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복수
‘신소희가 내 곁에 있는 걸 황소욱이 내버려 뒀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믿었지.’
신소희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 당시 강현수의 곁에는.
‘신소희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지.’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송하나와 투황이 있어.’
거기다 반쯤 속이긴 했지만.
회귀 전 유일한 친구였던 일인군단 이반 야멜리코넨을 수하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서로의 득실에 따라 맺어진 관계이기는 하지만.
황금 군주 사에마알, 암왕 세실리아, 멸마창왕 진구평이 강현수의 곁에 있었다.
‘진구평은 좀 아닌가?’
강현수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영원히 자신의 곁을 지켜 줄 동료이자 수하들이 잔뜩 생겼다.
‘뭐, 이런 걸로 만족감을 느끼는 나도 정상은 아니지.’
회귀 전의 뼈아픈 경험은 강현수를 정신적으로 강하게 단련시켰다.
하지만 그만큼 강현수의 정신을 마모시키기도 했다.
특히 남을 믿지 못하는 깊은 불신감이 강현수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엉망진창으로 맺은 관계라고 해도.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이들을 얻은 것으로.
강현수는 만족했다.
그러나 강현수는 몰랐다.
송하나와 투황을 비롯한 이들에게 있어.
강현수는 생명의 은인이었고.
절망 어린 상황에서 하늘에서 내려진 한 줄기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설사 지휘관 임명이 없었다고 해도.
그들은 강현수의 친구이자 동료로 남았을 것이다.
지휘관 임명 역시.
그들의 입장에서는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정당한 거래였을 뿐.
협박이나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강현수가 그런 상황을 이용했다고 해도.
선택은 그들 스스로 내린 것이고.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이들이었다.
거기다.
강현수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송하나와 투황을 비롯한 이들을 만나며.
강현수의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 역시 서서히 아물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계속 흐른다면?
비록 흉터는 남겠지만.
마음속 상처는 완전히 아물게 되리라.
“저……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발해길드의 탱커 곽동수가 아무런 말이 없는 강현수를 향해 다시금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현수의 말에 곽동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곽동수의 입장에서 강현수는 생명의 은인.
이 정도 사소한 부탁은 들어주는 게 당연했다.
“그럼 가시죠.”
강현수가 앞장서고.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거기다.
‘역시 따라붙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하던 중소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까지 강현수와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의 뒤를 따라왔다.
“여기는?”
강현수의 뒤를 따라 이동하던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들이 향하는 곳이 방금 전 전투를 치렀던 고려길드의 영향권하에 있는 사냥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혹시 저 사람 고려길드 사람 아니야?”
“헛소리하지 마. 그럼 왜 자기 길드 사람을 죽여?”
“우리를 유인하려고?”
“그럴 거면 그 자리에서 우리를 죽였겠지.”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은 사냥터.
최소한의 법과 질서도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들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강자인 강현수의 지시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다들 조용히 해. 우리는 저분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그 사실을 벌써 잊은 거야?”
곽동수의 말에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강현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떠올려서가 아니라.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강현수의 무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강현수가 송하나와 투황을 발견했다.
“여기야!”
송하나가 손을 흔들었고.
“왔어?”
투황이 미소를 지으며 강현수 반겼다.
“어.”
짧게 대답한 강현수가 송하나, 투황과 함께 있는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저들의 얼굴은.
방금 전 자신의 손에 죽었던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의 얼굴과 똑같았다.
“이게 무슨?”
“저놈들이 왜 살아 있는 거야?”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화들짝 놀랐다.
방금 눈앞에서 죽은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을 봤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란 건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우리를 공격했다가 저분들 손에 죽었는데?”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과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가운데.
곽동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저건 나잖아!”
송하나와 투황이 생포한 도플갱어가 곽동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얼굴만 똑같은 게 아니었다.
키, 체형 하다못해 헤어스타일까지 똑같았다.
“동수 형이 둘이야?”
“쌍둥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아무리 쌍둥이라도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가 있나?”
발해길드와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은 곽동수와 도플갱어를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때 강현수가 나섰다.
“이놈들은 도플갱어라는 마족입니다. 플레이어의 겉모습을 그대로 구현하죠. 심지어 스킬도 껍데기만큼은 똑같이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파티를 공격했던 게 마족?”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왜기는 왜야, 우리랑 발해길드를 싸움 붙인 거지.”
발해길드와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금방 도플갱어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도플갱어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강현수가 그 말과 함께.
서걱!
도플갱어의 팔에 작은 상처를 냈다.
뚝! 뚝!
붉은 피가 바닥에 흘러내렸고.
팅!
강현수가 피가 고인 바닥에 은화를 떨어트리자.
치이이익!
은화가 녹아내렸다.
“도플갱어의 피는 독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은으로 간단하게 구분이 가능합니다.”
“당신이 은화에 수작을 부린 것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 하나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강현수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와 동시에.
“맞다!”
“도플갱어? 다른 사람의 겉모습은 물론 스킬까지 똑같이 흉내 낸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은이 녹아내릴 정도의 독인데 바닥의 풀은 멀쩡하잖아!”
“은화에 수작을 부린 게 확실하다!”
“얼굴을 가리고 정체도 밝히지 않은 놈들 말을 어떻게 믿냐!”
구경 중이던 중소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 중 몇몇이 나서 이의를 제기한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의 편을 들고 강현수를 사기꾼 취급했다.
사기꾼 취급을 받은 강현수의 얼굴에.
‘찾았다.’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발해길드나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 중에도 도플갱어가 있을 수 있지.’
또 구경꾼 중에도 도플갱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확히 특정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직접 나서 주면 일이 쉬워지지.’
일단 이의를 제기한 놈들이 가장 큰 용의자였다.
‘아예 뿌리를 뽑아 버려야지.’
지금 당장 이의를 제기한 이들의 피나 타액을 통해 정체를 밝히고 처단하는 건 쉽다.
하지만.
‘그럼 여기 있는 놈들만 잡고 끝이야.’
그러나 꼬리를 달아 놓으면?
‘분명 다른 도플갱어와 접선을 할 거야.’
도플갱어는 인간과 대등한 수준의 지성을 갖춘 마족이었고.
‘모두가 하나의 조직에 속해 있지.’
아틀란티스 차원으로 넘어온 모든 도플갱어는.
자신들의 수장인 마계 귀족 도플갱어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
정체가 밝혀진 것.
은으로 인간과 도플갱어를 구분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
‘이건 무조건 상부에 보고를 할 수밖에 없어.’
어차피 소문은 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다.
‘자신들의 정체를 밝혀낸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보고를 해야 할 거고.’
강현수가 여단 구성을 통해 인간형 소환수들을 소환해 방금 이의를 제기한 플레이어들을 미행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투구를 벗고 당신의 정체를 밝힌다면 그 말을 믿어 주겠소.”
이의를 제기했던 고려길드의 플레이어가 강현수에게 정체를 밝힐 것을 강요했다.
‘이놈은 확실하네.’
강현수 일행은 사냥터에 도착하자마자 완전무장과 함께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착용했다.
괜히 정체가 드러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일부러 숨긴 정체를 드러내고 신분을 밝히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도플갱어뿐이지.’
그건 쉽게 말해.
“맞다! 정체를 밝혀라!”
“얼굴도 모르는 놈 말을 믿을 수는 없다!”
저놈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 역시 도플갱어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투구를 벗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을…….”
“하지만 정체는 밝혀 줄 수 있지. 우리는 다크 나이트다.”
강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크 나이트?”
“무란 왕국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다크 나이트가 테라 왕국에서 활동한 적은 없지 않나?”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더욱더 믿을 수 없소. 적국인 무란 왕국인의 말을 우리가 어찌 믿겠소?”
이의를 제기했던 고려길드의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태클을 걸었다.
“난 무란 왕국인이 아닌데?”
“그럼 인장을 보여 정체를 밝히시오.”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인장을 보여 주면 국적과 이름이 나온다.
그리 큰 정보는 아니지만.
‘그런 사소한 정보라도 알고 싶다는 거겠지.’
이곳에 있는 도플갱어로 의심되는 이들은 일단 모두 살려 보낼 계획이었지만.
‘굳이 다 그럴 필요는 없겠지.’
저놈 하나 정도는 이 자리에서 잡아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뭐, 거대 길드들에게 적당한 긴장감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휘익!
강현수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이의를 제기했던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의 가슴에 붉은 실선이 피어올랐고.
좌악!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이게 무슨!”
“파티장!”
놀란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강현수에게 검을 겨눴다.
팅!
그때 강현수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은화를 튕겨 핏속에 던지자.
치이이익!
붉은 피에 뒤덮인 은화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역시 도플갱어였구나.”
강현수의 말에.
“파티장이 도플갱어?”
“그럴 리가 없는데?”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크게 당황했다.
“이익!”
정체가 드러나자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로 위장했던 도플갱어가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서걱!
퍼억!
강현수가 나설 것도 없이 송하나의 검이 도플갱어의 오른쪽 다리를 베어 버렸고.
투황의 발 차기가 남은 왼쪽 다리의 뼈와 관절을 으깨 버렸다.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화를 핏속에 던져 보도록.”
강현수의 말에 곽동수가 가장 먼저 나와 피 웅덩이 속에 은화를 던져 넣었다.
치이익!
은화가 녹아내렸고.
“진짜였어!”
곽동수가 크게 놀랐다.
이어 다른 이들 역시 하나둘 자신의 가지고 있던 은화를 던져 넣었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최대한 빨리 이 사실을 길드 마스터께 알려야겠어.”
곽동수의 말에 다른 발해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이 사실을 길드 마스터께 보고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고려길드 소속 플레이어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파티장이 도플갱어였다니?
상상도 못 한 결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