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8화
이틀간, 힐탄은 성심성의껏 라핀에 대한 장례를 치러 준 다음 감정을 갈무리하고 본격적인 복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럼 다녀오겠소.”
복수의 첫 걸음.
그것은 다름 아닌 잘린 팔의 재생이었다.
원래는 자신의 부덕함을 평생 새기자는 뜻에서 이대로 살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오지 않았으면 하던 불행이 다시 자신에게 찾아왔고 이젠 그 불행의 고리를 끊기 위해 마음을 새롭게 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 그 어디에도 이미 잘려 사라진 팔을 낫게 해 주는 자는 없다.
그것이 설령 신의 축복을 받은 성녀나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의술사라 할지라도.
하지만 힐탄은 없는 팔을 새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 위해 잠시 왕국을 떠나려고 한 것.
반대가 많았다.
지금 같은 시국에 홀로 다니면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까.
하지만 힐탄이 지금 만나려는 사람은 의심이 많고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자라 어쩔 수 없이 힐탄 혼자 가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어렵게 설득한 끝에 비로소 왕국을 떠나는 날이었다.
“조심하셔야 해요.”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 스승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
아이기스는 그 말에 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힐탄에게 걸어 주었다.
힐탄에게 걸어 준 목걸이.
그것은 일전에 시올라의 부탁으로 북쪽 숲에 나타난 정체 모를 무언가를 가두어둔 펜던트였다.
“이건…?”
“당신의 스승님이 제게 주신 펜던트입니다. 당신이 스승님을 그토록 존경하니 이것을 행운의 부적으로 드리는 거예요.”
힐탄은 그것을 목에 걸었다.
그런 다음 아이기스의 이마에 키스를 해 준 후 왕국을 떠났다.
*힐탄의 움직임이 마치 바람과도 같다.
왕이 군사개혁을 감행하겠다고 했을 때, 힐탄 또한 나라에 이바지하기 위해 다시 검사로서 기량 회복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는 사라진 한쪽 팔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완전히 찾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엇비슷하게나마 재현하는데까진 얼추 성공했다.
힐탄은 달리고 달렸다.
마치 군마처럼 사흘 밤낮을 내리달려 마침내 몽월산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밤.
몽월산에 바람이 분다.
이곳은 때에 따라 달이 두 개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래서 몽월산이라 불리었다.
‘언제 와도 으스스한 곳이군.’
몽월산에는 기이한 소문이 많다.
혼자 들어가면 절대 다시 살아나올 수 없다거나, 몽월산에는 사람의 혼을 잡아먹는 괴물이 산다는 그런 소문들이 말이다.
그러나 힐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조차 벨 수 있는 세상에 그깟 산의 괴담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그리고 힐탄은 몽월산의 비밀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힐탄이 거침없이 몽월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나 했더니 몽월산이었어?”
“저기 동료라도 있나 보지.”
산을 오르는 힐탄을 바라보며 중얼이는 이들.
테라와 팔리오였다.
두 사람은 단장의 명령대로 라핀의 목을 들고 직접 아이릭 왕궁 앞에 들고 가 보란 듯이 효수하고 왔다.
또 근처에 숨어 슬피 우는 힐탄의 얼굴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왕궁으로부터 거리를 물렸다.
물론 거리를 물렸다고 해서 완전히 떠난 건 아니었다.
단장이 말하길, 힐탄이 정말로 슬퍼하고 분노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왕궁을 뛰쳐나올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힐탄은 단장의 말처럼 홀로 왕궁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뒤를 밟았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옛 부하를 만나러 간 길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힐탄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몽월산이었고 테라는 툴툴 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긴 소문도 안 좋은 곳인데 이런 덴 대체 왜 왔대?”
“아까 말했잖아, 부하라도 있나 보지.”
“이런 곳에?”
“무섭냐?”
“무섭긴 개뿔이나.”
테라가 팽 웃으며 말했다.
“살살 뒤를 밟아 보자, 몽월산은 길 잃어버리기 딱 좋은 곳이라니까.”
“무서운 거 맞네.”
“씁, 아니라니까 그러네.”
두 사람이 힐탄을 뒤쫓는다.
*부우…… 부우우……
밤 부엉이 소리.
산을 얼마나 올랐을까?
힐탄은 슬슬 자신이 산에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허나 재밌는 점은 힐탄은 일부러 고립을 유도한 것이라는 것.
그 증거로 아까 전에 나무에 새긴 표식이 산을 한 바퀴 돌고 왔음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힐탄은 하늘을 보았다.
보름달이 뜬 밤.
놀랍게도 달은 두 개였다.
‘시작됐군.’
몽월.
환상의 달.
착시 현상이나 신기루 같은 게 아니었다.
이곳에서 달이 두 개가 보인다는 건 몽월산에 집어삼켜졌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렇기에 준비는 모두 끝났다.
힐탄은 검을 꺼내 자신의 왼 팔뚝에 상처를 냈다. 그러자 후두둑 피가 떨어졌고.
크르르……
어둡기 그지없는 사방 곳곳에서, 간만에 찾아온 외부인의 피 냄새를 맡은 산의 주민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누런 안광들.
동굴 속 박쥐처럼 삽시간에 나타난 그것들은 늑대였다.
정확히는 혼울프.
이마에 뿔이 난 녀석들은 마수들 중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늑대들은 결코 혼자 다니지 않는다.
그건 혼울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럿…… 아니, 어느새 수십 마리로 늘어난 혼울프들을 보며 힐탄은 반가움을 표했다.
달빛이 환하다.
환해진 불빛들이 어둠 속의 혼울프들을 비추며 긴장감을 고조시켰지만 힐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뽑아든 검을 높이 치켜들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화화화화!
힐탄의 검이 달빛만큼이나 밝은 오러를 뿜어낸다.
“와라.”
*얼마나 칼을 휘둘렀을까?
놀랍게도 힐탄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제자리에서 수십 마리에 이르는 몽월산 주민들을 베었다.
그리고 그 수가 막 세 자릿수에 근접하려고 할 때.
쿵! 쿵! 쿵!
‘드디어 나타났군.’
산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나타난 존재는 달빛 한 점 받아들이지 않고 새카만 전신을 뽐냈다.
그때, 놈의 머리 정중앙이 갈라지며 새하얀 눈동자가 나타났고.
슈아아아!
그와 동시에 거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힐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자욱한 흙먼지.
그러나 그 사이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힐탄이었다.
힐탄은 뻗어진 놈의 주먹을 거쳐 팔을 타고 올라와 순식간에 거인의 어깨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러 거인의 목을 베었다.
서걱!
어두운 밤, 하얀 섬광이 일순 빛난다.
그리고 거인의 세상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며 거대한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산을 한 번 더 울렸다.
힐탄은 떨어진 머리 위로 몸을 날려 발끝으로 머리를 박살 내며 착지했다.
그런데 웬 걸.
피와 육편이 튀어야 할 머리 대신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쯤 하고 이제 그만 얼굴을 내비치는 게 어때?”
그때였다.
“쯧, 누군가 했더니 또 네놈이었냐.”
어디선가 사람 말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에서 누군가 선녀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은회색 머리에 날개옷처럼 나풀거리는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사내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름은 이지스.
이지스를 본 힐탄이 반가움을 표한다.
“오랜만이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을 텐데?”
“알아. 하지만 그건 네 소망일뿐, 찾아오지 않겠다고 한 건 아냐.”
“그래서, 왜 왔는데?”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다.”
“부탁?”
이지스의 되물음에 힐탄은 잘린 자신의 왼팔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순간 이지스의 눈이 커지더니 다시 작게 줄어들었다.
“놀랍군. 네 팔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설마 지금 나더러 사라진 네 팔이라도 새로 만들어 달라는 건가?”
“그래.”
“미친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니 널 찾아왔지. 넌 환술사잖아?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이지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환술사였다.
그는 인간이었고 한때는 마법의 길을 걸었던 자였으나 환상 마법의 극의를 깨우치고 난 이후엔 스스로 몽월산에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환상 마법의 극의를 깨우친 이지스는 자신이 가지게 된 힘이 얼마나 위험한 힘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지스를 찾아온 것이다.
이지스가 다루는 환상 마법은, 이지스가 마음먹기만 하면 환상이 실제가 되기도 하니까.
이지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 줄래?”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나?”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힐탄은 진심이었고 이지스 또한 진심이었으니까.
짧은 침묵 끝에 힐탄이 말했다.
“넌 내게 목숨을 한 번 빚졌지. 난 그 값을 받으러 왔을 뿐이다.”
“…….”
말 그대로였다.
과거 테리언 시절, 파르갈은 어느 나라를 야습하기 위하여 몽월산을 지난 적이 있는데 그때, 두 사람은 한 차례 격돌하였으나 끝끝내 힐탄에게 무릎 꿇고 말았다.
이지스가 약한 게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환술사에 마법사였지만 안타깝게도 힐탄이 더 뛰어났을 뿐.
그러나 힐탄은 이지스를 죽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힐탄은 자신의 왕에게 이지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당시에도 이지스를 살려 주며 목숨을 빚 지웠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장애물을 제압했으니 그저 군사를 이끌고 유유히 지나갔을 뿐.
“그땐 요구하지도 않던 걸 이제 와서 요구한다고?”
“이제는 지켜야 될 것들이 바뀌었거든.”
“흥, 예나 지금이나 낭만 넘치는 소리만 해 대는구만.”
“부탁하마.”
“…….”
힐탄은 결코 협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지스도 힐탄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저런 심성을 가진 놈인데 어찌 모른 체 할 수가 있을까.
“…이번 한 번만이다.”
“충분해.”
힐탄의 대답에 이지스가 자신의 커다란 지팡이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자 꽃가루 같은 은빛이 사방을 가득 메웠고 그 사이에서 이지스가 신령처럼 말했다.
“몽월산에서 달이 두 개로 보이는 이유는 이곳이 내가 만든 환상 속 세상과 현실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 이곳에선 어떻게 마음먹고 믿느냐에 따라 진짜도 가짜가 될 수 있고 가짜도 진짜가 될 수 있지.”
이지스가 힐탄의 빈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건 네놈의 마음가짐이다. 넌 비록 바깥 현실에서 팔이 잘린 채로 내게 왔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진짜 팔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 믿어라. 넌 사실 팔이 잘린 게 아닌 아주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나쁜 꿈…….”
“원하는 것들을 네 스스로에게 속삭여라. 빌어라, 세뇌시켜라. 그럼 넌 네가 생각하는 진짜 네 모습을 가질 수 있을 테니.”
그 말에 힐탄은 텅 빈 자신의 손을 바라보더니 흐린 눈을 하고서 깊은 집중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화아아아!
빛의 파도가 두 사람을 덮쳤고.
빛이 다시 저물었을 때.
꼼지락-
놀랍게도 힐탄은 늙수그레한 외팔 검사의 모습이 아닌, 그 옛날, 테리언의 전성기 시절. 파르갈의 단장이었을 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두 팔이 온전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