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의 계약 (2)
“내 말대로 해 주겠나?”
카를 13세의 물음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현수가 별다른 줄다리기 없이 콜을 외쳤다.
“오오오, 고맙네! 로크토 제국의 여황제가 언짢아할 수도 있는 일이거늘.”
제안을 하기는 했지만.
카를 13세의 입장에서는 강현수가 거절하면 말짱 꽝이었다.
그렇기에 거절하면 선물 보따리를 들이밀며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이리 쉽게 수락하다니. 역시 다크 나이트의 수장답다.’
카를 13세는 강현수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한 것보다.
강현수가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더 기뻤다.
‘사사로운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아틀란티스 차원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활동하는 다크 히어로.’
이런 인물이 로크토 제국의 제후국인 무란 왕국 출신이라는 게 너무너무 아쉬웠다.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어쨌든 대공 작위도 받아 줬고.
자신의 제안도 받아들였다.
‘그럼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짝짝!
카를 13세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궁인들이 온갖 금은보화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강현수 앞에 내려놓았다.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네.”
카를 13세의 말에.
“저에게 물질적인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강현수는 돈이 많았다.
물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 돈으로 고랭크 아이템과 스킬북을 구매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푼돈보다는 이미지 메이킹이 더 중요하지.’
이미지 메이킹을 잘해야.
“하하하,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만. 미안하네.”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지.’
“저것들을 치우고 황실 창고에 있는 고랭크 아이템과 스킬북을 모조리 가지고 오라.”
카를 13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인들이 금은보화를 가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고랭크 아이템과 스킬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진짜 보물이지.’
여기 있는 고랭크 아이템 한두 개의 가치만 해도.
‘아까 나왔던 금은보화를 다 쏟아부어도 살 수 없는 수준이지.’
물욕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강현수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가지고 가게.”
카를 13세의 말에 강현수가 눈을 반짝였다.
‘일반적인 고랭크 아이템은 휘하 지휘관과 소환수 들에게 나눠 주면 되고.’
스킬북 중에 쓸 만한 게 있다면?
직접 익히는 게 이득이었다.
‘명색이 황실 보고에서 나온 물건들이니, 쓸만한 게 없을 수가 없지.’
강현수가 아이템과 스킬북 들을 골랐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챙겨 가고 싶지만.
‘그건 무리겠지.’
또 괜히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카를 13세에게 속물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었다.
‘어라?’
아이템과 스킬북을 훑어보던 강현수의 눈에.
‘이게 여기 있었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스킬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등가교환 - EX랭크]
-스택 하나를 소모하여 다른 스킬의 쿨타임을 초기화시켜 줍니다.
-현재 스택 : 10개
-스택은 초기화시켜 준 스킬의 쿨타임이 끝나면 하나씩 충전됩니다.
‘이건 무조건 챙겨야지.’
쿨타임이 긴 스킬을 연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사기 스킬 중 하나였다.
‘회귀 전 이게 파멸의 군주 손에 들어가서 엄청난 고생을 했지.’
파멸의 군주는 광혈마녀 유카와 마찬가지인 인류 공적이자.
‘마왕의 하수인이었지.’
파멸의 군주는 원거리 딜러로.
‘쿨타임이 길지만 작은 성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닌 광역 공격 스킬을 익히고 있었지.’
거기다 엄청나게 희귀한 장거리 공간 이동 계열 스킬도 보유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강력한 원거리 공격 스킬이나 장거리 공간 이동 계열 스킬은 쿨타임이 길다.
그런데.
‘등가교환 스킬을 손에 넣어서 쿨타임이 긴 스킬들을 펑펑 쓰고 다녔지.’
사클란트 제국의 황실 보고에 있던 스킬북이 어떻게 마왕의 하수인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런 미래는 없어.’
강현수가 등가교환 스킬북을 챙겼다.
스스로 강해지고 미래 인류 공적의 전력도 줄였으니 엄청 남는 장사였다.
“다 골랐나?”
카를 13세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리석지는 않아.’
충분히 황제 자리에 앉을 정도의 정치 머리가 있었다.
거기다 지금 말을 건 이유 역시.
‘적당히 제지를 한 거지.’
강현수가 여기 있는 고랭크 아이템과 스킬북을 다 거덜 내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말은 얼마든지 가지고 가라고 했지만.
‘정치적인 언사였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지.’
또 강현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건 거짓이 아니었고.
‘실제로 아직 어린애인 것도 사실이지.’
강현수를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히어로처럼 생각하기도 했고.
자존심도 강해 보였다.
“예, 다 골랐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오크 군단과 언데드 군단의 침공을 막아 준 보답일 뿐이네.”
간단한 거래가 끝난 후 다시금 카를 13세가 질문을 던졌고.
강현수는 이런저런 썰을 풀었다.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쉽군!”
카를 13세는 또다시 화끈한 리액션을 보여 줬다.
그러던 중.
“나도 플레이어가 되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을.”
카를 13세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 저 녀석이 플레이어였으면 나한테도 나쁠 게 없기는 하지.’
그럼 곧바로 마리오네트 스킬을 걸었을 것이다.
‘마리오네트 스킬은 플레이어에게만 시전이 가능하단 말이야.’
아쉽게도 몬스터나 마족은 물론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 역시 시전이 불가능했다.
“황제라는 답답한 자리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고 동료들과 몬스터를 사냥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를 13세가 계속 철없는 소리를 했다.
‘플레이어를 동경하고 있네.’
그것도 최상위 네임드 플레이어를 말 한마디로 부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가 말이다.
‘아직 애는 애구나.’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플레이어라는 초인이 가진 힘은 권력자의 힘과 달리.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으니까.’
그러나 튜토리얼을 한번 겪어 보면?
저 생각이 쏙 들어갈 게 확실했다.
그러나 카를 13세가 플레이어를 동경한다는 게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각국의 공간 이동 게이트는 상시 통행으로 바꿔야겠군. 사냥터 통제도 해제하고 말이야.”
이렇게 말이 통하니까 말이다.
그간 강현수가 중간중간 예를 들어 설명했던 게 제대로 먹히고 있었다.
‘공간 이동 게이트 상시 통행 전환은 자기가 경험해 봤으니까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사냥터 통제까지 해제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역심을 품은 자들이 날뛸까 걱정이네.”
그때 카를 13세가 반역을 입에 담았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오크 군단 토벌 실패로 황권이 흔들리고 제후국과 타 차원 출신 플레이어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여기에 사클란트 제국의 수도에 병력 공백이 있을 때 언데드 군단의 침공까지 당했으니.
‘이게 우연일 리는 없지.’
강현수가 느낀 반란의 각을 카를 13세 역시 느끼고 있었다.
‘내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강현수의 도움이 없었다면 카를 13세는 큰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강현수를 석 달 전에 대공으로 임명한 것으로 입을 맞춰서 급한 불을 끄기는 했지만.
‘그냥 넘어가면 또 이런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지.’
공간 이동 게이트 상시 통행 전환과 사냥터 통제 해제를 이야기하고 저 말을 한다는 건?
“자네가 공식적으로 나를 도와 황권을 굳건히 해 주지 않겠나? 그럼 일이 더 수월해질 것 같은데.”
‘역시.’
이건 정치적인 거래였다.
“크흠!”
카를 13세가 헛기침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일국의 황제가 야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기에 부끄러운 게 아니라.
“미안하네. 사실 나도 아무 조건 없이 자네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만, 일국의 군주이다 보니 그게 쉽지 않아.”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영웅에게 조건을 걸어 딜을 한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거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역시 사클란트 제국의 귀족. 당연히 황제 폐하를 도와야지요.”
“하하하, 그게 정말인가? 정말 든든하군. 이제 반란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겠어.”
철혈제 브라굴 대공과 황실 소속 정예 플레이어들이 오크 군단과의 접전으로 대거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어 황권이 흔들리고 실질적인 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오크 군단과 언데드 군단을 쓸어버린 척마혈신과 다크 나이트가 카를 13세를 지지해 준다면?
무형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카를 13세에게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건 제대로 하는 게 낫겠지. 영혼의 계약서를 가지고 오라!”
카를 13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궁인들이 곧바로 영혼의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었네.’
강현수를 직접 만나 대공의 작위를 주고 선물 보따리를 푼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이리라.
‘원래는 내가 먼저 조건을 제시하고 딜을 할 생각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강현수와 카를 13세가 영혼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감찰권과 군사권을 주신다고요?”
카를 13세가 강현수에게 감찰권과 군사권까지 일임하겠다는 내용을 영혼의 계약서에 넣었다.
“어디까지나 마왕군과의 관련이 있을 때만이네. 로크토 제국의 여황제도 준 걸 내가 뺄 수는 없지?”
강현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등가교환 스킬북을 얻고 공간 이동 게이트 상시 활성화와 사냥터 통제 해제도 큰 이득인데.’
여기에 황제의 권한인 감찰권과 군사권까지 받았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훨씬 남는 장사지.’
카를 13세가 이 정도까지 퍼 준다면?
굳이 영혼의 계약서에 내용을 기재하지 않아도 강현수가 알아서 카를 13세의 황권과 안전을 챙겨야 했다.
카를 13세가 황위에서 쫓겨나거나 암살당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강현수와 카를 13세가 영혼의 계약서 작성을 끝마쳤다.
화악!
그 순간 영혼의 계약서가 밝은 빛무리로 화해 강현수와 카를 13세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강현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설마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이야.’
적당히 치하만 받고 끝날 줄 알았는데.
얼떨결에 카를 13세와 굳건한 동맹을 맺은 꼴이 되었다.
“제가 황제 폐하께 호위 하나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호위?”
“예, 다크 나이트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이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런 강자를 말인가?”
카를 13세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붙여 줘야지.’
카를 13세가 비명횡사하면 기존의 제도 개혁과 강현수에게 떨어진 대공의 작위를 포함한 감찰권과 군사권도 날아간다.
“리, 나와라.”
강현수가 그 말과 함께 도플갱어 킹 탈리만을 소환했다.
사아아악!
마력으로 위장한 마기가 흘러나와 칠흑빛 갑주를 입은 기사의 형상으로 화했다.
챙! 챙! 챙!
그 순간 화들짝 놀란 근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어 강현수와 도플갱어 킹 탈리만을 겨눴다.
“모두 검을 거둬라! 다크로드 대공께 이 무슨 무례인가!”
카를 13세의 호통에도 근위 기사들은 검을 물리지 않았다.
“하오나 허락받지 않은 자가 황궁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사옵니다. 이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제1근위 기사단장 리처드 공작의 말에.
“나와 다크로드 대공이 영혼의 계약서를 쓴 것을 보지 못했는가? 다크로드 대공은 절대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그러니 모두 검을 거두라.”
카를 13세가 다시금 명령을 내렸고.
제1근위 기사단장 리처드 공작이 검을 거뒀다.
그러자 다른 근위 기사들도 검을 물렸다.
‘충의성 리처드 공작의 강직한 성품은 여전하네.’
강현수는 회귀 전 제1근위 기사단장인 리처드 공작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전형적인 황실의 충신이지.’
정치와는 담을 쌓은 전형적인 기사로.
‘카를 14세를 지키다 죽었지.’
지금 그의 군주는 카를 13세였고.
‘카를 13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인물이지.’
반란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인물이 바로 충의성 리처드 공작이었다.
“이자를 곁에 두고 쓰시지요. 호위만이 아니라 저와 언제든지 연락이 가능한 자입니다.”
“다크 나이트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라면 엄청난 강자겠군.”
카를 13세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도플갱어 킹 탈리만을 바라봤다.
“예, 리는 저와 대등한 수준의 강자입니다.”
“뭐라?”
강현수의 말에 카를 13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건 충의성 리처드 공작을 포함한 근위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