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대가 (3)
“내가 그 고민을 해결해 주지.”
낯선 언어의 주인공 강현수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고.
러시아 플레이어 출신 소환수가 강현수의 말을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에게 통역해서 전달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요?”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있는 곳은.
군인과 플레이어 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지휘통제실로, 일반인은 절대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나? 난 너희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자, 멸망할 뻔한 러시아를 구원해 준 사람이다.”
강현수가 그 말과 함께 손을 들어 올리자.
척!
언데드 몬스터를 쓸어버린 후 수도 모스크바를 호위하듯 정렬해 있던 3만의 칠흑빛 갑옷을 입은 플레이어들이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한 후.
강현수가 있는 방향을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지휘통제실의 일방투명경 유리창을 통해 강현수가 보여 준 화려한 퍼포먼스를 목격한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태도가 급변했다.
“러시아를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곳에 앉으시지요.”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강현수에게 굽실거리며 상석을 양보했다.
언데드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러시아를 구해 준 은인이라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줘서?
그것도 있겠지만.
방금 전 엄청난 위용을 선보인, 러시아를 가볍게 멸망시킬 수도 있는 플레이어 병력이 고작 한 사람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에게 엄청난 전율과 공포를 선사했다.
말 그대로 일개 개인이 일국을 무너트릴 힘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틴 대통령은 개인의 욕심과 정치적 이득을 위해 수많은 악수를 뒀어. 그 결과 러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자기만 살겠다고 수도 모스크바까지 버렸지. 나라를 말아먹은 역적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강현수의 말에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동시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너희 둘도 혹시 포틴 대통령과 한패야?”
강현수의 물음에?
“아닙니다!”
“우리와 포틴 대통령은 이미 한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관계입니다!”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힘차게 대답했다.
원래 두 사람은 포틴 대통령의 수족이었지만.
이미 버림받은 사냥개 신세였고.
다시 꼬리를 흔들어 봤자.
끓는 솥에 들어가 삶아질 신세였다.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입장에서는.
죽으나 사나 포틴 대통령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길 방법과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해외 통신망은 복구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당장 외신을 통해 포틴 대통령이 한 행위를 대대적으로 알려. 그리고 너희 둘을 포함해서, 이번 전쟁에서 활약한 도르초프, 이반, 이고르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그럼 포틴 대통령에게도 모스크바를 지켰다는 사실이 알려질 겁니다.”
“포틴 대통령이 모스크바로 복귀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국가반역죄로 체포해서 감옥에 처넣어야지. 다른 도시는 몰라도 수도인 모스크바는 포틴 대통령에게 적대적일 거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만.”
“포틴 대통령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머뭇거리자.
“이거 영 장기짝 상태가 안 좋네. 다른 걸로 바꿔야 하나?”
강현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고.
그와 동시에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닙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두 사람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
더 타기 싫다고 호랑이 등에서 내려가면?
그대로 호랑이한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호랑이 정도는 한입에 삼킬 수 있는 괴물이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상황.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다.’
‘머뭇거려 봐야 내 명만 줄일 뿐이야.’
뼛속까지 각인된 포틴 대통령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망설이다가는.
호랑이가 아니라 괴물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
“한데 외신을 통해 이번 사태가 알려지면 타국이 어떻게 나올지.”
총리 드리트미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국제사회는 야생이다.
러시아라는 덩치 큰 불곰이 비틀거리면?
살점을 뜯어먹기 위해 온갖 맹수들이 달려들 게 뻔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미국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안 그래도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어 당장 복구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수작을 부려 포틴 대통령의 세력과 총리 드리트미, 군사령관 미하엘의 세력이 벌이는 권력 싸움이 길어지면?
복구는커녕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고.
그 과정에서 미국이 러시아 플레이어들을 빼돌리기라도 하면 러시아는 더욱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네놈들이 나라 걱정하는 애국자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강현수가 냉소했다.
수도 모스크바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한 두 사람이지만.
애초에 자의가 아닌 타의였고.
이 두 사람 역시 결국은 포틴 대통령의 독재에 동조하며 장기간 권력을 독점해 온 러시아의 악성종양 아니겠는가?
‘필요해서 써먹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잘라 내야지.’
아니면 계속해서 실권 없이 일만 하는 꼭두각시로 부려 먹든가 말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 두 사람이 포틴 대통령을 몰아내고 러시아의 정권을 잡아야 했다.
“뭐, 미국과 중국은 내가 알아서 컨트롤할 테니까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반색했다.
미국과 중국.
세계 1위, 2위의 경제 대국이 자신들에게 협조적이라면?
그건 포틴 대통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 데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버틀러 대통령과 진구평 주석에게 너희 둘에게 협조하라고 따로 지시를 내려 주마.”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강현수의 말에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머릿속은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과 중국 주석에게 지시를 내리겠다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강현수의 말을 믿기도 힘들었지만.
‘저 말이 진짜라면 미국과 중국은 이미 저자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상태. 우리도 결국은 저자의 꼭두각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엄청난 문제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차피 선택지는 없다.’
‘지금은 포틴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권력을 잡는 게 우선이야.’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강현수가 천사 아니라 악마라고 해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뭐, 애초에 힘의 격차가 너무 컸기에.
반항해 봐야 러시아를 다스릴 꼭두각시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이들로 교체될 뿐이었지만 말이다.
* * *
“모, 모스크바가 무사하다고 합니다.”
부총리의 말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피신을 온 포틴 대통령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거 다행이군. 언데드 몬스터 대군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라도 한 건가? 설마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 건 아니겠지?”
포틴 대통령의 물음에 부총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국제기구인 세계 플레이어 연합의 지원군이 와서 언데드 몬스터 대군을 섬멸했다고 합니다.”
부총리의 말에 포틴 대통령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포틴 대통령이 노성을 토해 냈다.
“여기 기사에 보면.”
부총리가 외신들의 기사를 임시 회의실 벽에 띄웠다.
-마족의 첫 침공 대상은 러시아!
-세계 플레이어 협회, 러시아를 침공한 마족 섬멸!
-폐허로 변한 러시아 도시들의 참상!
-세계 플레이어 협회, 러시아를 초토화시킨 언데드 몬스터 10만 대군 격파하며 그 위용을 과시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단순히 세계 플레이어 협회의 지원이 빨리 온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애써 감추려고 했던 일들이 각국의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게 문제였다.
-세계 플레이어 협회 지원 요청을 거부한 포틴 대통령의 결정이 불러온 참상!
-포틴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최소 수백만에서 최대 수천만의 러시아 국민이 사망했다!
-위기에 처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사라진 포틴 대통령!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지킨 사람은?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
-언데드 몬스터들의 침공 당시 포틴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
-수도 모스크바의 국민들을 버리고 측근들과 함께 도망친 포틴 대통령의 추태!
-그간 언데드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동원하지 않은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들을, 수도 모스크바를 버리고 도망칠 때 사용한 포틴 대통령!
“미친!”
포틴 대통령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해외의 모든 외신들이.
자신을 대놓고 까고 있었다.
이 기사를 타국인들만 보겠는가?
당연히 자국인인 러시아인들도 볼 수밖에 없다.
거기다 외신들은 혹시 러시아인들이 언어의 장벽에 막혀 기사를 읽지 못할까 봐.
친절하게 러시아어로 번역한 기사를 따로 올리기까지 했다.
“지금이라도 모스크바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외신들을 모아 모스크바에서 이 소식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합니다.”
포틴 대통령과 수도 모스크바를 버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몸을 피한 부총리와 각부 장관들 그리고 대통령궁 참모들은 잔뜩 몸이 달았다.
또한 이번 일을 충분히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간 이동 스킬을 사용해 수도 모스크바로 복귀한 후.
도망친 게 아니라 크렘린궁에서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고 발표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외신들이 쓴 기사는?
포틴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목적을 가진 가짜 뉴스로 몰아가면 그만이다.
“수도인 모스크바로 돌아가자고? 그럼 정말 끝장이라는 거 모르나?”
포틴 대통령의 말에 부총리와 각부 장관들 그리고 대통령궁 참모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를 보게. 외신들이 드리트미와 미하엘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어.”
-목숨을 걸고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지켜 낸 영웅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
-포틴 대통령에게 버림받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사수하다!
-대부분의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도망쳤지만,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은 달랐다!
그저 너무 급해서,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기사들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확인하니.
“사냥개가 주인을 물었군요.”
“드리트미와 미하엘, 이 망할 작자들이!”
부총리와 각부 장관들 그리고 대통령궁 참모들 역시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배신을 알아차렸다.
“아마 모스크바는 드리트미와 미하엘이 장악했을 거네.”
포틴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테니.
모스크바에 남겨졌던 국민, 군인, 플레이어 모두 포틴 대통령을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로 복귀하면?
곧바로 잡혀서 국가반역죄로 감옥에 들어갈 게 뻔했다.
“사단장들과 기업 총수 그리고 거대 길드의 길드장 들을 불러 모으시오.”
포틴 대통령과 함께 도주한 이들은 죽으나 사나 포틴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럼 그들을 통해 언론 플레이를 펼쳐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판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그간의 실책?
그건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결정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고.
수도 모스크바를 버렸다?
그건 버린 게 아니라 자신의 실책이 드러날까 두려워 쿠데타를 일으킨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를 피해 도망친 것으로 포장하면 그만이다.
‘국민들은 나를 원한다.’
타국의 시선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오히려.
‘드리트미와 미하엘을 미국의 사냥개로 선전해야겠군.’
그럼 외신들이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을 찬양하는 것 자체가 정당한 러시아 정권을 전복하려는 미국의 공작이 되어 버린다.
국내에서의 인지도와 지지도는 포틴 대통령 자신이 압도적이었다.
어디 어쩌다 한번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들이미는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 따위가 20년 넘게 꾸준히 얼굴을 알리며 러시아를 이끌어 온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지.’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였다면.
그저 조용히 낙향하는 정도로 용서해 줄 수 있었지만.
이빨을 드러낸 이상 절대 가만둘 수 없었다.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낸 사냥개는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하는 법이지.’
포틴 대통령이 자신에게 대항한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을 생각하며 씹어 먹을 듯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때.
“여기 숨어 있었네.”
러시아어가 아닌 낯선 언어가 포틴 대통령의 귓가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