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카우르
다른 타 차원 출신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지만.
도르초프 역시 강제로 지구에서 아틀란티스로 끌려와 플레이어가 되었다.
사실 하위 플레이어가 아니라 네임드 플레이어 정도면.
오히려 아틀란티스에서의 삶에 더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도르초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도르초프는 간절히 지구로의 귀환을 원했고.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다.
마왕 그레모리를 쓰러트리고 지구로 귀환하게 되었을 때.
도르초프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지구로의 귀환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구로 귀환하고 2회 차 플레이어로 각성해 버렸다.
‘굳이 아틀란티스에서의 삶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
귀환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도.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이끄는 위치에 다시 서고 싶지도 않았다.
또 믿는 구석도 있었다.
‘주군이 있으니 이번 침공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강현수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는 만큼.
도르초프가 아틀란티스에 있을 때처럼 거대 길드를 만들고 플레이어들을 이끌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조용히 살았다.
그렇지만.
돈이 필요했기에 플레이어로 활동할 필요가 있었고.
또 네임드 플레이어였던 가락에 2회 차 특전까지 있다 보니.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수준의 플레이어로 보이도록 노력하며 가족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이반과 이고르를 만났다.
이반은 도르초프와 같은 선택을 했고.
상당히 의외였지만, 그건 이고르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적당한 수준의 플레이어로 위장하며 평범한 삶을 즐겼다.
그러던 중.
언데드 몬스터 침공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 실력을 숨길 수는 없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세 사람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간 숨겨 왔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어쩐지 좀 약하기는 하더라.”
강현수가 봤을 때, 세 사람의 실력은 아틀란티스에서와 비교하면 꽤 많이 부족했다.
랭커급은 넘어섰지만.
세 사람은 이미 아틀란티스에서 네임드 플레이어의 자리에 올랐던 이들.
고작 지구의 랭커 수준을 조금 넘어섰다는 점에서 이미 기준 미달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세 사람 모두 독보적인 고유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그간 꽤 푹 쉬었나 보네?”
사실상 낙제 수준이었다.
“저, 주군 그게…….”
“크흠, 푹 쉬었다기보다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세 사람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강현수에게 변명을 토해 냈지만.
“그럼 지금부터 열심히 달려도 불만은 없겠지?”
강현수 앞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독보적인 수준의 강자가 될 재능을 가진 놈들이 쉬엄쉬엄하는 꼴은 못 보지.’
아무리 상황이 낙관적이더라도.
‘유비무환이지.’
나중에 상황이 안 좋아졌을 때.
그때 노력할 걸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굴릴 수 있을 때 최대한 굴려 둬야지.’
강현수의 머릿속에 자기도 처음 지구로 귀환하고 ‘쉬엄쉬엄해도 괜찮겠네.’라고 생각했던 기억은 이미 삭제된 후였다.
“네.”
“알겠습니다.”
“뭐, 전 항상 열심히 했으니까요.”
세 사람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다음 날부터 세 사람은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저녁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사냥에 매진해야 했다.
세 사람 모두 강현수의 휘하 지휘관이 되었고 그 덕에 스텟이 많이 증가했지만.
이런 혹독한 사냥 스케줄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으아아아!”
“억울해! 억울해!”
“강현수! 가만두지 않겠다!”
세 사람은 강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대상은?
당연히 강현수였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이 강현수에게 강하게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히 강현수가 자신들을 빡세게 굴려서가 아니었다.
“자기는 띵가띵가 놀면서!”
“우리는 수동인데 왜 자기는 오토야!”
“나도 오토 사냥 하고 싶다!”
자기들이 힘겹게 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쉼 없이 몬스터를 사냥하는 동안.
강현수는 편하게 소환수들을 돌려 오토 사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레벨 업 속도도 강현수가 세 사람보다 월등히 빨랐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세 명이서 열심히 노력해 봐야.
수만 기에 달하는 소환수의 효율을 따라갈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세 사람은 레벨이 올라갈수록 효율이 떨어지지만.
무한대로 0레벨 플레이로 돌아가는 강현수의 사냥 효율은?
항상 최상이었다.
* * *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국가를 위기로 밀어 넣고.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시켰으며.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던 포틴 대통령과 그 수족들이.
러시아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건 잘못된 법이다!”
“우리에게는 면책특권이 있다고!”
포틴 전 대통령의 수족들이 목소리 높여 부르짖었지만.
재판 결과가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포틴 전 대통령은.
반쯤 풀린 동공으로 멍하니 판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플레이어, 군부, 기업, 언론을 사용해 재기를 꿈꿨지만.
강현수가 나섬으로 인해 모두 물거품으로 변해 버렸다.
“그때 버림받은 것이 다행이군.”
“그러게 말이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버림받은 두 사람은 러시아의 영웅이 되었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주했던 포틴 전 대통령과 그 수족들은 정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사형선고를 받고 말았다.
그건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르초프, 이반, 이고르.
무명이었던 이 셋은 러시아의 국민 영웅으로 등극했고.
반면 기존에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던 러시아의 랭커들은?
“피고에게 종신 던전 노역형을 선고한다.”
종신 던전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플레이어인 만큼.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형태의 노역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나마 포틴 전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협조하지 않고 얼떨결에 끌려갔던 이들은.
종신이 아니라 5년부터 50년까지 다양한 종류의 던전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나름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이다.
어쨌든 언젠가는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종신 던전 노역형을 선고받은 랭커들이었다.
평범한 고레벨 플레이어도 아니고 랭커인 만큼 무력으로 반항하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종신 던전 노역형을 선고받은 랭커들은 조용히 러시아 법원의 판결에 따랐다.
이에 러시아 국민들은 랭커들이 도르초프, 이반, 이고르 이 세 사람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나 때문이지.’
강현수에게 덤벼들었다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박살이 난 경험을 한 러시아 랭커들은.
순순히 종신 노역형을 받아들였다.
저항해 봤자 좋은 꼴 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러시아 복구가 얼마나 빨리 이뤄지려나.’
고작 리치 한 마리가 지구로 넘어왔을 뿐이건만.
세계 2위의 군사 대국 러시아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아마 강현수의 개입이 없었다면?
인류는 더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대로 멸망했을 수도 있다.
미국, 중국, 일본은 이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강현수가 제안한 세계 플레이어 연합에 힘을 실어 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왔다.
미국은?
겉으로 보기에 자신들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중국과 일본은?
강현수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러시아의 경우도 당연히 자동 참가였다.
‘미국이 나서서 대대적으로 지원을 할 테니, 물질적인 손실은 금방 복구할 수 있겠지.’
그러나 사라진 인명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해.’
독재자 한 명의 오판으로 수천만 명의 사상자가 일어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런 대참사가 반복된다면?
인류는 마왕군이 본격적으로 침공하기도 전에 자멸할지도 몰랐다.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이미 대한민국, 신한민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강현수의 손에 들어왔다.
신한민국은 예외지만, 나머지 다섯 개의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인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다.
‘이 다섯만 잘 컨트롤하면 문제없어.’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와 그에 대립하며 각을 세우던 중국 및 러시아를 손에 넣은 만큼.
인류에게 큰 타격을 줄 만한 사건은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현수는 며칠 가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 * *
인도.
전 세계 인구수 2위로, 1위인 중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나라.
조만간 인구수만큼은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이기도 했다.
국가 GDP는 세계 6위였고.
영토는 세계 7위이며.
군사력은?
핵보유국으로 세계 1위 미국, 세계 2위 러시아, 세계 3위 중국에 이어 세계 4위의 강대국이다.
그러나.
인도만큼 문제가 많은 나라도 없었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
신분제 사회는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가 존재하는 나라.
피부색이 신분을 결정하는 나라.
화장실이 없는 나라.
물이 심각하게 부족한 나라.
수많은 인종과 종교.
그리고 수억의 신이 존재하는 나라.
영어를 포함해 총 15개의 공용어가 있고, 무려 2,138개의 언어가 있는 나라.
여성 인권이 극도로 낮은 나라.
성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해 강간 왕국이라고 불리는 나라.
국회의원이 ‘성폭행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말하는 나라.
‘밤에 돌아다니거나 단정하지 않은 여성이 성폭행당하면 그 책임은 남자가 아닌 여성에게 있다.’고 말하는 나라.
분명 강대국이지만, 수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나라가 인도였다.
그런 인도의 최하층은?
불가촉천민 달리트였고, 그중에서도 여성이다.
원래 카스트제도에 속한 이들은 불가촉천민과는 접촉조차 할 수 없다.
만지면 부정 타고, 몸에 닿으면 절대 안 되는 미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부정해진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폭행은 가능하다는 이해가 불가능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불가촉천민, 특히 여성의 삶은.
지옥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인도 정부는 카스트제도를 공식적으로 타파했고.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도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
그러나 변화는 너무 느렸다.
특히 인프라가 부족하고 정보의 전달이 느린 시골의 경우.
불가촉천민의 여성들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저항하거나 반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각성을 통해 플레이어라는 힘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순간.
상황이 변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음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했고.
그래서 전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 플레이어가 어긋난 각성을 해 버렸다.
* * *
카우르는 불가촉천민 계급에 속한 여성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불행을 겪었다.
그러나 저항할 방법이 없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플레이어로 각성했고.
출신과 이름을 바꾸고 플레이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피부색, 이목구비, 어휘들로 인해 금방 탄로가 났고.
계속해서 차별을 받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플레이어였으니까.
하지만 가족들까지 지킬 수는 없었고.
상대가 같은 플레이어라면?
자신의 몸조차도 지킬 수가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불행이 연달아 카우르를 찾아왔고.
세상을 저주하고 분노를 토해 내던 그 순간.
[전직 조건을 완료했습니다.]
[가이아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전직 시스템입니다.]
[오류! 오류!]
[U-EX랭크 피와 살육의 네크로맨서로 전직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피처럼 붉은 시스템 메시지가 카우르의 눈앞에 떠올랐고.
카우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