깰 수 없는 벽
강현수는 석 달간 몬스터를 사냥하는 와중에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바로 강현수와 소환수가 얼마나 떨어져 있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거리 제한이 없었지.’
한번 소환된 소환수는 강현수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멀쩡하게 활동했다.
단 문제가 하나 있었다.
‘소멸되면 그대로 끝이야.’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다 패배해서 소멸하면?
중대 구성 스킬을 사용해 부활시켜도 강현수의 곁에서 부활할 뿐.
소멸한 위치에서는 부활하지 못했다.
‘가장 실력이 좋은 녀석들에게 맡겨 놨으니 문제 될 건 없겠지.’
강현수는 최북단 원정 중.
눈구덩이를 파고 20마리의 소환수들과 얼음 왕의 목걸이를 넣어 놓았다.
얼음 왕의 목걸이는 자연의 냉기를 흡수하기 위해.
20마리의 소환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호위로.
‘소도시 소크에서 한 달 반은 이동해야 하는 오지에 가서 눈밭을 파헤치는 미친놈이 있지는 않겠지.’
설사 그런 미친놈이나 미친 몬스터가 있다고 해도 20마리의 소환수가 있으니 문제없었다.
‘생명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마력으로 이루어진 육신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또한 무언가를 먹고 마실 필요도 없었다.
‘역시 이 직업을 얻기를 잘했어.’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었다.
직업 일인중대가 아니었다면?
소도시 소크에 꼼짝없이 3년간 발이 묶였거나.
그저 남이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며 얼음 왕의 목걸이를 눈밭에 묻어 놓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3년 후에 찾으러 가마.’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고작 D랭크 아이템이었지만.
3년 후에는 EX랭크가 되어 있을 터였다.
‘소환수들이 아이템 정보를 못 보는 게 아쉽네.’
만약 소환수들이 아이템 정보를 볼 수 있었다면?
중대장의 시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얼음 왕의 목걸이의 랭크를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혹시 모르지.’
직업 랭크가 오르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중대장의 시선처럼 내가 모르는 직업 전용 스킬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강현수가 일인중대라는 직업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이 직업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회귀 전 이 직업의 소유자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자기 직업에 대한 정보를 떠벌리고 다니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 * *
꽈아앙!
투황의 주먹이 상대의 방패에 적중하는 순간, 포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커억!”
방패는 본래의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그러졌다.
그와 더불어 방패를 쥐고 있던 우인족 플레이어 역시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단 한 방에 상대를 쓰러트린 것이다.
“이겼다!”
투황이 자신의 승리를 자축했다.
무패 행진.
투황은 8강까지 올라오며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뭐, 당연한 결과지.’
투황은 회귀 전.
모든 무투 대회에서 무패 우승을 거머쥔 강자다.
그런 투황이 강현수를 만나 회귀 전보다 더 빠르게 강해졌다.
단순히 레벨이 높아진 것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강현수와 송하나라는 강자들과 계속해서 대련을 벌이며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다.
또 그 전투 경험을 토대로 몬스터들과 생사를 건 혈투를 벌였다.
‘소환수들 덕이지.’
몬스터를 사냥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안전을 위해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를 사냥한다.
하나 투황과 송하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강현수의 소환수라는 든든한 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투황은 자신보다 강한 몬스터들을 상대로 원 없이 싸워 볼 수 있었다.
그런 혈투를 거치며 성장한 투황의 입장에서 무투 대회에 나온 플레이어들은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이 없었다.
‘레벨이 딱 400을 찍기도 했고.’
301~400레벨만 참가할 수 있는 무투 대회다.
당연히 400레벨이 가장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회만 끝나면 마이트어 왕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꼭 얻어야 할 게 있었다.
또 사냥터로도 그만큼 적당한 곳이 없었다.
‘앞으로는 쉽지 않겠어.’
아틀란티스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300~400레벨을 유지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중저레벨 구간.
300~400레벨이 중저레벨 구간인 이유는 간단했다.
재능이 없다면 한계 돌파 퀘스트를 깰 수가 없으니까.
플레이어는 99레벨부터 한계 돌파 퀘스트를 통과해야만 추가 레벨 업이 가능하다.
99레벨과 199레벨 한계 돌파 퀘스트의 경우는.
‘개나 소나 다 깨는 수준이지.’
그러나 299레벨과 399레벨부터는 어느 정도의 노력이나 재능이 필요하다.
퀘스트 내용은 다양하다.
또 직업마다 퀘스트 내용이 달랐다.
근접 딜러라면 동 레벨 몬스터와 싸워 승리하기.
탱커라면 상위 레벨 몬스터 공격 1시간 버티기.
‘이런 건 쉬운 편이지.’
문제는 499레벨부터다.
‘노력만으로는 깰 수 없어.’
재능이 꼭 필요했다.
‘사실 399레벨의 벽을 넘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거기다 애초에 400레벨을 찍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송하나와 투황의 경우.
월등한 실력을 바탕으로 레벨 차이가 많이 나는 상위 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400레벨을 찍었다.
하나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경우는 400레벨을 찍기까지 빨라야 5년 길면 10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400레벨 이상부터는 그것도 애교라고 생각할 정도로 난이도가 올라간다.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끔찍할 정도로 늘어나지.’
또 자신보다 하위 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하면 경험치 습득량이 극악이라고 할 정도로 줄어든다.
마치 이지 모드에서 헬 모드로 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처음 400레벨을 찍은 플레이어는 500레벨을 찍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냥을 한다.
그러나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극악으로 변해 가는 레벨 업 난이도에 질려 버리고 만다.
어떻게든 499레벨을 찍더라도.
‘대다수가 500레벨의 벽을 넘지 못하지.’
상황이 이렇게 되면?
‘대부분은 벽을 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안정적인 사냥으로 목표를 바꿔 버리지.’
한계 돌파 퀘스트 클리어를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몬스터를 대량으로 잡아 돈을 버는 쪽으로 전향해 버린다.
‘스킬은 B랭크부터가 고비고 레벨은 400레벨부터가 고비야.’
A랭크 스킬을 얻거나 500레벨을 찍은 플레이어는 나름 고레벨 플레이어 취급을 받는다.
‘뭐, 그래 봐야 랭커들 입장에서는 쓸 만한 병졸 수준이지만.’
일반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고레벨 플레이어라고 우러러보지만.
랭커들 눈에는 이제 좀 부려 먹을 만한 중레벨 플레이어일 뿐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중레벨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다.
송하나와 투황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499레벨의 벽에 가로막히지 않을 것이다.
‘회귀 전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주마.’
회귀 전 황의 칭호를 받은 이들이다.
그들이 강현수를 만나는 기연을 얻었다.
그렇다면 모든 플레이어의 정점이라는 신의 칭호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꼭 받게 해 줄게.’
굴리고 또 굴리다 보면 분명 회귀 전보다 강해질 수 있으리라.
* * *
투황은 무패 전적을 이어 가며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이제 내일 한 경기만 이기면.
301~400레벨 무투 대회 우승이었다.
“주피.”
강현수가 투황을 불렀다.
“왜?”
“내일 우승하면 다시 무란 왕국군에 지원할 생각이야?”
“당연하지.”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야?”
강현수의 물음에 투황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왜 불길한 소리를 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나 지난 반년간 투황 역시 강현수에게 적잖이 정이 들었다.
또 도움도 많이 받았다.
투황은 겉으로는 강한 척을 하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도 여리다.
결정적으로.
투황 스스로도 무란 왕국군에 지원해 합격할 확률보다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걸 왜 묻는 거야?”
투황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신이 무란 왕국군에 떨어지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 같아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랑 하나는 무투 대회가 끝나면 무란 왕국을 떠나 마이트어 왕국으로 갈 생각이야.”
“뭐?”
투황은 적잖이 놀랐다.
강현수와 송하나가 계속해서 무란 왕국에서 활동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란 왕국군에 입대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강현수의 물음에 투황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거절인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원주민들은 웬만해서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벗어나지 않는다.
회귀 전 투황이 그 예외 사례가 되기는 했지만.
그건 아주 먼 훗날.
모든 무투 대회에서 무패 우승을 했음에도 무란 왕국군 입대에 실패한 뒤의 일이었다.
‘설득해 주마.’
어차피 떠날 거 미리 떠나는 게 투황에게도 좋았다.
또 강현수는 투황을 설득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분명히 401~500레벨 무투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하겠지.’
그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좋아.”
“다음 무투대……. 응?”
“좋다고.”
투황의 즉답에 강현수는 살짝 당황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설득하려고 했는데.
단번에 오케이를 받은 것이다.
“네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이번 무투 대회에 참가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투황의 목적은 모든 무투 대회의 우승.
그런 만큼 301~400레벨 무투 대회의 경우 390레벨 정도가 되었을 때 도전할 생각이었다.
투황은 390레벨을 넘어서는 데 아무리 빨라도 1년은 넘게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강현수의 도움을 받은 결과.
고작 반년 만에 400레벨에 도달했다.
“난 바보가 아니야. 너와 함께하는 게 내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또 다음 무투 대회의 경우는 500레벨을 찍은 후 굴라로 오기만 하면 되니까 참가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강현수가 설득을 위해 준비한 말들이 투황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너,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 은근히 섭섭하다.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놈으로 보여? 너한테 진 빚을 갚기 전까지는 절대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알겠어?”
투황의 말에 강현수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반년간 투황의 생각과 성향 정도는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절대 안 떨어진다고?”
그때 송하나가 의아한 눈으로 투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안 떨어져.”
“그럼 너 무란 왕국군에 합격하면 어떻게 할 거야?”
“어?”
송하나의 물음에 투황의 얼굴에 적잖은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설마 방금 그렇게 말해 놓고 냉큼 무란 왕국군에 입대하는 건 아니겠지? 빚도 다 갚기 전에?”
송하나의 추궁을 들은 투황의 등이 축축한 식은땀으로 적셔지기 시작했다.
* * *
이변은 없었다.
투황은 손쉽게 301~400레벨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다.
“축하해.”
“상대가 다 약해 빠졌네. 뭐, 그래도 잘했어.”
“고맙다.”
강현수와 송하나의 칭찬에 투황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서 가 봐.”
“미안.”
강현수의 말에 투황이 짧은 사과를 남기고 무란 왕국군의 입영 신청소로 향했다.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어.’
투황의 마음속에 적잖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무투 대회는 무란 왕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행사다.
또 단순히 인기만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출세 코스이기도 했다.
토인족인 투황에게는 예외였지만.
역대 무투 대회 우승자들은 왕국군이나 거대 길드에 스카우트되어 일종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동안 저레벨 구간이라 인정받지 못했던 거야.’
하나 301~400레벨 무투 대회는 사정이 달랐다.
무란 왕국군의 대다수가 300~400레벨이다.
무란 왕국군 입장에서는 입대를 허락하기만 하면 바로 실전에 투입이 가능한 즉시 전력을 손에 얻는 셈이었다.
또 301~400레벨 무투 대회는 현역 무란 왕국 군인들이 가장 많이 참여하는 대회이기도 했다.
당연히 투황의 상대 중에 현역 무란 왕국 군인들도 있었다.
투황은 현역 무란 왕국 군인들을 꺾고 당당하게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
현직 군인들보다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준 것이다.
‘이 정도면 편견을 깨기에는 충분하잖아.’
건국 전쟁 때 생겼던 불문율.
그 오래된 과거를 이제는 청산할 때가 되었다.
“입대 신청하러 왔습니다.”
투황이 당당하게 입대 신청서를 접수했다.
그곳에는 투황의 레벨과 무투 대회 전적이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결과는 내일 입영 신청소 벽보를 통해 알려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볼일을 끝마친 투황이 몸을 돌려 입영 신청소를 빠져나갔다.
“아!”
그러다 불현듯 입대 신청서에 기재하지 못한 정보가 떠올랐다.
‘5연속 무패 우승이라고 따로 써 놨어야 했는데.’
0~50레벨 무투 대회부터 301~400레벨 무투 대회까지 무패 우승을 한 기록을 써 놓기는 했다.
하지만 5연속 무패 우승이라고 한 번 더 강조하면 심사할 때 유리하지 않겠는가?
투황이 다시금 입영 신청소로 향했다.
그리고 입영 신청소의 문을 열려던 순간.
“저놈 참 끈질기네. 어떻게 우승할 때마다 와서 신청서를 넣고 가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5회 우승이 아니라 10회 우승을 해도 안 될 일을 왜 자꾸 하는지 모르겠어요.”
입영 신청소 접수원들의 대화가 투황의 귀에 들어왔다.
“어차피 토인족인 이상 무조건 탈락이지. 상부에서도 지시가 그렇게 내려왔잖아.”
“네, 토인족은 절대 합격시키지 말라고 특별 지시가 내려왔죠. 그런데 입대 신청서 작성하는 토인족은 최근 몇십 년 동안 저 녀석 하나뿐이었으니, 사실 저놈 합격시키지 말라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저놈 불합격시키라는 소리지. 아무리 실력이 좋으면 뭘 해, 겁쟁이 토인족인데.”
“맞습니다. 불리해지면 전우를 버리고 도망갈 놈들을 군에 입대시킬 수는 없죠.”
“얼른 불합격 도장 찍어야겠다. 불합격 도장 어디 있냐?”
“저한테 있습니다. 여기 받으십시오.”
“고맙다.”
꽝!
“자, 이거 내일 벽보에 붙여.”
“네.”
입영 신청소 문을 열려던 투황의 몸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