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대가 (2)
‘이놈이 어딜 도망가려고.’
강현수가 연속적으로 단거리 공간 이동 스킬을 사용해 열심히 도주 중인 아크 리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장거리 공간 이동 스킬은 없나 보네.’
그것까지 있었다면?
꽤 긴 술래잡기가 될 뻔했다.
장거리 공간 이동 스킬이 없고 한번 꼬리가 잡힌 이상.
‘내 손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거다.’
강현수가 아크 리치를 추격하며 간간이 오러를 날렸다.
퍼엉! 꽈앙!
아크 리치는 회피, 방어, 언데드 몬스터 투하 등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 강현수의 공격을 뿌리치고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아크 리치의 능력으로 강현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현재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도망칠 수 있는 이유는?
‘생포하려니까 꽤 성가시네.’
강현수가 아크 리치를 죽이지 않고 생포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리치의 육체는 기본적으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리치의 영혼은.
육체가 아니라 라이프 포스 베슬에 보관되어 있다.
‘무조건 생포한다.’
리치의 육체는 일종의 아바타이자.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지.’
리치는 라이프 포스 베슬이 파괴되지 않는 한 불사의 존재다.
마기만 공급받으면?
무한대로 부활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육체가 파괴되지 않으면?
아무리 영혼이 라이프 포스 베슬에 보관되어 있어도.
부활이 불가능하다.
영혼이 육체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저놈이 죽으면 마계로 갈 거고, 그럼 나에 대한 정보는 물론 그동안 저놈이 수집한 정보가 마계에 전달된다.’
그건 무조건 막아야 했다.
‘단순한 생포가 아니라 완전히 제압을 해야 한다.’
강현수가 죽이지 않더라도.
리치가 스스로 육체를 박살 낼 수도 있다.
‘물론 마계에서 리치의 주인이 라이프 포스 베슬에 강한 충격을 주면 육체가 붕괴하기도 하지만.’
저 리치의 주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지구에서 잘 활동하고 있을 걸로 추정되는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에 충격을 줄 이유가 없었다.
‘운이 없으면 라이프 포스 베슬이 박살 나서 리치가 영구적으로 소멸할 수도 있고.’
즉, 저 리치를 죽이지 않고 완전히 제압해 생포하기만 하면.
‘지구의 정보가 마계에 알려질 일은 없다는 거지.’
반대로 강현수 입장에서는.
지구를 침공하는 마계를 다스리는 마왕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소멸시키는 것도 불가.
리치가 자신의 육체를 파괴할 정도로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도 불가.
그러니 강현수 입장에서는 리치가 요리조리 빠져나갈 틈을 줘 적당한 희망을 주면서.
기회를 노려 일거에 리치가 스스로의 육체를 파괴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하게 제압해야 했다.
단, 그런 틈이 생길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지.’
어차피 소환수만으로 언데드 몬스터들은 쓸어버릴 수 있었고.
리치만 무사히 생포하면.
러시아 사태 종결시킬 수 있었다.
* * *
‘저 괴물 같은 놈은 왜 이렇게 끈질긴 거야.’
리치 아르타스는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마계 백작이 된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된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시 마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마계로 돌아가면?
이 지구라는 차원에서 혼자만 달달하게 꿀단지를 빠는 생활은 그대로 끝장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다시 하급 마족이 될 수는 없다.’
리치는 마기만 공급되면 무한 부활이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체는 라이프 포스 베슬이었다.
껍데기에 불과한 리치의 육체가 아무리 승급을 해 봐야.
‘라이프 포스 베슬에 마기를 전달해 승급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의 승급이 아니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승급을 해야.
부활해도 다시 마계 백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껍데기인 리치의 육체만 강해진 상태.
지금 소멸하고 마계에서 다시 부활하면?
리치 아르타스는 다시금 하급 마족으로 돌아갈 것이고.
마계에서는 이 지구라는 차원에서처럼 급격한 성장이 불가능했다.
지구에서 승급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도 않았으리라.
소멸하고 마계에서 다시 부활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지킬 게 생긴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분명히 조용히 힘을 키울 만한 장소가 있을 거다.’
저 괴물의 추격을 따돌리고 그렇게 힘을 키운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는 저 괴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리치 아르타스는 마기를 뭉텅이로 소모하며 도주했고.
그 결과.
‘따돌렸나?’
겨우 한숨 돌릴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중국이나 인도로 가자.’
인구도 많고 적잖은 혼란이 벌어진 곳이니.
충분히 힘을 키울 여유가 될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리치 아르타스가 계획을 세우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콰직!
무언가가 리치 아르타스의 사지를 으깨 버렸고.
촤르르르륵!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리치 아르타스의 몸을 휘감았다.
-분명히 따돌렸는데?
리치 아르타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생포되었다는 사실이 바뀔 일은 없었다.
* * *
‘겨우 잡았네.’
강현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크 리치가 스스로 소멸하는 선택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일부러 놓아주고.
강현수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인 마왕 그레모리를 이용한 덫을 놓았다.
그 결과 마왕 그레모리가 아크 리치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네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겠지?
혹시 나중에라도 아크 리치가 소멸할 때를 대비해서라도.
마왕 그레모리의 존재는 철저하게 감춰야 했다.
-물론입니다.
-혹시 아는 녀석이냐?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녀석입니다.
-마계 백작급은 되어 보이던데?
-지구에서 성장한 케이스로 보입니다. 만약 다른 마왕들이 기존에 거느리고 있던 고위 마계 귀족이었다면, 제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쉽네.
마왕 그레모리를 통해 손쉽게 정보를 얻어 볼까 했는데, 무산되었다.
‘뭐, 다행이기는 하지.’
운 좋게 차원 게이트를 넘은 리치 하나가 잘 성장해서 마계 백작급이 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마계 백작이었던 리치가 넘어와 이 상황이 된 거라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니.
이건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당연한 거기는 하지.’
아무리 강현수가 조금(?) 강해져서 차원 게이트 오픈 속도가 빨라졌다고 해도.
어떻게 벌써 마계 백작이 넘어오겠는가?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지구를 수호하는 가이아 시스템의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였다.
강현수가 완벽하게 제압당한 아크 리치 앞에 도착했다.
이제 심문을 하면 되는 상황인데.
‘어떻게 심문을 하지?’
문제는 상대가 리치라는 점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전혀 느끼지 않고.’
리치를 고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혼이 담겨 있는 라이프 포스 베슬에 고통을 주는 것뿐인데.
강현수에게는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이 없었다.
-이 녀석 몸에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나?
-없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왕 그레모리에게 물었지만.
역시나 없었다.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할 생각이 있나?”
강현수가 아크 리치에게 물었다.
-큭큭큭! 그런 기대 따위는 버려라, 인간.
당연히 아크 리치는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뭐,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
강현수가 오른손을 아크 리치의 두개골 위에 올렸다.
그와 동시에.
사아아아악!
아크 리치가 그간 열심히 쌓아 놓은 마기가.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애써 모은 마기들이!
강현수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계 백작급이었던 아크 리치의 격이.
순식간에 떨어져 내리더니.
종국에는 최하급 마족 수준까지 영락해 버렸다.
-이럴 수가.
그간 지구에서 애써 모아 왔던 힘을 모조리 빼앗기자.
리치의 붉은 안광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완벽하게 제압당했고 마기도 모조리 빼앗긴 상황에서.
리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순순히 불 생각은 없지?”
-당연하다.
리치가 증오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강현수를 노려봤다.
“그럼 어쩔 수 없네.”
강현수가 아공간을 열었다.
-지금 뭘, 하려는 거냐?
“널 여기 넣으려고.”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는 리치를 그나마 고문할 수 있는 방법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것뿐이다.
지성체에게 있어 가장 큰 정신적 형벌은 고독이었다.
괜히 교도소에서 말썽을 부린 죄수를 독방에 가두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런 허튼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수작은 무슨. 널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으니까, 그냥 여기 영원히 보관하려는 것뿐이야.”
-영원히?
“아공간은 다른 차원이니까, 내가 죽어도 네가 풀려날 일은 없잖아. 그럼 잘 가라.”
강현수가 말과 함께 가볍게 손짓을 했고.
아공간의 입구가 입을 벌리듯 크게 늘어나더니.
-잠깐 기다려!
다급하게 입을 열던 리치를 덥석 삼켜 버렸다.
‘나중에 꺼내 봐야겠군.’
강현수는 리치를 영원히 아공간에 가둬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라고 말한 것은?
리치의 정신적 고통을 가속시키고.
시간의 흐름을 착각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한 몇 달 후에 꺼내서 몇십 년이 지났다고 이야기해 주지 뭐.’
안 믿으면?
다시 가두면 그만이다.
‘그럼 이제 뒷정리를 하러 가 볼까?’
리치가 힘을 잃기도 전에, 그 권속인 언데드 몬스터들은 강현수의 소환수들에게 박살이 났다.
전투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초토화된 러시아를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또 독재자가 권력을 잡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조치를 취해야 했다.
거기다.
‘도르초프, 이반, 이고르도 만나 봐야 하니까.’
도대체 뭘 하느라 그간 코빼기도 안 보였는지 물어보고.
‘앞으로는 그러지 못하도록 해야지.’
뭐, 굳이 강현수가 강제하지 않더라도.
그 셋은 앞으로 조용히 살기 힘들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수뇌부가 랭커 및 고레벨 플레이어 들과 함께 수도 모스크바를 버리고 도주한 최악의 상황에서.
그 셋은 목숨을 걸고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지켜 낸 영웅들이었으니까 말이다.
* * *
“설마 이길 줄이야.”
총리 드리트미가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오. 저들이 도대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살았소.”
군사령관 미하엘의 얼굴이 희열로 가득 찼다.
“이제 어쩔 생각이오?”
총리 드리트미가 군사령관 미하엘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정부의 고위 관료 중 유이하게 끝까지 수도를 지켰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의 정권 장악에 도전하는 것.
쉽게 말해 도주한 포틴 대통령과 적이 되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는.
포틴 대통령에게 최대한 빨리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는 셋.
도망칠 때 한 명의 공간 이동 스킬이 소모되었겠지만.
다른 두 명의 공간 이동 스킬은 사용이 가능할 테니.
금방이라도 모스크바로 복귀할 수 있었다.
쉽게 말대 다시 포틴 대통령의 아래로 들어가는 거였다.
“우리는 어차피 버림받은 사냥개 신세요. 우리가 충성을 다한다고 전처럼 중임을 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군사령관 미하엘의 물음에 총리 드리트미가 얼굴을 구겼다.
“포틴 대통령은 그럴 사람이 아니지.”
더군다나 최전선에서 국민들의 대피를 돕고 군대와 플레이어들을 지휘한 탓에.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을 바라보는 국민, 군부, 플레이어들의 시선은 더없이 호의적이었다.
정부 고위 관료 중 유이하게 목숨을 걸고 수도를 사수했다.
이건 영웅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업적이고.
정치적으로도 인지도와 지지도를 급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가 저항할 뜻이 없다고 해도, 포틴 대통령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구려.”
정치적으로 자신과 대등할 정도로 성장할 만한 재목이 나오면?
암살이라는 불법적인 수단까지 써 가며, 가차 없이 그 싹을 잘라 버렸던 포틴 대통령이다.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인지도와 지지도가 급상승한 이상.
두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포틴 대통령의 정적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더니, 또 위기로군.”
“그러게 말이오.”
포틴 대통령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수도 모스크바를 버리고 도망쳤다?
권력, 재력, 무력, 언론을 모두 쥐고 있는 만큼.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거기다 포틴 대통령과 함께 도주한 정부 고위 관료들과 랭커들 및 고레벨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서라도 포틴 대통령의 편을 들 것이다.
설사 수도 모스크바의 국민, 군부, 플레이어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해도.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포틴 대통령을 상대로 정치적 승리를 거머쥐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고민이 많은가 보네.”
그때 누군가가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도 러시아어가 아니라, 낯선 언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