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탕질 (3)
‘왜 하필 나야.’
다른 마왕의 하수인들도 많은데 왜 하필 자신을 찾아와 깽판을 치냐는 말이다.
‘다크 나이트에게 쫓기고 있는 신세라면 나도 위험한 거잖아.’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족과 함께 있다 걸리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한다.
결정적으로.
‘마룡족 크라누스 공작 휘하의 마족이면 그쪽이랑 계약 맺은 인간한테 가면 되잖아.’
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리몬쉬츠 백작의 계약자인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인가?
“떠나시기 전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리우스 후작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 어쩔 수가 없었다.
“떠나? 내가 어디로 떠난다는 말이냐?”
“저보다는 크라누스 공작님의 계약자에게 몸을 의지하시는 것이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틀란티스 차원에 존재하는 그분의 계약자는 이미 로크토 제국에서 다 죽었어. 없다고.”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러니까 당분간 잘 부탁한다.”
마계 자작 카루트의 말에 마리우스 후작은 할 말을 잃었다.
당분간이 한 달이 될지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어찌 안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결국 마리우스 후작은 카루트라는 이름의 마계 자작을 군식구로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군식구의 패악질은 상상을 초월했다.
* * *
“브라어트 남작을 죽였다고?”
“예.”
“왜?”
“미천한 노예가 건방지다면서…….”
마리우스 후작은 복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상대는 마족이다.
그것도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계 귀족.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시중을 들라고 맡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마왕의 하수인들에게 시중을 맡겼다.
그런데 그렇게 시중들겠답시고 들어간 마왕의 하수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 나왔다.
이유는 정말 보잘것없었다.
건방지다, 마음에 안 든다, 태도가 기분 나쁘다 등등.
정말 온갖 트집을 잡아 마왕의 하수인들을 죽였다.
“정말 미치겠군.”
마왕의 하수인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그들 모두 마족화를 진행 중인 자들로, 마리우스 후작의 비밀 병기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한데 그 소중하고 귀한 인재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적도 아니고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마계 귀족의 손에 줄줄이 죽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 연락을 취해야겠다.”
“감시의 눈길이 심한데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저 통제 불능 마족의 정체가 드러나도 끝장이고.
마족의 패악질에 동료들이 모두 죽어 나도 끝장이다.
결국 마리우스 후작은 위험을 감수하고 계약자인 리몬쉬츠 백작과의 통신을 시도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느냐? 알려 줄 정보라도 있는 것이냐?
리몬쉬츠 백작의 말에 마리우스 후작이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마룡족 크라누스 공작 휘하에 있는 카루트 자작이라고?
“그렇습니다. 제발 저 망할 놈을 제지해 주십시오. 이러다가는 제 휘하의 세력들이 다 죽어 나가겠습니다.”
-계약이 소멸하는 경우가 많다 했더니 그놈 짓이었군.
“그렇습니다.”
-오만한 마룡족 놈들.
리몬쉬츠 백작이 이를 박박 갈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윗선이 오만하니 휘하에 있는 놈도 똑같이 오만했다.
그러나.
-네가 조금만 참거라.
“예?”
-내가 강림해 그놈을 때려잡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 크라누스 공작님에게 항의를 하면…….”
-그 오만한 마룡들의 우두머리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으냐? 거기다 내가 속한 파벌은 마룡족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수 사이였다.
괜히 강현수가 도플갱어 1호의 신분을 마룡족의 수장 크라누스 공작의 휘하 자작으로 위장한 게 아니었다.
그간의 정보 수집과 소환수가 된 마족들을 통해 강현수는 오히려 회귀 전보다 마계에 대해 더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렇기에 마계의 세력 관계까지 감안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그, 그럴 수가.”
유일하게 믿고 있던 계약자 리몬쉬츠 백작의 힘없는 답변에 마리우스 후작은 망연자실했다.
‘내가 줄을 잘못 골랐나?’
어떻게 고위 마계 귀족인 백작이 하급 마계 귀족인 자작 하나 단속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일단 그놈을 잘 구슬려 써먹어 보아라.
“예? 써먹어 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룡족 놈들은 오만하다. 아마 그 수하도 마찬가지겠지. 자존심을 살살 긁어 주며 이용해 먹으란 말이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운이 좋다면 사지에 던져 넣을 수도 있겠지.
“마계 자작을 죽여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상관없다. 어차피 그놈은 마룡족의 휘하에 있으니 내 적이나 다름이 없다.
리몬쉬츠 백작의 말에 마리우스 후작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얼마든지 이용해 먹고 죽여도 좋다 이거지?’
그럼 써먹을 방도가 나올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지원군은 언제쯤 보내 주실 수 있는지?”
-사클란트 제국의 주력과 다크 나이트가 수도를 비운다면 언제든지 힘을 빌려주마.
차원 게이트를 오픈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확실한 성과가 있다면 모를까 패배가 예정된 일에 병력을 갈아 넣을 수는 없었다.
“제가 한번 머리를 굴려 보겠습니다.”
건방진 마계 자작을 이용한다면?
성동격서의 계책을 사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리몬쉬츠 백작과의 통신이 끊겼다.
‘한번 해 보자.’
마계 자작을 이용해 먹거나 죽여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간 벌인 패악질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마리우스 후작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마계 자작 카루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이곳을 치시면…….”
“싫은데?”
“이곳은 다크 나이트가 없는 곳으로, 충분한 피의 살육을 즐기실 수 있는…….”
“안 가.”
“하찮은 인간들을 겁내시는 건지?”
“어, 너는 안 무서운데, 다크 나이트는 무서워.”
마리우스 후작이 열과 성을 다해 설득과 도발을 이어 갔지만.
이가 들어가기는커녕.
이빨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오히려.
“근데 말이야, 왜 자꾸 네가 나를 사지로 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까? 너, 죽고 싶어?”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뻔히 다 눈에 보이는구만.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내가 친히 교육을 해 주마.”
퍽! 빠각!
“아아악!”
마리우스 후작은 뼈가 부러지고 입속의 강냉이가 절반 이상 털려 나갈 정도로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다음에 또 수작을 부리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해 주마.”
마계 자작 카루트의 경고에.
“예,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마리우스 후작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고 있어.’
강현수의 눈에는 마리우스 후작의 시커먼 속셈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 푸닥거리 한번 했다.
그렇지만.
‘잘하면 충분히 이용이 가능할 것 같단 말이지.’
오크 군단과 언데드 군단의 침공 이후 마왕군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나중에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보다는 미리미리 각개격파 하는 게 더 낫다는 말이지.’
그럼 마족들이 차원 게이트를 열고 침공해 오기를 유도해야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도플갱어 1호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네.’
마리우스 후작의 속셈은 뻔했다.
눈엣가시 같은 마계 자작과 다크 나이트의 공멸.
그게 불가능하다면 마계 자작을 미끼로 다크 나이트와 사클란트 제국의 주력군을 빼돌리는 것.
‘역시 정보가 중요해.’
황금 군주 사에마알의 도움으로 섀도다크길드는 빠르게 사클란트 제국에 뿌리를 내렸다.
어디 그뿐인가?
강현수가 흩뿌려 놓은 도플갱어들 역시 적잖은 도움을 줬다.
거기다 마왕의 하수인들의 측근으로 위장한 도플갱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이런저런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 정보들을 잘 조합해 보면?
‘저놈들이 뭘 할 속셈인지 훤히 보이지.’
그간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마왕의 하수인들 숫자를 줄여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지.’
이 미친놈들이 이제는 노예들을 투입했다.
‘얼마든지 죽여라 이거지.’
그러나.
‘죄 없는 이들을 죽일 수는 없지.’
거기다 마기를 풀풀 풍기는 도플갱어 1호를 대면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일이다.
도플갱어 1호가 떠나면?
노예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한번 정도는 낚여 줘야겠어.’
그래야 마리우스 후작을 비롯한 마왕의 하수인들과 차원 게이트를 넘어올 마족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
마족들이 넘어와야.
‘신성 스텟을 늘릴 수 있어.’
추가로 더 강한 소환수의 보충도 가능했다.
‘마기의 구슬을 채우는 일도 더 손쉬워질 거고.’
오크 군단의 침공이 마무리되자 레벨 업 속도가 엄청나게 느려졌고.
마기의 구슬을 채우는 속도도 떨어졌다.
그 모든 걸 해결할 방법은?
‘마왕의 하수인들과 마족들을 단체로 때려잡는 것뿐이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우스 후작이 탐스러운 먹잇감을 가지고 강현수를 찾아왔다.
* * *
“양동작전?”
“예, 제가 수하들을 동원해 모코로 왕국을 습격할 계획입니다. 그때 슬라브 왕국을 공격해 주시면 됩니다.”
모코로 왕국과 슬라브 왕국은 모두 사클란트 제국의 제후국이었고 극과 극에 자리한 나라들이었다.
“내가 굳이 거기까지 가서 난리를 쳐야 할 필요가 있나?”
“승급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마리우스 후작의 말에.
‘이것 봐라.’
도플갱어 1호를 조종하던 강현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놈들이 제대로 시선을 끌지 못하면 나만 죽어 나가는 것 아니냐?”
도플갱어 1호를 조종하고 있는 강현수의 물음에.
“이걸 사용하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마리우스 후작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신념의 서약.’
영혼의 계약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강제 약속 아이템이다.
단 신념의 서약이 영혼의 계약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혼의 계약서가 두 사람에게 동시에 제약을 거는 거라면, 신념의 서약은 한 사람만 독박 쓰는 거지.’
말 그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지 않겠다.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혼자 서약을 하는 거다.
서약을 어기면?
신념의 서약을 어긴 놈만 죽는다.
‘진품 맞네.’
아이템 정보까지 뜨는 거 보니 진품이 확실했다.
“좋아, 믿어 주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슬라브 왕국까지 가지?”
“마기를 최대한 억제해 주시면 위장 신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슬라브 왕국으로 가라?”
“그렇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것도 책임져 주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일단 신념의 서약부터 해.”
도플갱어 1호를 조종하고 있는 강현수의 지시에 마리우스 후작이 재빨리 신념의 서약을 사용하고 주절주절 입을 나불거렸다.
‘역시나네.’
마리우스 후작은 오직 자신의 수하들이 모코로 왕국에서 대규모 공격을 하겠다는 점만 서약했다.
절대 강현수가 조종하는 도플갱어 1호의 위장 신분인 마계 자작 카루트를 함정에 빠트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뭐, 그 점을 지적해서 서약을 강요할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 정도로 정성 들여서 만든 함정에는 직접 빠져 줘야지.’
도플갱어 1호가 슬라브 왕국에 도착하면?
곧바로 플레이어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그 후 수도에 있는 주력과 다크 나이트는 모로코 왕국과 슬라브 왕국에 나타난 마왕의 하수인과 마족을 퇴치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상대적으로 수비가 취약해진 수도에 또 차원 게이트가 열리겠지.’
이건 강현수의 개인적인 망상이나 추측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마왕의 하수인 곁에 있는 도플갱어들의 정보를 취합해 내린 합리적인 결론이지.’
마왕의 하수인들도 제법 큰 희생을 각오하고 짠 계획이다.
“이제 움직여 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마.”
“감사합니다!”
마리우스 후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너무 좋아하네?’
강현수는 그저 마족과 마왕의 하수인이라는 탐스러운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해 함정에 빠진 척해 주는 것뿐이다.
한데 마리우스 후작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강현수가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졌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중에 자기가 함정에 빠진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강현수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