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4화
하노스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여지껏 신이 직접 인간에게 빙의하여 이런 식으로 살육을 벌인 적은 없었다.
해서도 안 되고 규칙을 거스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노스는 달랐다.
그는 질투의 신이자 복수의 신.
조건은 모두 충족되었다.
그렇기에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땅에는 더 이상 검성과 힐탄만큼 강한 자도, 신을 유일하게 해할 수 있는 기물인 봉혼검도 없었으니까.
힐탄의 아이릭 입성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고 온몸에 피칠갑을 한 그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대장군이었으니까.
왕궁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를 막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노스는 허리춤에 칼을 차고 몸에 피 냄새를 풀풀 풍긴 채로 아이기스를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 아이기스가 먼저 그에게 다가왔다.
“힐탄 님!”
하노스에게 다가와 품에 폭 안기는 아이기스.
하노스는 그런 아이기스를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크크크…… 크흐흐… 푸하하하!”
“히, 힐탄 님?”
“내가 아직도 힐탄으로 보이는 건가?”
“…네?”
그 순간, 하노스는 힐탄의 검을 휘둘러 아이기스의 몸을 베었다.
흩뿌려지는 혈.
아이기스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힐탄……님?”
쓰러지는 아이기스.
하노스는 그런 아이기스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리고 순간 하노스의 얼굴이 바뀌었다.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내 님의 얼굴에서 인간조차 아닌 복수와 질투의 신의 얼굴로.
아이기스의 눈이 커졌고 커진 아이기스의 눈에 희열에 찬 하노스의 얼굴이 비춰졌다.
“이 모든 건 너로 인해 시작된 것이다.”
하노스는 힐탄의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그러자 아이기스의 몸에 반대 방향으로 새로운 검흔이 새겨졌고 아이기스의 숨이 멎었다.
하노스의 공주 살해를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힐탄과 아이기스가 아니면 아무도 못 들어오는 곳이었으니까.
“하아…… 드디어 끝났군.”
아이기스까지 죽이고 나서야 하노스는 만족의 미소를 띠었다.
시올라의 요구 조건과 로나스의 자리를 위협하는 놈,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왕국들을 끌어들여 아이릭까지 지울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로나스를 위협할 자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로나스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군.”
하노스는 상상했다.
자신을 위해 이런 일을 벌여 준 것에 대해 감동하는 로나스의 감동받은 얼굴을.
그 얼굴을 상상하니 온몸이 짜릿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해야겠지.”
하노스는 힐탄의 손아귀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하노스가 생각하는 마지막은 힐탄과 아이기스의 육신마저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제는 죽어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몸이었지만 자신은 여태 그 껍데기들을 이용해 일을 진행해 왔으니 육신까지 깨끗이 소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하노스는 자신의 신력을 더한 인간은 감히 흉내도 못 낼 신의 업화를 피워 올렸다.
화륵!
푸른 불꽃이 아이기스와 힐탄의 육신을 감싼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까짓 고통쯤, 신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육체의 주도권만 빌렸지 고통까지 전달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하노스는 죽은 아이기스의 시체를 들어 춤을 추었다.
왈츠를 추듯 불타는 방 안을 무도회장 삼아 하노스는 춤을 추었다.
죽은 아이기스를 마치 로나스라고 생각하고.
업화는 점점 아이기스와 힐탄의 육신을 갉아먹었다.
옷과 갑옷을 태우고 피부를 태우고 가죽을 태우고 살을 태웠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과 걸친 것들을 모두 태워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불꽃이 목 언저리까지 왔을 때였다.
펑!
무언가 깨지는 소리.
힐탄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였다.
그것은 아이기스가 힐탄의 무사 출정을 위해 걸어 준 것으로 힐탄은 여태 그것을 단 한 번도 빼지 않고 목에 걸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펜던트가 터졌다.
보석 목걸이가 불에 타면 터진다기보다는 불에 녹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이것은 보석이 아니었다.
이것의 안에는 한때 다크엘프들조차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신원미상의 존재가 봉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봉인이 방금 막 깨졌다.
꾸물꾸물.
갇혀 있던 그것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마치 슬라임처럼 꾸물거리던 그것은 자신을 뒤덮는 화마에 움츠러드는 듯하더니 이내 곧 화마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하노스는 춤을 추느라 여전히 그것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기의 손가락처럼 꼼지락거리던 그것은 한순간 그물망처럼 몸을 키워 힐탄과 아이기스를 삼켰다.
-이게 뭐야?
놀란 하노스는 황급히 힐탄으로부터 벗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순간의 기습이었다지만 인식하지 못할 정돈 아니었고 그래서 힘을 써서 막았다.
그러나 하노스는 저항 없이 그것에 막혔다.
순간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이런 위기감은 너무 오랜만에 느껴 본 것이라 본능에 의거해 긴급 탈출하듯 힐탄의 몸을 빠져나왔다.
하노스는 그렇게 힐탄의 몸을 빼앗겼다.
설마 힐탄이 준비한 비장의 수인가?
아님 아이기스가?
놀랍게도 둘 다 아니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모르는 하노스에겐 그렇게 보였다.
-건방진 놈들이!
분노한 하노스는 직접 강림하여 업화를 뿜었다.
그러나 힐탄을 집어삼킨 그것은 이미 하노스의 불꽃을 흡수하였기에 별로 피해를 주지 못했다.
되려 하노스가 뿌린 불꽃을 다시 흡수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신의 불꽃이 회오리를 일더니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새하얀 슬라임 같은 그것에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그것은 힐탄과 아이기스를 완전히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천천히 사람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다름 아닌 아이기스였다.
-넌!
놀란 하노스가 다시 한번 아이기스에게 불꽃을 뿜었다.
그러나 아이기스는 건조한 표정으로 그것을 막았고 놀고 있는 반대편 손을 휘둘러 하노스를 덮쳤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물망처럼 퍼진 아이기스의 손은 하노스를 완전히 감싸는데 성공했다.
하노스는 발버둥 쳤다.
신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치 추하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늪에 빠지듯 하노스는 점점 그것에 잠식되어 갔고 결국엔 하노스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이기스는 하노스를 공처럼 작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자신뿐인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낯선 목소리.
말을 뱉은 건 분명한 아이기스였고 생김새 또한 아이기스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아이기스가 절대 아니었다.
목소리의 정체는, 오랜 준비 시간 끝에 드디어 각성을 마친 ‘마스’였다.
마스.
어느 날 갑자기 이차원에서 흘러들어와 이곳에 뿌리를 내린 메르키스족.
그는 북쪽 숲에서 탄생하여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세계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사실 자신을 봉인한 펜던트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미 그 정도 힘은 충분히 기른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힐탄과 아이기스의 목걸이로 머물면서 마스는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신비로웠고, 재밌었으며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자신은 동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 고향도, 배경도, 자신의 정체성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쭉 지켜보았다.
때가 되면 그들로부터 분리되거나 혹은 그들에게 대화를 시도해 보기 위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노스가 나타나며 자신의 계획을 모두 망쳤다.
마스는 질문을 던진 후 눈앞에 죽은 아이기스의 외형을 똑같이 복제해 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것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아이기스의 목소리를 냈다.
“……신기하네요.”
“이 세계의 힘보단 내가 가진 힘이 더 월등하니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신은 제가 미워하던 신들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라는 건 알겠어요.”
마스가 아이기스를 집어삼켰을 때, 아이기스는 마스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마스가 자신의 품에서 모든 것을 보여 주었으니까.
그리고 아이기스가 죽자마자 그녀의 영혼을 품었기에 이렇듯 되살릴 수 있었다.
“힐탄 님은 안 되는 거겠죠?”
“그는 너무 늦었어. 그의 죽음은 나에게 있어서도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거든.”
거짓말이었다.
마스는 힐탄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던 마스였기에 이 이야기의 끝이 궁금했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든 비극이든 말이다.
그래서 힐탄의 죽음을 방치하고 하노스가 아이기스를 벨 때까지 기다렸던 것.
그러나 그 사실을 굳이 솔직하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기에 그저 늦었다고 둘러댔다.
아이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말해봐.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대가로 내가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이 세계에 대한 이해는 모두 끝났다.
그렇기에 이제는 흥미가 떨어져 버렸다.
자신은 어서 빨리 다른 동포를 찾아야만 했으니까.
마스의 물음에 아이기스는 얼마간 고민하더니 마스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순 없는 거겠지?”
“그건 좀 힘들지.”
“그럼 이 세계를 멸망시켜 줘.”
“괜찮겠어?”
“지긋지긋해. 신이고 뭐고.”
아이기스는 진심이었다.
아름다움이고 신이고 이젠 모든 게 다 질렸다.
이 세상이 싫었다.
그저 예쁘게 태어났을 뿐인데 왜 다들 서로를 미워하지 못해 안달인지.
그 과정에서 마음을 나누었던 두 사람을 잃었고 종국엔 아버지도 잃었다.
듣자 하니 빌어먹을 로나스도 아직 살아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아이기스는 이 세상의 멸망을 바랐다.
자신에겐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복수가 다 무슨 소용일까?
게다가 마스가 보여 준 사실에 의하면 하노스에 술수에 놀아난 네 왕국은 현재 군대를 이끌고 아이릭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수순은 뻔했다.
아버지와 대장군이 사라진 이 나라가, 네 왕국을 상대로 버티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멸망을 바랬다.
마스라면, 정말로 그렇게 해 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건 마스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마스가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그때부터 마스는 기동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멸망을 위해.
*“……그럼 네가 살던 세상이 마스가 최초로 태어난 곳이라고?”
“그런 셈이지.”
“그 세상은 멸망했고?”
“그렇지.”
헨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메두사.
헨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굳이 시간을 되돌리려고 하지 않은 거였어.”
“되돌려 봤자 멸망일 세상, 내가 뭣 하러 그런 짓을 해? 난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
“이 깊은 지하가?”
“난 사람 많은 거 딱 질색이야. 그냥 조용히 나 혼자, 내 자식들과 사는 게 제일이지.”
“이름은 왜 바꾸었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군.”
“아무튼 긴 이야기 들어 줘서 고마워. 지루했지?”
“별로.”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두사의 사정도 알았으니 이제 더 이상은 그녀에게 시간 역행에 대한 제안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벌써 가려고?”
“할 일이 많아서.”
“그럼 또 보자고.”
“기회가 되면 그러지. 그리고…….”
헨리는 메두사에게 혹여 불편한 사항이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려 하였으나 이내 관두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싱겁긴.”
헨리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처리해야 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