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5화
어비스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그 사이 탑의 많은 것들이 안정화되었고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고들이 터져 나오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관리자들도 제법 숙련이 되어 금방 일들을 해결하였다.
헨리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어비스를 관리했다.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이젠 마음 쓰일 일도 감정 소모할 일도 없었으며 어비스의 관리라고 해 봤자 가우스 관리의 연장선 정도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어비스 관리 팀은 새로운 어비스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어비스의 최상층인 가우스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재하가 렌에게 물었다.
“렌, 넌 뭐 준비해 왔냐?”
“축제에 걸맞은 요리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초밥입니다.”
“초밥?”
“한국에선 좋은 일이 있을 때 삼겹살집에 간다죠? 저희 일본에선 초밥을 먹습니다. 특히 기분을 내려면 참치 초밥을 먹는데 오늘을 위해 태평양에서 질 좋은 녀석들로다가 엄선해 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참치인지 몬스터인지 모를 정도로 거대한 참치들이 오픈 주방 한 켠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 참치.”
“신 상은 뭘 준비했습니까?”
“나? 방금 네가 말했네. 그냥 고기나 구워 먹으려고 삼겹살이랑 목살 좀 준비해 왔지.”
“에이, 그건 너무 식상한 것 아닙니까? 단순히 불에 고기를 굽는 건 어느 차원에서나 흔히 먹을 수 있는 조리법이 아닙니까?”
“하지만 쌈장과 김치는 없지. 외계 놈들 K - 채소랑 K - 향신료 맛에 정신을 못 차릴 거다.”
“재료 본연의 맛인 초밥을 더 좋아할 겁니다.”
말이 모임이지 그냥 파티였다.
그도 그럴 게 새로운 어비스의 1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니까.
그래서 관리자들을 비롯한 모임 초대자들이 각자 음식을 가지고 오기로 했고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요리 준비를 하던 렌이 무언가를 보고 쪼르르 달려가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세요! 일찍 오셨네요!”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하이렌의 용족들이었다.
하이렌의 수호신이자 최고신인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다 이번 모임에 참석하였다.
더 이상 나쁜 감정은 없었다.
사죄도 하였고 그날 이후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지며 묵은 감정들을 모두 풀었으니까.
용족들의 등장에 재하도 마스도 모두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간만에 뵙습니다.”
그 말에 용족들의 수장, 스카샤가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차원문을 타고 왔으니 별로 고생한 건 아니네만…… 우린 음식을 잘 먹지 않아서 대신 술을 가져왔는데 괜찮은가?”
“아, 물론입니다! 하이렌의 곡주는 맛이 끝내주기로 유명하잖아요?”
“하하, 그 소문이 벌써 다른 차원에도 퍼졌나?”
“그럼요! 전 요즘도 가끔 일부러 하이렌 주조장에 들러서 사가는 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때였다.
한순간에 커다란 그림자가 지며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인 건.
해가 진 게 아니었다.
해를 가릴 만큼 거대한 존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다름 아닌 넬바프의 거인들이었다.
“하하, 우리가 왔네!”
세상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들은 그저 반가워서 한 말이었겠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거인 특유의 거대한 성량은 조심한다고 해서 쉽게 줄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순간, 거인들의 거짓말처럼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짜잔!”
축소 스킬 덕분이었다.
비단 오늘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소 다른 일들 때문에라도 그들과 만나야 할 때면 매번 관리자들이 몸집을 부풀릴 수가 없어 그들에게 일찍이 축소 스킬을 나누어 준 것.
“후후, 우리 별로 안 늦었지?”
단장 라훔이 씩 웃어 보이며 말하자 재하와 렌은 용족들을 반겨 주듯 그들을 반겨 주었다.
관리자들의 반김에 라훔이 턱짓했고 그들 중 1대대장 툼스가 거대한 멧돼지 하나를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라훔 님, 저건……?”
“넬바프에서 최고로 치는 하늘 멧돼지야. 오늘을 위해 무려 두 달이나 살려둔 놈이지. 지금은 축소 스킬 때문에 작아졌지만 적절하게 스킬을 해제하면 오늘 올 손님들은 전부 먹이고도 남을 걸?”
하늘 멧돼지라.
그 말에 렌이 씩 웃으며 재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신 상, 들었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멧돼지랍니다. 신 상이 준비한 고기도 돼지고기 아닙니까?”
“…조용히 해.”
이외에도 거인들은 직접 만든 소시지며 맥주 등을 몇 드럼통이나 내놓았고 모임의 시작과는 관계없이 알아서들 맥주를 붓고 마시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순차적으로 손님들이 왔다.
메두사를 비롯한 혁명군과 질서단, 뉴어비스의 사람들까지.
또 외탑과 내탑에서 초대받은 각 차원의 대표들이 하나둘씩 도착했고 파티 분위기 또한 슬슬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분위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인사들을 나누었고 과거의 고통을 안주 삼아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가까운 곳에서 내려다보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헨리였다.
“넌 안 내려 가 볼 참이냐?”
“게임이 끝나야 내려가죠. 얼른 수놓으세요. 체스 두는 사람 어디 갔습니까?”
헨리는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주신과 체스를 나누었다.
헨리는 가우스의 평화를 되찾은 후 이따금씩 주신과 체스를 두었는데 주신은 여전히 헨리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고얀 놈. 재촉하지 말아라, 내 머릿속은 이미 너와 한창 전쟁 중이니까.”
“그래서 문제인 겁니다. 가상의 저와 체스를 둔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놈 참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주신은 한참의 장고 끝에 드디어 말을 움직였다.
그리고 주신이 옮긴 말을 본 헨리는 그 즉시 말을 움직여 응수했다.
“그놈 거! 고민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뭘 이런 걸 고민합니까? 수가 뻔히 다 보이는데.”
“떼잉, 쯧!”
“그럼 계속 장고하고 계십시오.”
주신은 수 한 번을 놓을 때마다 시간이 참 오래 걸린다. 그래서 헨리는 주신과 체스를 하며 다른 일도 겸하는 편인데 오늘은 벌써 시작된 파티 구경에 여념이었다.
‘많이도 왔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활동하다 보니 참 많이도 모였다.
싫다는 건 아니다.
헨리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니까.
그때, 주신이 여전히 체스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근데 진짜 안 내려가 봐도 되냐?”
“주신님이 일찍 끝내줘야 내려가죠.”
“후후, 그게 불만이라면 기권 패를 던지고 가면 되지 않느냐.”
“싫습니다. 기권 패 던지고 나면 그걸로 만년은 우려 드실 거면서.”
“쯧쯧, 융통성 없는 놈.”
주신은 한동안 체스판에 집중했다.
헨리도 조용히 아래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길 얼마간, 주신이 여전히 체스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헨리야.”
“예, 주신님.”
“고맙다.”
“갑자기요?”
“그냥, 언젠간 이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참나…… 하실 거면 제가 가우스를 막 구했을 때 해 주지 그러셨어요?”
“후후, 그래서 서운하든?”
“제가 앱니까? 그런 걸로 삐지게.”
“여튼 고맙다.”
“고맙긴요.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
“그럼요?”
“끝까지 포기 안 해 준 것 말이다.”
“……참나.”
그 말에 헨리는 피식 웃었고 주신도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게 기나긴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주신은 그동안 몇 번이나 헨리에게 포기하자고 말했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역시 네가 주신을 했어야 했어.”
“이제 와서요?”
“큰일을 겪을 때마다 느낀다. 너에 비하자면 내가 얼마나 그릇이 모자란지를 말이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주신 자리는 안 합니다.”
“준다고 한 적도 없다 이놈아.”
“저 내려갔다가 올게요.”
“이거는?”
주신이 체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쪽 눈은 여기 붙이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오래 고민하실 거잖아요.”
“너무한 거 아니냐?”
“그럼 주신님도 체스 그만 두시고 내려와서 인사들이나 나누시죠. 보니까 오늘 할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럴까? 나 진 거 아니다?”
“예, 예.”
헨리의 말에 주신은 헨리와 자신의 킹을 들어 옆으로 뉘였다.
둘 다 경기를 포기할 때 쓰는 둘만의 사인이었다.
주신은 그제서야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났다.
“가자.”
주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사람은 그제서야 파티가 한창인 연회장으로 내려왔다.
“마스터!”
헨리의 등장에 차원인들이 헨리를 반긴다.
당연했다.
어찌 보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헨리였으니까.
“다들 잘 지냈죠? 인사하시죠. 여긴 제가 살던 세상의 최고 존재이신 주신님입니다.”
“험험, 다들 반갑습니다. 주신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나는 넬바프라는 거인국의…….”
“하이렌의…….”
이어지는 소개들.
헨리가 굳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개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아서 곧잘 주신과 잔을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즐거운 날이었다.
그렇기에 오늘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헨리는 주변을 둘러보던 끝에 홀로 참치 초밥을 먹고 있는 자를 발견했다.
마스였다.
헨리가 마스 옆으로 다가가 섰다.
“마스.”
“우물우물, 네?”
입안 가득 참치 초밥을 넣은 채 고개를 돌아보는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진다.
헨리도 마스와 똑같은 것을 렌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참치 초밥을 좋아하나 봐?”
“네, 좋아합니다. 근데 그건 왜요?”
“하늘 멧돼지도 있고 한국식 바비큐도 있는데 유독 참치 앞에만 붙어 있길래 물어본 거야.”
“그렇군요. 근데 주인님이야 말로 왜 여기 계십니까? 이 파티의 주인공은 사실 주인님이시나 다름없는데.”
“내가 왜 주인공이야? 오늘은 그저 아는 사람들끼리 적당한 핑계로 모여 노는 자리일 뿐인데.”
“그런가요.”
다소 심드렁한 대답.
그런 마스의 반응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어비스는 지겨워진 거냐?”
“지겹다라……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어느 순간부터 너에게서 활기가 느껴지지 않으니까?”
“재하 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직장인들은 원래 그렇게 변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리고 주인님의 말씀대로 지겹지 않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거짓말이겠죠.”
그럴 만도 했다.
마스가 가장 좋아하는 건 타인의 이야기, 특히 불행이 가미된 자극적인 이야기들이었는데 어비스에는 더 이상 그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넌 원래 즐기던 것이 따로 있었으니까. 혹시 모든 메르키스족들은 다 그런가?”
“그거야 모르죠?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럼 확인해 보러 갈래?”
“…네?”
“잘 모르겠으면 한번 확인해 보러 가자고.”
그 순간, 마스가 멍한 표정으로 헨리를 올려다보았고 헨리가 입가 가득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드디어 찾았다. 다른 메르키스족. 녀석도 너처럼 어비스 같은 것을 구축해서 동포를 찾고 있더라고.”
“그, 그, 그게 무슨…….”
말 그대로였다.
그동안 헨리는 어비스 일만 돌본 게 아니었으니까.
헨리는 마스에게 약속했던 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이차원의 바다를 유영하며 다른 어비스…… 즉, 차원의 바다 어딘가에 있을 다른 메르키스족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고 오늘 그 사실을 마스에게 말해 준 것.
헨리가 말했다.
“이제 이곳은 너와 내가 없어도 큰 문제가 없을 만큼 안정화가 됐다. 그러니 이제 너와 약속했던 다른 동포를 찾으러 떠나자꾸나.”
“주인님……!”
마스는 하마터면 먹고 있던 참치 초밥을 떨어뜨릴 뻔했다.
사실 마스는, 그동안 헨리가 자신과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헨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마스가 얼른 초밥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 지금 바로 출발하면 되나요?”
“우선 오늘 하루부터 마치고. 내가 괜히 오늘 모두를 불러 모은 줄 알아?”
“주인님……!”
“에테르는 충분히 모았다. 현 차원계에서 에테르가 가장 강한 힘이라지? 그러니 오늘 모두에게 우리 둘의 외출 사실을 공표하고 그 다음에 공식적으로 네 동포를 만나러 가는 거야. 그쪽 어비스는 어떤 식으로 꾸려져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 말에 마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스의 기운찬 대답.
파티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8서클 마법사의 환생 2부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