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3화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내 손으로 죽인 놈들인데 저렇게 보란 듯이 살아 있었으니.
원탁에는 아이릭 왕국을 비롯한 다섯 왕국의 왕들이 둘러앉았고 그 뒤에는 힐탄을 비롯한 사군주회의 군주들이 모여 있었다.
풀만의 왕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제 만족하시오?”
아이릭의 왕을 보며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명백히 힐탄을 향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힐탄은 전혀 아랑곳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사군주를 보았다.
묘하게 힘없는 눈빛.
사군주씩이나 되는 자들이 하고 있을 눈매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저들은 가짜가 분명하다고.
힐탄은 품에서 영종을 꺼내 흔들었다.
딸랑!
그 순간.
“크아아아아아!!”
멍하니 앉아 있던 사군주가 돌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크어어어어어!!”
“크이이이이익!!”
비명은 계속됐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커져만 갔다.
“카, 카트만 회장! 왜 이러는 거요?”
“호이엔! 이게 무슨 짓인가!”
“사마라, 자네 왜……!”
“모두 물러나시지요.”
사군주의 발광에 힐탄이 자신의 주군을 뒤로 물리며 모두에게 말했다.
“대, 대장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거죽을 뒤집어쓴 무언가지. 그래서 수상하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 거죽을 뒤집어쓴 무언가?”
“지금부터 저들의 진짜 모습을 밝혀내겠습니다.”
딸랑!
영종을 한 번 더 울리자 사군주는 급기야 테이블 위로 쓰러져 이상한 진액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쓰러진 사군주의 몸으로부터 흑빛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며 사군주 속에 감춰져 있던 진짜 흑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도, 도망쳐!!”
사과를 요구하던 네 왕국의 왕들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먼저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들에 힐탄 또한 자신의 주군부터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 회장의 문을 걸어 잠갔다.
아니, 걸어 잠그려고 하자 그것을 본 힐탄의 부하가 말했다.
“단장, 설마 혼자 저놈을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척 보기에도 초월적 존재다, 모두를 대피시키고 폐하를 보필해라.”
“하지만!”
“난 죽지 않는다. 약속하마.”
힐탄의 굳건한 눈빛에 부하는 그제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힐탄의 손을 놓아주었고 힐탄은 그제서야 문을 걸어잠근 뒤 검을 뽑아 들었다.
시커먼 구름 같은 존재.
그것은 마치 악령 같았다.
회장에 단 둘이 남게 되자 악령처럼 보이는 흑막이 말했다.
-대단하군. 이것들이 가짜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절대로 실수하지 않거든.”
-재밌군.
이윽고 악령의 형태가 제대로 모아지더니 사람의 모습을 띠었다.
질투와 복수의 신, 하노스였다.
힐탄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노스의 외견은 절대로 보통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신은 신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당신과 비슷한 기운을 가진 존재를 얼마 전에 만난 적이 있거든.”
아마 로나스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순간, 하노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인간은 절대로 저렇게 구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유는 간단했다.
보통의 인간이 로나스를 입에 담는 것도 역겨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나스를 그렇게 만든 놈의 제자가 로나스를 언급하니 그 역겨움이 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눈치 빠른 힐탄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신씩이나 되는 자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나 했더니 로나스 때문이었어.”
-닥쳐라!!
하노스가 소리치자 하노스로부터 엄청난 기운의 영압이 사방으로 뿜어졌고 회장 내 유리창을 비롯한 접시나 촛대 같은 것들이 일시에 부서졌다.
그것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힐탄은 놈의 고함에 맞춰 온몸에 오러를 방출했다.
화화화화화화!
그리고 동시에 신에게 달려들었다.
계산은 이미 끝났다.
다른 신이 자신에게 로나스 때문에 온 것이라면 아마도 로나스는 죽었겠지.
그렇다면 자신의 스승은 신을 죽였다는 말이 될 테고 자신의 스승도 해낸 일을 자신이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은 안 했다.
“절(絶)!”
전방으로 뛰어든 힐탄의 검이 일순간 푸른 지평선을 그렸다.
그것은 회장의 절반을 갈랐고 그 중심에는 하노스가 있었다.
하노스의 전신이 일순 깨진 거울 조각처럼 대각선으로 쪼개진다. 그러나.
-하하하하! 역시 인간의 힘은 참으로 보잘 것이 없구나!
하노스의 비웃음.
그와 동시에 하노스의 몸이 그물망처럼 넓게 퍼졌다.
시커먼 그의 몸이 사방으로 퍼지자 회장에는 어둠이 찾아 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마치 시력을 잃은 듯한 제한된 상황이었으나 힐탄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하노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 줄까? 네가 그토록 존경하던 스승은 죽었다. 심지어 바라마지 않던 로나스의 죽음도 실현시키지 못한 채 말이야.
그와 동시에 하노스는 잿더미가 된 검성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힐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것이 설령 거짓이라 할지라도 재가 된 스승의 시신을 보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 옆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는 작은 로나스의 모습이었다.
저것 또한 환상일까?
그런 의심이 들 때쯤 어두웠던 주변이 밝아지며 익숙한 풍경을 자아냈다.
그곳은 폐허가 된 어느 숲속이었다.
힐탄은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여긴 검성이 폐허로 만들어 버린 미의 여신, 로나스의 신전이 있던 곳이었다.
그 순간, 힘을 회복하고 있던 로나스와 힐탄의 시선이 교차했다.
-네놈!
분노한 로나스가 일순 짐승처럼 눈을 붉히며 힐탄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로나스의 손이 힐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힐탄과 로나스의 거리가 좁혀지려던 찰나, 뒷목을 잡아끌듯 하노스가 힐탄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았으니까.
힐탄은 다시 어둠 속으로 던져졌다.
무기력했다.
아무리 오러를 방출하려고 해도 무슨 이유에선지 힘이 발산되지 않았다.
-어리석은 놈, 한낱 인간에 불과한 네가 감히 날 이길 수 있을 성싶으냐?
힐탄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쓰고 발버둥 쳐도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마치 우주 속에 떠 있는 기분.
몸속에 내장된 모든 힘이 어디론가로 새는 기분이었다.
그때, 하노스가 힐탄에게 새로운 풍경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어둠을 도화지 삼아, 이번에는 아이릭에 있을 자신의 반려자 아이기스를 보여 주었다.
-크큭, 어떠냐?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다.
힐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대답하는 건 적의 페이스에 놀아나는 행위인 걸 알아서.
하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심장이 뛰었고 근육이 울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기스를 들먹이고 있었기에.
하노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기스, 저년은 아주 추잡한 여자지. 자신의 굴레를 끊기 위해 희생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저 자신의 미모에 눈이 먼 남자들이 알아서 희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그러나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역린 아닌 역린을 건드렸기에.
힐탄이 발끈하자 하노스가 더 없이 기뻐하며 말했다.
-크큭, 난 신이다. 복수와 질투의 신, 하노스. 그런 내가 보지 못하는 게 있을까?
“닥쳐라!!”
-가여운 남자, 힐탄이여. 넌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다. 네 스승이 로나스를 베었던 건 다크엘프들이 준 신비로운 기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너에겐 그런 기물이 없잖아?
그 순간, 다른 어둠으로부터 기다란 촉수가 뿜어져 나와 힐탄의 몸을 꿰뚫었다.
“크윽!”
힐탄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뱉고 말았다.
상처 자체는 단순한 관통상이었다.
하지만 관통상에서부터 비롯된 아픔은 상상도 못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 힐탄조차도 하마터면 졸도해 버릴 만큼 말이다.
힐탄의 강인한 정신력에 하노스가 다시 한번 즐거움을 표했다.
-후후, 참으로 대단한 정신력이로구나. 부디 오래 버텼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 즐거움이 늘어날 테니.
푹!
또 다른 촉수가 창처럼 뿜어졌다.
그것은 힐탄의 허벅지를 관통했고 이번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고통을 힐탄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세 번째 촉수가 힐탄의 어깨에 작렬했을 때 결국 힐탄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
하노스는 웃었다.
힐탄의 비명이 듣기 좋은 연주곡처럼 들렸기에.
그러나 힐탄은 절대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비명은 내지를지언정 버티고 버텨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그렇기에 하노스는 너무 기뻤다.
미약한 인간이 발버둥 치는 꼴이 너무나도 우스워서.
-넌 나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너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감정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불멸할 테니.
그 말과 함께 하노스의 검은 창이 힐탄의 심장에 작렬했다.
차가웠다.
여느 날붙이에 찔린 것처럼.
대신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준치를 초과해서일까?
허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공주님…….’
헛것처럼 스치는 아이기스의 얼굴.
보고 싶었다.
동시에 스스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왜 나는 더 강하지 못한 걸까?
스승님은 해낸 걸 왜 나는 해내지 못한 걸까?
의식이 흐려 갈 때쯤, 힐탄의 귓가에 하노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잘 가라, 우매한 인간이여.
힐탄의 숨이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회장을 덮고 있던 어둠이 사라졌다.
하지만 힐탄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앞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 보이는 하노스가 서 있었다.
놀랍게도 힐탄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하노스가 지웠기 때문이다.
하노스는 공주님처럼 잠든 힐탄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슈아아아!
하노스의 몸이 잿빛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그것은 허공에 몇 바퀴쯤 돌다가 힐탄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 순간 힐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힐튼의 몸이 바로 세워지며 지면에 발이 디뎌졌고 힐탄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자신의 몸을 조작하며 말했다.
“과연, 왜 그렇게 건방지나 했더니 인간 놈 주제에 꽤 강인한 육체를 가졌구나.”
다시 눈을 뜬 힐탄은 힐탄이 아니었다.
하노스였다.
힐탄은 사군주를 조작했을 때처럼 죽은 힐탄의 육체를 꼭두각시 삼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힐탄의 검을 주워들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힐탄을 기다리고 있는 부하들이 보였다.
“단장님!”
힐탄의 등장에 한달음에 달려오는 부하들.
모두의 눈빛에 힐탄에 대한 두터운 신망이 서려 있다.
하노스는 그 눈빛들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흐흡!”
“다, 단장님?”
“그래, 내가 단장이지.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야.”
“…네?”
그 순간.
촤아악!
하노스는 검을 휘둘렀다.
힐탄의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부하의 목을 베었다.
다른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단장!”
“왜 이러는 거야!”
“하하, 단장이란다! 단장이란다!”
하노스는 부하들을 모두 베었다.
힐탄의 육체를 점령한 하노스의 무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하노스는 부하들에 이어 멀리 피신한 아이릭의 왕도, 다른 네 왕국의 왕들도 모두 베었다.
병사들 중 일부는 살려 두었다.
그래야지 이 소식을 전할 테니까.
피의 축제를 벌인 하노스가 말 위에 올랐다.
이제는 다크엘프가 말한 아이기스를 죽이러 갈 차례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