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7화
바야흐로 아이릭은 태평성대를 맞이하며 황금기라고도 할 수 있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모든 건 아이기스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토벌에 다녀왔습니다.”
“고생했소, 장군.”
군사개혁을 실시한 아이릭이 편제를 완성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도심지의 확장이었다.
몬스터 때문에 함부로 확장하지 못했던 인간들의 영역을 단순히 영토의 개념으로만 두지 않고 상업적으로 이용키 위해 서서히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 것.
좋은 순환이었다.
용병과 기사들의 시대가 도래하자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은 점점 줄어 가고 거기서 나온 부산물로 상업과 각종 산업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아이릭의 규모는 점점 그 세를 불려 나가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강국의 반열에 들기 시작한 것.
모두가 만족하는 황금기였다.
하지만 그런 황금기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노스였다.
질투와 복수의 신인 하노스는 시올라가 보았던 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철저하고 분석적인 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징이 상징이니 만큼 따로 사제나 화신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모든 걸 눈으로 보고 계산했다.
그렇기에 신중하게 행동했다.
이번 일은,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펄럭!
매일 같이 아이릭을 지켜보던 하노스가 드디어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파르갈의 단장이 아이릭의 사위가 되다니요!”
“그는 전쟁 범죄자요! 그러니 절대로 이 일을 그냥 넘겨선 아니되오.”
“힘을 합쳐 얼른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군주회.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모임 이름처럼 일국의 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자신들의 분야에서 한 자리씩 하는 이들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들은 현재의 권세에 만족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은 과거에 더 잘나갔으니까.
이제는 사라져 버린 옛 제국, 테리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1군주가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아이릭의 권세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소.”
“맞습니다. 이게 다 파르갈의 단장인 힐탄 그놈이 합류하고 부터요.”
“불길합니다.”
“설마 힐탄 그놈이 이제라도 복수를 준비하는 건 아니겠지요?”
4군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교차했다.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반성하는 척 초야에 묻혀 살았던 놈이 이제 와서 여자에 미친 척 고개를 내밀었다는 것 자체가 수상했다.
“확실히 수상합니다. 여자 때문에 나온 놈치곤 여자도 너무 쉽게 버렸고.”
“연막작전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심지어 스승인 검성과도 만나지 않았습니까.”
“검성의 행방은 아직입니까?”
“오리무중입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수상합니다. 아이릭에 숨어 힐탄 그놈을 돕고 있는 게 아닐까요?”
“으음,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진실을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교차한다.
그런 다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준비가 시작되었다.
*“퉷. 그놈 명줄 한 번 더럽게 질기네.”
침을 뱉은 이.
대륙 최강의 용병부대라 불리는 슈리오의 칼잡이 중 하나인 테라였다.
그 말에 창잡이 팔리오가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파르갈의 부단장이었던 놈인데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그런가?”
“그렇지.”
“그나저나 파르갈도 다 옛날 말이네. 다들 벌벌 떨면서 말하길래 얼마나 난놈인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잖아?”
파르갈의 부단장, 라핀.
라핀은 아이기스를 보낸 후에도 계속해서 팔라디움에서 살았다.
팔라디움은 그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각오는 되어 있었다.
이미 한번 노출된 위치.
이후에도 간간히 암살자들이 찾아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암살자들이 찾아오지 않았고 이젠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허나 착각이었다.
라핀은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 속에서 비단처럼 퍼진 자신의 핏물을 보았다.
‘단장님…….’
어둠 속에 퍼진 핏물에 무서운 미래가 보였다.
그건 미래일까?
아님 자신의 공포가 만들어 낸 환상일까.
바람 따라 들려온 소식으로는 이젠 완연한 행복을 찾으셨다고 들었건만.
“그럼 이제 대가리 잘라.”
“오케이.”
서걱!
라핀의 머리가 비단 위로 구른다.
*“옛 부하들을 다시 모아도 되냐고?”
“예, 폐하.”
“흐음.”
힐탄의 말에 왕은 고민했다.
현자의 정체가 그 테리언의 최강자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그가 가진 숱한 오명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었지만 결국 딸을 위해 그를 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대장군이라는 자리를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아이릭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고 강하게 성장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위로서 도움을 받은 것뿐이지 그가 파르갈의 단장이란 사실을 알아서 일부러 도움을 바란 건 아니었다.
물론 힐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별다른 잡음 없이 평화로이 각자 할일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오늘, 그 조용하고 성실하던 사위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 온 것이다.
“으음.”
쉽게 결정내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진짜 전쟁 범죄자가 아니란 건 안다.
그들은 그저 왕에게 충성하는 충직한 기사들이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전쟁범죄 재판에서도 무혐의를 받은 것이고.
하지만 충직한 칼날이었다고는 하나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원한을 샀다.
사위도 그걸 알기에 초야에 박혀 살았던 것이고.
그렇기에 사위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먼저 꺼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왕이 물었다.
“이유가 뭔가?”
“다 함께 속죄하고 싶습니다.”
“속죄?”
“저 혼자서만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부하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저흰 함께했고 같은 죄를 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고 녀석들만 숨어 살고 있으니 한때 그들을 이끌었던 자로서 도리에 맞지 않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렇군.”
의도는 좋다.
의도는.
하지만 세상은 의도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왕이 얼마간 고민하던 끝에 물었다.
“대장군.”
“예, 폐하.”
“내게 이런 말을 하기 전에 충분히 고민은 했겠지?”
“예, 폐하.”
“파르갈이 다시 모이면 세상이 그대들을 어떻게 볼지도?”
“…예, 폐하.”
“대장군은 이제 나의 사람이니 나는 대장군을 이해할 수 있네. 사위니까. 하지만 나와 내 왕국민들은 그렇다 쳐도 그대들을 불편하게 여길 세상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설득할 생각인가?”
“그건…….”
그때였다.
“폐, 폐하!”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신하 하나.
숨이 턱까지 차오른 게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아, 아무래도 직접 한번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직접?”
그 말에 왕과 힐탄은 신하의 안내를 받아 왕궁 바깥으로 향했다.
그곳엔 웬 머리 하나가 장대에 꽂혀 효시되어 있었는데 그 끔찍한 광경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무슨…….”
그때였다.
“아……!”
왕이 혐오감을 드러내려 할 때 옆에 선 힐탄이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몸을 떨었다.
“대장군, 왜 그런가?”
“아… 아…….”
왕의 물음에도 힐탄은 미친 사람처럼 효시된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
터벅.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의 다리가 몹시도 흔들렸다.
그리고 효시된 목 앞에 도착했을 때, 힐탄은 떨리는 손으로 효시된 목을 받쳐 안아 품에 안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그때, 뒤늦게 소식을 접한 아이기스가 궁녀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이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아이기스 또한 너무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라, 라…… 라핀 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힐탄의 품에 안겨 있는 목.
그것은 다름 아닌 한때 파르갈의 부단장이자 힐탄의 부관이었던 라핀의 목이었다.
“라핀?”
그러나 여기 있는 자들 중 라핀을 아는 이는 아이기스와 힐탄뿐이었다.
힐탄은 시퍼렇게 죽은 라핀의 목을 끌어안고서 떨었다.
눈물을 흘렸고 한참 동안이나 라핀의 죽음을 슬퍼하더니 그의 머리를 품에 꼭 안고서 왕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대장군! 왜 그러는가. 그자가 대체 누구길래 이러는 거야?”
그 물음에 라핀이 힘겹게 대답했다.
“…폐하, 이자는 한때 제 부관이었던 자였습니다.”
부관.
그 말에 사람들은 그제서야 술렁이기 시작했고 힐탄은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아까 제 부하들을 다시 모아 속죄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랬었지.”
“저는 그 말이 진심이었습니다. 허나 이젠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왕은 대답하지 않았고 힐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속죄를 하고 초야에 묻혀 살아도 그들의 증오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저희들이 죽어야지만 이 악연의 굴레를 끊을 수만 있다면 저는 차라리 죽겠습니다. 허나!”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힐탄의 두 눈이 벌게졌다. 마치 피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힐탄이 메이는 목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이제 함부로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저는 공주님께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 공주님을 버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말을 잇던 힐탄이 머리를 숙여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저는 이제 그들에게 사죄하지 않겠습니다……! 죽더라도 그들과 끝까지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제 부하들을 모아 저희에게 씐 무거운 족쇄를 끊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힐탄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아이릭이라는 안전한 가옥 안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죽어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되면 그건 더 이상 가옥이 아닌 스스로를 옭죄는 감옥이 될 것만 같았다.
힐탄은 이마에 붙인 채 머리를 들지 않았다.
그것을 본 신하들은 침묵했고 아이기스는 입술을 깨문 채 왕만 바라보았다.
왕의 표정이 어둡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푸르다.
요즘 아이릭의 날씨는 참 좋았다.
나라는 평화로웠고 곳곳에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가 울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기는 사람이.
그때, 이름 모를 새가 지평선 너머로 저 멀리 날아간다.
왕은 새의 뒷모습을 쫓던 끝에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모두들 들어라.”
“예, 폐하!”
“누군가 감히 내 사위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이것은 사위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비롯한 내 나라 아이릭의 권위를 업신여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은 주위를 둘러싼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 나에게 벌어진 일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현 시간부로 어떤 놈이 감히 내게 이런 짓거릴 했는지 반드시 찾아내어 일벌백계할 것이다. 내 의사에 반하는 자가 있는가!”
“없사옵니다, 폐하!”
“상대가 그 누구든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내 나라 아이릭을 부강하게 만든 것이니!”
라핀의 죽음.
그것은 왕과 힐탄의 뜻을 하나로 합하고 거대한 전쟁에 불을 붙이는 신호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