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선택 (2)
“실례지만 누구신지?”
존스 총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강현수에게 물었다.
‘당황했으면서도, 나름 침착하게 대응하는군.’
판단력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강현수라고 한다. 여러 나라들을 대표해서 왔다.”
“그게…….”
존스 총리가 무슨 헛소리냐고 덧붙이려다가 애써 입을 다물었다.
강현수의 뒤에 아랫사람처럼 얌전히 시립하고 있는 미국 대사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다.’
각국의 대사는 그 나라를 대표해 타국에 파견된 인물로.
자국 대통령이나 총리의 권위를 대리하는 자다.
그렇기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해야 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대사의 말과 행동이 그 국가의 공식적인 뜻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미국이라는 국가가 저 동양인 청년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미국 대사가 미국 대통령의 대리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대리는 대리.
진짜 미국 대통령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동양인 청년이 보통 인물이 아닌 건 확실하다.’
미국 대사가 저렇게 예를 갖춘다는 건.
당연히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럼 당연히 각국을 대표해서 왔다는 말 역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각국이라면 어느 나라들을 말씀하시는 건지?”
존스 총리가 강현수에게 물었다.
“대한민국, 신한민국, 미국…….”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동양인이니 대한민국이나 신한민국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미국 대사와 함께 오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어진 국가들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많이 달랐다.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강현수의 말이 끝나자, 존스 총리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현재 긴급 개입 조치 가입국들이잖아.’
대한민국, 신한민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이 하나로 힘을 뭉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연결이 그리 두텁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그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대표자를 선발하다니?
이건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
‘대한민국을 가장 먼저 말했어.’
그럼 저 청년이 한국인일 확률이 높았다.
순간 머릿속에 대한민국이 신한민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연합체의 실세라는 가정이 떠올랐다.
상식적으로 여러 국가 연합체의 대표자를 뽑는다면?
연합체의 주도권을 쥔 쪽에서 선발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해.’
존스 총리는 머릿속 떠오른 실현 불가능한 망상을 말끔히 지워 버렸다.
그래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왜?’
미국이라면 당연히 수긍했을 것이다.
중국인이나 러시아인이라면?
의아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
그것도 저렇게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청년을 왜 각국의 대표로 삼아 영국 총리인 자신에게 보냈단 말인가?
연합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강현수가 입을 열었다.
“예상과 달라서 혼란스러운가 보군.”
강현수의 말에 존스 총리가 눈을 반짝였다.
‘생각해 보니 나쁠 건 없어.’
어쨌든 상대는 자신의 도움을 원하기에 찾아온 것이다.
그럼.
‘구슬리면 그만이다.’
연합체의 대표로 미국의 버틀러 대통령이 직접 왔다고 해도.
적당히 말을 돌려 가며 구슬릴 자신이 있었다.
‘저 연합체는 영국의 긴급 개입 조치 동의를 원한다.’
아시아 차원 게이트 사태로 국민들의 여론이 돌아서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현 상황에서는 어차피 무작정 버티는 것도 상책이 아니었다.
‘차리리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은 후 가입하자.’
다시 EU에 가입해 봐야 들러리 노릇밖에 못 할 거라면.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을 믿는 게 최선이었고.
최대한 많은 걸 얻어 내려면.
‘협상 대상이 어린 게 나쁠 건 없지.’
오히려 좋았다.
눈앞의 동양인 청년이 미국 버틀러 대통령보다 손쉬운 상대인 건 불 보듯 뻔했으니까 말이다.
“그럴 리가요. 그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존스 총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신 건지?”
“세계 플레이어 협회 비상 개입 조치에 동의해라.”
강현수의 말에 존스 총리가 속으로 비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어려.’
설마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목적을 말할 줄은 몰랐다.
영국은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아무리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같은 강대국들이 손을 잡았다고 해도.
‘영국을 어찌할 수는 없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그것이 바로 대영제국이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썩어도 준치고,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듯.
영국 역시 많은 것을 잃었음에도 남아 있는 게 적지 않았다.
대영제국은 무너져 내렸지만, 영국연방은 아직까지 건재했다.
심지어 저 연합체의 일원인 인도조차도.
‘영국연방에 속해 있지.’
인도가 최근 벌어졌던 사건으로 인해 연합체에 많이 끌려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영국 역시 인도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그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존스 총리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거절인가?”
강현수의 물음에.
‘역시 어려.’
존스 총리는 NO를 외치지 않았다.
그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을 뿐.
그럼 적당히 먹잇감을 던져 줘야 한다.
그런데 거절이냐고 묻다니.
‘도대체 왜 이런 인물을 대표랍시고 보낸 거지?’
존스 총리가 보기에 강현수라는 존재는.
외교의 ‘외’ 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하하하, 거절이라뇨? 아직 의회에서 한창 회의 중인 문제라 확답을 드릴 수 없을 뿐입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 주신다면 제가 의회를 설득하는 데 힘을 보탤 수는 있을 것 같군요.”
존스 총리는 외교 문외한인 강현수를 위해 적당한 힌트를 건넸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그러나.
“YES냐, NO냐. 그것만 대답해라.”
강현수는 존스 총리의 힌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YES라고는 대답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NO라고 대답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문제라니까요?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차분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말귀를 알아먹을 때까지 말을 돌리면 그만이다.
“나는 그렇게 인내심이 길지 않다.”
강현수의 말에 존스 총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제아무리 연합체의 대표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무례였다.
설사 미국 대통령 버틀러라고 해도 존스 총리 앞에서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유감이군요.”
존스 총리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강현수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이건 외교적으로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군.’
이 자리는 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대사도 동석해 있다.
말을 돌리며 시간을 끌면?
득도 있지만, 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가 무례를 저지른다면?
‘실은 없고 득만 있을 뿐이지.’
거절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럼 보류도 감지덕지할 것이다.
침착한 대응으로 연합체가 기분 나빠 할 일을 오히려 고마워할 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게 외교라는 거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연합체의 대표로 저런 애송이를 내세운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역시 거절이군.”
강현수의 말에 존스 총리가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가 가까스로 참아 냈다.
‘YES가 아니면 NO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완전 흑백논리군.’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건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영국이 EU에 이어 세계 플레이어 협회조차 탈퇴할 줄은 몰랐는데. 배짱이 두둑하군.”
그러나 이어지는 강현수의 말은 도저히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국을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 탈퇴시키겠다.”
강현수의 말에 존스 총리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자국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하라고 난리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 축출되면?
존스 총리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나 마찬가지다.
‘헛소리다.’
존스 총리가 애써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영국을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 탈퇴시키겠다니?
세계 플레이어 협회가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다.
최대한 긴급 개입 조치 가입국을 늘리려고 전전긍긍하는 세계 플레이어 협회가 그런 악수를 둘 리도 없고.
그걸 미국이 허락할 리도 없다.
존스 총리가 미국 대사에게 시선을 보냈다.
알아서 중재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본국에 전달해 영국을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 탈퇴 처리하겠습니다.”
미국 대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더니,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을 내뱉었다.
“스미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존스 총리는 미국 대사와 적잖은 친분이 있다.
사석에서는 친구처럼 편하게 이름을 부를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미국 대사 스미스가 보여 주는 행동과 태도는.
존스 총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정신이네.”
“자네, 그사이 영국 생활이 지겨워지기라도 한 건가?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나?”
대사 자리에서 잘리고 싶냐는 물음이었다.
“그런 생각은 없다네.”
“그런데 지금 영국을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 탈퇴시키라는 의견을 본국으로 보내겠다고?”
버틀러 대통령이 미친 게 아니라면 절대 승인할 리가 없다.
“그게 이분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이분?”
존스 총리가 강현수를 바라봤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존스 총리, 미국 대사 스미스, 강현수뿐.
그럼 당연히 ‘이분’은 강현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네 혹시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나?”
그게 존스 총리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한계였다.
“약점은 무슨. 난 그저 버틀러 대통령 각하의 엄명에 따를 뿐이네.”
“엄명?”
“무슨 지시를 내리든 따르라고 하셨네.”
“지시?”
존스 총리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미국뿐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엉뚱한 동양인 청년이 끼어든다는 말인가?
“내가 대표로 왔을 뿐, 중국 대사, 러시아 대사, 인도 대사 또한 자국의 주석, 대통령, 총리에게서 같은 엄명을 받았네.”
“그, 그게 무슨?”
존스 총리는 자신의 상식이 비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정답은 간단하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가 강현수를 중심으로 뭉쳤다면…….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강현수가 연합체의 주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가 고작 한 사람을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건.
절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올리버, 스튜어트, 레스, 존, 올리비아…….”
그때 강현수가 존스 총리의 귀에 익숙한 이름들을 나열했다.
영국에서는 상당히 흔한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그 흔한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왜 우리 영국 랭커들의 이름을 부르는 거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의 주인들은 영국의 공식, 비공식 랭커들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모두 귀환자잖아.’
귀환자 출신 영국 랭커의 이름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호명되었다.
“그 녀석들도 영국을 떠날 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존스 총리 입장에서는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
차원 게이트 사태를 막아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가 플레이어고, 그 정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랭커다.
그런데 지금 강현수는.
영국 총리인 존스 앞에서 영국 국적 랭커 절반 이상이 자국을 떠날 거라고 말했다.
‘헛소리여야 한다. 무조건 헛소리여야 해.’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더 이상 강현수의 말이 헛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