를 선물해 줬다.
그 후 투황의 일상이 바뀌어 버렸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같은 영상 컨텐츠가 수도 없이 넘쳐 났고.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헤엄치며.
웹소설, 웹툰, 유튜브 등등.
온갖 종류의 컨텐츠를 즐겼다.
결정적으로.
“아씨! 등급전인데! 저 트롤 때문에 졌잖아!”
투황은 게임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아틀란티스로 안 가요?”
유카가 얼굴을 찌푸리며 투황에게 물었다.
투황은 보름의 관광을 온 것이고.
유카는 아예 지구에 정착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래서 유카는 강현수의 도움을 받아 지구에서 활동할 신분을 만들고.
지구에서 살 집은 물론,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조리 구매했다.
송하나의 집에서 신세를 지던 투황은 유카가 집을 구하자.
송하나의 집에서 유카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후 지구 관광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완벽한 방구석 폐인의 삶을 이어 갔다.
“어? 아틀란티스?”
“오늘 돌아가는 날이잖아요.”
유카의 말에.
“그냥 며칠 더 있지 뭐.”
투황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유카의 눈이 짜게 식었다.
“왜? 내가 있는 게 불편해? 그럼 하나 집으로 가고.”
“불편한 건 아닌데, 좀 황당하기는 하네요.”
유카의 말에 투황이 조용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어차피 가 봐야 내가 할 일도 없단 말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그럼 얼마나 더 있을 건데요?”
“한 3일?”
“알았어요.”
그 말을 끝으로 투황은 다시 게임에 빠져들었고.
유카는 익숙하다는 듯 자신의 집을 나서 강현수의 집으로 향했다.
그 후 다시금 보름의 시간이 흘렀고.
투황이 뭔가 꺼림칙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차원 게이트를 바라봤다.
“잘 가, 다음에 또 놀러 오고.”
강현수가 웃으며 말했고.
“어, 그럴게.”
투황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음에는 우리가 놀러 갈게. 잘 가.”
“전 아틀란티스에는 안 갈 거니까, 다음에 또 지구에 놀러 오면 봬요.”
송하나와 유카의 작별 인사를 받은 투황이.
“다음에 봐.”
차원 게이트를 넘어 아틀란티스로 복귀했다.
* * *
한 달간의 지구 관광을 끝마치고 아틀란티스로 복귀한 투황은…….
“심심해.”
너무 심심했다.
지구 관광 전에는 딱히 심심하지 않았다.
몬스터도 때려잡고, 재건 작업을 하는 와중에 필요한 힘쓰는 일도 도와주고.
발전해 나가는 수인족들의 왕국을 바라보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없어도 되는 거잖아.’
몬스터?
다른 플레이어들이 잘만 때려잡는다.
재건 작업?
굳이 투황이 아니더라도 힘써서 도와줄 플레이어가 널리고 널렸다.
발전해 나가는 수인족들의 왕국?
사실 투황이 있으나 없으나 수인족들의 왕국이 발전해 나가는 속도는 변함이 없다.
어차피 투황은 실무진이 아니라 수인족 왕국의 영웅이자 상징 같은 거였으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타국 정상들과 만나서 우호를 도모하고 외교라도 하겠지만.
타국 정상들이라고 해 봐야 결국 자신과 같은 강현수의 휘하 지휘관들이었다.
굳이 우호를 나눌 것도 없고 외교적인 이득을 챙길 것도 없다.
‘안 되겠어.’
지구 관광을 끝마치고 아틀란티스 차원으로 복귀한 지 3일째 되는 날.
-나 좀 다시 불러 줘.
투황은 강현수에게 추가 지구 관광을 요청했다.
-알았어.
강현수는 선선히 허락했고, 투황은 지구로 넘어왔다.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 갈 거야?”
강현수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고.
“어? 딱히 정해 놓은 건 없는데. 뭐,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알아서 연락하겠지.”
투황은 그렇게 대답하고, 유카의 집으로 향했고.
“3일 만에 다시 돌아왔네요.”
짜게 식은 유카의 눈빛과 음성에.
“딱히 내가 할 일이 없더라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답한 후.
다시 방구석 폐인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