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선택 (3)
“지금 호명한 녀석들이 영국을 떠날 거라고 했다.”
강현수가 친절하게 다시 한번 말해 줬다.
“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귀환자 출신 랭커 전원이 조국을 버린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멀쩡한 정신으로 떠날 거다. 내가 그렇게 지시할 테니까.”
강현수의 말에 존스 총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강현수의 눈빛.
담담하지만 확신이 담긴 어조.
존스 총리가 보기에는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영국 귀환자들과 인연이 있으신 겁니까?”
그게 아니면 절대 저렇게 호언장담할 리가 없다.
“그저 작은 인연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그 녀석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영국 출신 플레이어들만큼 강현수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이들도 없었다.
영국인들이 가진 최강의 패였던 카발길드가 무너진 이후.
영국인들은 진구평이 이끄는 중화길드의 지배를 받았고 수많은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강현수와 접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강현수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었고.
현 중국 주석 진구평과 러시아의 실세 도르초프의 주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미국? 인도? 일본?
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미 강현수의 종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각국의 귀환자들이 따로 힘을 합친 줄 알았다.
그러나 강현수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모든 진실을 깨달았고.
영국 귀환자 출신 랭커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절대적인 복종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강현수라는 존재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자.
홀로 한 차원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절대자였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아틀란티스를 수호한 자를 어떻게 막겠는가?
강현수가 영국 귀환자들에게 조국을 떠나라는 지시를 내리면, 그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뭐, 불타는 애국심으로 절대 조국을 버릴 수 없는 이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들 또한 강현수에게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영국 정부에 저항하는 선택을 하리라.
어쩌면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몰랐다.
애초에 강현수의 뜻을 거슬러 봐야 멸망뿐이니.
조국을 위한다면, 국민들을 위해 정부를 갈아엎어 강현수의 총애를 받게 만드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존스 총리는 혼란스러웠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를 발아래 두고.
영국의 랭커들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
그때 불현듯 귀환자들에게 들었던 정보를 취합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최강의 플레이어? 그런 존재는 그분밖에 없습니다.
-그분? 좀 더 말해 보게. 개인적인 정보면 더 좋고.
-이름도 모르고 국적도 모릅니다.
-아쉽군. 미리 포섭하면 좋았을 텐데.
-포섭이요?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무려 마왕을 쓰러트린 분입니다.
-그래도 귀환을 선택했다면 힘을 잃었을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을 포섭해서 부리는 무모한 짓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의 휘하에 들어가는 선택을 하는 게 낫습니다.
그때는 귀환자 플레이어가 너무 겁을 많이 집어먹었다고 생각했다.
또 아틀란티스 차원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모든 걸 포기하고 귀환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 존재가 귀환했다면?
잃은 힘을 모조리 복구했다면?
“하, 하하하.”
존스 총리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묘하게 확신이 갔다.
‘저자가 그분인가?’
최강의 플레이어.
마왕을 쓰러트린 자.
한 차원의 지배자.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어째서 미국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중국과 러시아와 손을 잡았는지.
아무리 큰 사고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자존심 강한 중국과 러시아가 왜 얌전히 미국에 협력하는지.
‘미국에 협력한 게 아니었어.’
그저 저자에게 굴복했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 충견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힘을 합쳤을 뿐이다.
-그분을 포섭해서 부리는 무모한 짓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의 휘하에 들어가는 선택을 하는 게 낫습니다.
귀환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강제로라도 이해해야 했다.
절대자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세계 플레이어 협회의 일에 영국의 국력을 전력으로 투사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의회에서 회의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랭커들이 나서 준다면 의회도 어찌하지 못할 겁니다.”
“좋다,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하나 공식 발표가 늦어질수록,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거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존스 총리의 공손한 대답에 강현수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본보기를 보일까 했더니, 역시 판단력이 좋아.’
눈치도 빨랐다.
강현수는 아시아 차원 게이트 사태 이후, 마음이 급해졌다.
뭐,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강현수가 더 빠르게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쓸데없는 힘겨루기로 인한 내분을 종결시키고,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렇기에 강현수는 조금 강경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다소 부작용이 있더라도 일단 세계 각국의 군사력과 플레이어 전력을 하나로 묶을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만약 존스 총리가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나왔다면?
강현수는 진짜 영국을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 탈퇴시키고.
랭커 플레이어들을 싹 빼낼 생각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 경제적 보복도 준비되어 있었다.
‘뭐, 실제로 타격을 입는 일은 없겠지만.’
괜히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저 영국을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 탈퇴시키기만 해도.
랭커들이 영국을 떠나고, 미국, 중국, 러시아의 경제 보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만 돌아도.
영국 정권은 교체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물론 정치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정권을 교체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행히 존스 총리는.
‘말귀를 알아먹을 정도의 융통성이 있는 놈이군.’
그런 융통성도 눈치도 없는 놈이었다면?
본보기로 삼아 타국에 경각심을 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나쁠 건 없지.’
강현수는 영국을 시작으로, 반항적인 유럽 국가들을 하나하나 꺾어 휘하에 넣을 생각이었다.
강현수가 도플갱어 한 기를 소환했다.
모습을 드러낸 도플갱어는 존스 총리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 이자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도플갱어의 모습에 존스 총리는 경악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 녀석을 네 대역으로 쓸 계획은 이미 폐기했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을 항상 네 곁에 두어야 한다.”
강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존스 총리의 모습을 하고 있던 도플갱어가 낯선 영국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현수의 지시에 존스 총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현재 존스 총리의 등은 축축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외형으로 변하는 존재를 목격했다.
그 말은.
‘언제든지 나를 제거하고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인가?’
어쩌면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든 가능할 수 있었다.
‘혹시?’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의 지도자가 과연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라. 단순히 외형만 비슷하다고 다가 아니지 않나?”
강현수의 말에.
“아아아.”
존스 총리는 그제야 안도했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외형이 같다고 해서 대역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는 없다.
기억, 역량, 결단력, 판단력 등등.
저 인형 같은 존재와 인간은 확연히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
긴 시간은 불가능하더라도 짧은 시간만큼은 얼마든지 정체를 감추고 활동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수장이 내리는 결정 중에는 나라의 명운을 가르는 중대한 것도 많았다.
그렇기에.
‘저 존재를 이용해 영국을 지배할 수는 없어도 망칠 수는 있다.’
절로 공포가 밀려왔다.
미국을 비롯한 강국들과 자국의 랭커들을 다루는 영향력만으로도 두려울 지경인데.
저런 괴이한 존재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존스 총리로서는 저항할 마음이 완전히 꺾여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존스 총리가 진실을 알았다면 더 경악했으리라.
사실 도플갱어는.
‘죽은 자의 기억을 읽고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인간을 흉내 낼 수 있지.’
강현수가 굳이 그 사실을 존스 총리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도플갱어는 어디까지나 흉내 내는 존재일 뿐.
진짜와는 역량, 결단력, 판단력 같은 곳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상함을 느끼는 이가 나올 수도 있지만.
과거 기억을 기반으로 움직이게 지시한다면?
사실상 진짜와 구분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괜히 도플갱어들의 침공에 아틀란티스 차원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게 아닌 것이다.
“그럼 수고하도록.”
도플갱어를 남긴 강현수는 그대로 영국을 떠났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일단 하나는 정리했고.’
이제는 유럽의 내륙을 점령할 차례였다.
그 첫 번째 타자는?
당연히 프랑스나 독일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둘 중에 어느 나라를 먼저 처리할까?’
프랑스와 독일을 저울질하다 보니.
‘일단 집으로 가자.’
어느새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되어 버렸다.
* * *
강현수가 떠난 후.
존스 총리는 조용히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미 결정도 내렸고 확신도 있었지만, 작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버틀러 대통령과 직접 통화를 했고.
중국 주석, 러시아 대통령, 인도와 일본의 총리에 이어.
심지어 대한민국과 신한민국의 대통령들과도 통화를 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올리버, 스튜어트, 레스, 존, 올리비아 같은 귀환자 출신 랭커들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절대 그분을 거스르려 하지 말게.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직 믿기 힘든가 보군. 하지만 금방 적응하게 될 걸세.
-영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분을 거스르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더 강한 절망과 공포를 느꼈을 따름이었다.
‘얌전히 따르자.’
대한민국, 신한민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정부가 그분께 복종한다.
위 나라들의 랭커들도 모두 그분을 따른다.
그러니 영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복종해야 했고.
또한.
‘그분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영국은 가장 늦깎이 신입생이다.
대한민국, 신한민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결정적으로.
‘조만간 유럽 국가들이 들어올 거다.’
그들에게까지 뒤처질 수는 없다.
특히 오랜 앙숙인 프랑스에게만큼은.
절대 질 수 없었다.
* * *
프랑스의 마크룽 정부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기보다 말로서 설득했다.
뭐, 말로 설득한다고 시위대의 고집이 꺾이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국민들의 공포심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아시아 차원 게이트 사태를 보고 공포를 느꼈다면, 시간이 흘러도 유럽이 멀쩡한 것을 보고 나름 안도감을 느낀 것이다.
프랑스 시위대의 규모가 줄어든 건 아니었지만, 시위 강도는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그건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시위대의 규모 자체가 줄어든 나라도 꽤 많았다.
이에 마크룽 정부를 비롯한 유럽 국가의 국가 정상은 나름 안도했다.
특히 프랑스 마크룽 대통령의 경우.
‘이제 슬슬 움직이라고 언질을 줘도 되겠어.’
준비하고 있던 카드를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
영국 정부에서 충격적인 발표가 흘러나왔다.
-영국, 세계 플레이어 협회의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
-유럽 최초의 긴급 개입 조치 동의국이 된 영국!
영국 정부가 세계 플레이어 협회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하는 순간, 조금 누그러졌던 유럽 각국의 시위 열기가 불타올랐고.
그중에서도 특히.
-아아아, 우리의 조국 프랑스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앞서가는 영국! 뒤처지는 프랑스!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 존스 총리! 국민의 뜻을 거부하는 마크룽 대통령!
영국과 오랜 앙숙 관계인 프랑스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