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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전 (3)

사클란트 제국의 황제 카를 13세가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마계 남작 오라드가 주절주절 떠들더니.

“……휴전과 함께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혼의 계약서를 쓴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영혼의 계약서를 언급했다.

‘필요하니 말투도 변하는군.’

팔이 잘려도 강현수 앞에서는 꺾이지 않던 혓바닥이.

카를 13세 앞에서는 잘도 꺾였다.

“그거라면 믿을 수 있겠군. 단 그럼 계약 대상자로 마왕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마계 남작 오라드의 말에.

‘마왕이 직접 나선다고?’

영혼의 계약서가 마왕에게까지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

마왕은 회귀 전 죽음에서 부활한 적이 있었고.

가이아 시스템에 간섭해 인류 공적들을 만든 전적이 있었다.

그 말은?

‘영혼의 계약서도 결국은 가이아 시스템의 관할하에 있는 건데.’

마왕이 영혼의 계약서에 간섭하면?

무용지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마왕이 직접 나선다는 말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가짜를 내보낼 수는 없을 거고.’

마왕과 대등한 수준의 강자를 어디서 구해서 가짜로 만들겠는가?

‘그럼 마왕이 직접 온다는 건데.’

이건 손쉽게 마왕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단, 마왕군도 그 점을 간과하지는 않을 테지만.

‘전면전을 통해 마왕군을 뚫고 마왕을 제거하려면 피해가 크다.’

또 그렇게 큰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마왕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그러나 계약을 위해 만난다면?

아무런 희생도 없이 마왕 코앞까지 갈 수가 있다.

‘바로 제지할 생각이었는데.’

조금 기다려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쪽은 누가 나서야 하지? 내가 나서야 하나?”

카를 13세가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크 나이트의 수장이 나서 주시면 충분합니다.”

마계 남작 오라드의 발언에 카를 13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말은?

마왕군이 아틀란티스 차원의 황제를 자신이 아니라 강현수로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가?”

마계 남작 오라드가 강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좋다.”

강현수는 순순히 수락했다.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희생 없이 마왕과 만날 수 있는 게 중요해.’

강현수의 수락과 함께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 달은 수용할 수 없다.”

“3일은 너무 짧다.”

“평화를 원한다며?”

“그렇기는 하지만.”

“막말로 뜻만 확고하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좋다. 그렇게 하지.”

결국 3일 후 성벽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정해졌다.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기는 할 텐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야.’

협의가 끝나자 마계 남작 오라드가 돌아갔다.

“결국 평화가 오는군.”

카를 13세는 강현수가 대표로 나간다는 사실에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자신 대신 강현수가 위험부담을 진다고 생각하자 극복할 수 있었다.

“평화는 무슨.”

그때 강현수가 짧게 중얼거렸고.

“그게 무슨 말인가?”

카를 13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

“평화는 말 몇 마디에 그리 쉽게 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네도 찬성했지 않나? 거기다 영혼의 계약서도 있고?”

“영혼의 계약서는 가이아 시스템의 영향력하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왕은 가이아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죠.”

“그게 정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마왕군이 왜 지금에 와서 평화를 말하고 휴전을 원하겠습니까?”

“자기들이 불리하니까?”

‘완전히 바보는 아니군.’

아집이 많아졌어도 과거의 재기는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진심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진심을 가진 놈들이 멋대로 아틀란티스를 침공합니까? 거기다 우리 타 차원 출신 플레이어들에게는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뜨지 않습니다.”

“영혼의 계약서를 쓰면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뜰지도 모르지.”

“그럴 일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된 다음 마왕이 마음을 바꾸면 어쩌시겠습니까?”

타 차원 출신 플레이어들이 고향으로 귀환하면?

아틀란티스 차원의 전력은 절반은커녕 1/10 수준으로 떨어진다.

다른 플레이어의 존재감도 크지만 강현수의 유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사실 고작 그걸로 퀘스트가 완료되면?

타 차원 출신 플레이어들로서는 땡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이아 시스템이 그렇게 어설플 것 같지는 않았다.

‘퀘스트 완료 조건은 마왕군이 전멸하거나 아틀란티스 차원 점령을 포기하는 것.’

영혼의 계약서를 쓰는 게 과연 마왕군이 아틀란티스 차원 점령을 포기한다는 뜻일까?

강현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진심이었다면?

가이아 시스템의 힘으로 그걸 강제할 수 있다면?

‘굳이 영혼의 계약서 같은 구실을 빌릴 필요도 없었겠지.’

강현수가 생각했을 때 마왕군이 진심으로 아틀란티스 차원 점령을 포기했다면?

그 순간 곧바로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추가로 마왕에게 제약을 걸면 그만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퀘스트 완료 조건이 어설프게 세팅되어 있을 것 같지 않거든.’

가이아 시스템은 엉성하지만 완벽하다.

변수에는 약하지만.

예정된 사항에는 강하다.

강현수가 생각했을 때 이건 단순히 시간을 끌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타 차원 출신 플레이어들이 없는 상태에서 마왕군을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강현수의 물음에 카를 13세는 할 말을 잃었다.

“황제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게 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권이 모두 저에게 넘어가고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거겠지요?”

괜히 카를 13세가 강현수를 견제하는 게 아니다.

사클란트 제국에 심어 놓은 세력의 여부를 떠나.

강현수의 무력 자체가 규격 외였다.

홀로 100만이 넘는 병력을 수족으로 부린다.

한데 그 100만의 병력의 질이 황실 근위 기사단에 버금간다.

그런 무력을 가진 존재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영혼의 계약서가 있다지만 사클란트 제국을 장악하는 건 간단하게 이룰 수 있었다.

거기다 여기서 자신의 편을 들어 줘야 할 로크토 제국의 황제 세실리아와 남부 연합 왕국의 수장 엘란이 강현수의 수족처럼 움직이니.

카를 13세로서는 더욱더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을 이해해 주게.”

카를 13세가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강현수가 알겠다고 말하며 조금 더 자신을 배려해 주리라.

그러나.

“싫습니다.”

강현수의 대답은 카를 13세의 예상과 달랐다.

“그게 무슨?”

“한 가지 경고를 하지요.”

“경고?”

“이번 일은 결과가 좋아서 넘어가지만. 앞으로 또다시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우려하시는 일을 현실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강현수의 말에 카를 13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꼭두각시 황제.

영혼의 계약서 때문에 카를 13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거나.

황제의 자리에 끌어내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말하면 황제 자리만 지켜 주고 직접적인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강현수는 카를 13세에게 받은 감찰권과 군사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사실 카를 13세가 몰라서 그렇지.

‘넌 이미 꼭두각시 황제야.’

단지 그 자각이 없을 뿐이고.

카를 13세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수족과 병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기에 그걸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강현수가 명령하는 즉시 상황이 돌변한다.

강현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카를 13세의 명령을 따를 이들은?

‘충의성 리처드 공작을 제외한 소수가 전부지.’

그게 카를 13세가 깨닫지 못한 현실이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카를 13세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믿기지 않으신다면 직접 테스트해 보셔도 좋습니다.”

강현수의 차가운 대답에.

“테스트라니 무슨 그런. 내 뜻은 그런 게 아니라.”

금방 꼬리를 내렸다.

* * *

3일 후.

마왕과 강현수가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될 줄이야.’

강현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예상대로 전력을 박박 긁어 왔네.’

회귀 전 이름을 날렸던 마계 대공, 공작, 후작, 백작들을 다 끌고 온 것 같았다.

‘쉽지는 않겠어.’

강현수는 회귀 전의 경험을 통해 빠르게 힘을 키웠고 강해졌다.

그러나 마왕과 일대일로 싸운다고 해도 승리한다는 장담은 하기 힘들었다.

아니, 패배할 확률이 더 높았다.

휘하 지휘관과 휘하 소환수들까지 동원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다.

한데 마왕이 수하들을 저렇게 덕지덕지 달고 나타났다.

강현수의 세력만으로 싸우면?

필패였다.

그렇지만.

‘난 혼자가 아니지.’

로크토 제국, 사클란트 제국, 남부 연합 왕국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피해는 크겠지만.’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대가 다크 나이트의 수장이군요.”

마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정신계 공격 스킬 매혹을 받았습니다.]

[매혹 스킬에 완벽하게 저항했습니다.]

정신계 공격을 받았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게 무슨 수작이지?”

강현수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특별히 의도한 건 아니에요.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라서요.”

마왕의 말에도 강현수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사실 마왕이 의도적으로 정신계 공격 스킬을 사용한 게 아니라는 건 회귀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민감한 반응을 보인 건 대화의 우위를 잡기 위해서였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말씀드릴게요.”

“정말 타 차원의 존재들에게 침공을 받은 건가?”

“맞아요.”

“왜 싸워 보지도 않고 도주를 선택한 거지?”

“그들은 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하니까요.”

“아틀란티스 차원으로 도주하면 그들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는 건가?”

“영원히는 아니겠지만. 꽤 많은 시간을 벌 수 있겠죠.”

마왕의 말에 강현수는 적잖이 놀랐다.

‘시간을 버는 게 다라고?’

강현수는 마왕과 싸워 봤던 경험이 있다.

그런 만큼 마왕이 가진 힘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한데 그런 마왕이 싸워 보기도 전에 꼬리를 내린다는 건 큰 충격이었다.

거기다 아틀란티스 차원으로 넘어온 것이 고작 시간을 벌 뿐이라니?

‘완전히 거짓말을 아닐 거야.’

왜냐하면 강현수의 소환수가 된 마계 공작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와 대입해 보면?

마왕과 마족들이 마계를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감당하기 힘든 강대한 적 때문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말이다.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왜 침공을 한 거지?”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점령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게 점령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예요.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죠.”

“그럼?”

“당신들과 싸우는 것보다 힘을 합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했거든요. 안 그래도 쫓기고 있는 입장에서 당신들과의 전쟁으로 전력을 낭비하느니. 힘을 합쳐 침략자들과 싸우는 게 낫지 않나요?”

“우리 입장에서는 너희나 너희를 공격한 쪽이나 똑같은 침략자일 뿐이야.”

“물론 그렇겠죠. 그건 제가 사과드릴게요.”

마왕이 강현수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강현수는 연기라고 확신했다.

회귀 전의 마왕은 오만했고 포악했으며 인간을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한 존재였다.

아무리 전황이 바뀌었다지만.

‘마왕이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한다?’

그것도 힘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역시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고 시간을 끌 속셈이 확실하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마왕의 숨통을 끊는 건 3일 전에 결정된 사항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는데.

이제 확신이 생겼다.

“그럼 영혼의 계약서를 작성해 볼까요?”

마왕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강현수는 전력을 다해 탐식의 검을 휘둘렀다.

스텟을 총동원했고.

사용할 수 있는 스킬도 모조리 쏟아 냈다.

목적은 단 하나.

기습으로 마왕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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