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6화
아이기스와 힐탄.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할 수 있었다.
왕은 음유시인들을 풀어 왕국 전역에 그동안 아이기스가 겪은 것들에 대해 노래하게 했고.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왕국민들은 아이기스를 가여워하며 다시 아이기스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아이기스와 힐탄은 모두의 축복 아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두 번 다시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나라, 아이릭을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본격적인 군사개혁이 시작된 것이.
왕은 자신의 나라를 철혈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결연했고 그 옛날, 이제는 사라진 제국 테리언 시대의 지식을 가진 사위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군사력을 키워 나갔다.
망설임은 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이 돌아왔고 병석에만 누워 있던 아내가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났으니까.
또한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서로 간에 평화 조약을 맺은 상태이니 지금만큼 군사력을 키우기도 적절한 시기가 없었다.
왕은 국방력 증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그 어떤 차별도 두지 않았고 관리나 귀족 중에 횡령이나 국방력 증대에 방해가 되는 자가 있으면 일벌백계 하여 모두에게 모범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아이릭의 국내 정서가 그 옛날, 용사가 유행이었던 시절처럼 이제는 군인으로 입신양명하는 것을 최고로 삼을 만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모두가 행복해했다.
지도자는 청렴하고 올바르며 백성들은 그런 지도자를 믿고 자신의 모든 걸 바쳐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해 주었으니까.
특히 아이기스가 가장 행복해했다.
아이기스가 이제는 신랑이 된 현자, 힐탄의 품에 안겨 속삭였다.
“여보, 저는 요즘이 정말 꿈만 같아요.”
“나도 그렇습니다.”
“부디 이 행복이 깨지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너무 행복해서 도리어 걱정됐다.
아이기스는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일상의 행복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아이기스의 걱정에 힐탄이 그녀를 쓰다듬어 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질 테니.”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 행복과 안심이 가득했다.
*대륙 어딘가.
그곳은 인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협곡 어딘가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그곳은 이따금씩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외엔 어둠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누군가 찾아왔다.
그들은 길을 잃은 방랑자 따위가 아닌, 손님들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뚜렷한 목적을 가진.
어둠 속, 금빛 눈동자가 어둠을 꿰뚫는다.
안광의 주인은 다름 아닌 시올라였다.
그녀는 자신의 직속대와 함께 어둠뿐인 동굴 내부를 살피더니 이내 곧 미소 지으며 안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그녀에게 어둠은 아무런 장애 요소가 되지 않았다.
이름 자체가 다크엘프들인 그녀들에게 있어 어둠은 친구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사람이라면 이동조차 힘들 울퉁불퉁한 동굴 내부를, 시올라와 직속대는 도둑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잘도 넘어갔고.
마침내 불친절한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햇볕 한 점 없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창문처럼 나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천공 덕분에 푸르른 달빛이 그 내부를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달빛이 가득한 그곳의 중심에는 자연의 신비인지, 아님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를 기괴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주인 모를 제단이 하나 있었다.
주인 모를 제단.
허나 시올라는 이 제단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시올라는 제단 위에 펜던트 하나를 올렸다.
그것은 보석으로 세공된 아주 아리따운 펜던트였는데, 무려 미의 여신 로나스가 손수 시올라에게 준 자신의 증표이기도 했다.
로나스의 증표가 제단 위에 놓인 순간, 얼마 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미약한 진동.
동굴 전체에서 나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떨리는 사내의 어깨처럼, 동굴은 그렇게 울었다.
덕분에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박쥐들이 쥐 울음 같은 소리와 날개 퍼덕이는 소리를 내며 달빛 속에 사라졌다가 흩어졌다.
그리고 그 부산스러운 과정들이 모두 끝났을 때, 예술품 같았던 제단 위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웬 장신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
긴 흑발.
흰자위 대신 검은 바탕에 붉은 눈동자.
머리에 난 두 개의 붉은색 뿔.
마지막으로 잿빛 날개와 빈자들이 입을 법한 넝마에 가까운 옷.
제대로 찾아온 게 맞았다.
그는 바로 질투와 복수의 신, ‘하노스’였다.
하노스는 네잎 클로버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꿈결 같은 눈빛으로 로나스의 펜던트를 어루만지며 취해 있었다.
시올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충분히 로나스의 펜던트를 음미할 수 있도록 그림자 속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천천히 펜던트를 품에 집어넣으며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하아아아…….”
듣는 이에 따라 꽤나 소름 끼칠 법한 소리.
허나 시올라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충분히 다 즐기셨습니까?”
-아직 좀 더 즐기고 싶지만 손님을 계속 세워 두는 것도 예의는 아닐 것 같아서 말이지.
로나스와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하노스의 목소리.
신들의 목소리란 으레 그런 것이었는데 분노가 가득 느껴지던 로나스 때와는 달리, 하노스의 목소리는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을 끼치게 하는 징그러운 무언가가 있었다.
허나 그랬기에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토록 음침하고 께름칙하며 근원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힘이 있는 신은 하노스를 비롯하여 몇 없었으니까.
시올라의 말이 이어졌다.
“로나스 님의 말씀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그녀의 말을?
“예, 그렇습니다.”
-재밌군. 하지만 넌 다크엘프잖아? 귀쟁이들은 모시는 신이 따로 있는 걸로 아는데 말이지…… 설령 그게 다른 엘프들에게 배척받는 다크엘프라고 할지언정 말이야.
하노스는 말을 이으며 동굴과 종유석의 예술품 같은 제단을 의자 삼아 앉았다.
그리곤 어느 불길한 세상의 마왕 같은 포즈로 시올라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무슨 꿍꿍이지, 까만 귀쟁이?
까만 귀쟁이.
말이란 건 언급하는 이에 따라 그 의미와 의도가 다르다곤 하지만 엘프에게 있어 귀쟁이라는 말과, 더욱이 다크엘프에게 있어 까만 귀쟁이란 말은 명백한 멸칭이 맞았다.
당연했다.
로나스와 하노스 같은 신들은 모두 다 인간들의 믿음으로 인해 태어난 신.
자신의 신도가 될 일도, 자신들을 믿지도 찬양하지도 않는 이종족인을 살가이 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올라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질투와 복수의 신답네, 라고 생각하며 비지니스적인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얼마 전, 로나스 님의 신전이 파괴당했다는 걸 아십니까?”
-…뭐?
짧은 반응.
고작해야 한 음절이었으나 그 말 안에는 하노스가 얼마나 놀랐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당연했다.
하노스에게 있어 로나스는 멀리서 바라만 보던, 감히 추파조차 던질 생각을 못한 짝사랑의 존재였으니까.
“신전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로나스 님은 그 존재감이 몹시도 미력해지셔서 다른 존재들의 손이 닿지 않는 아주 조용한 곳에 숨어 힘을 회복 중에 계십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떨리는 진동.
처음에 느꼈던 자그마한 진동과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지진과도 같았는데 그만큼 하노스가 분노하였기 때문이다.
하노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누가……! 누가 감히……! 누가 감히 내 사랑스러운 로나스에게 그런 짓을……! 절대…! 절대로 용서치 않은 것이다…! 절대로……!
과연.
로나스를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다더니 그 수준이 거의 광기에 가깝군.
그래서 더 좋았다.
로나스의 말마따나, 저정도 수준의 광기라면 하노스는 로나스를 위해 반드시 복수를 이행해 줄 테니까.
하노스가 시올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냐! 감히 어떤 찢어죽일 놈이 내 로나스에게 그딴 짓거리를 한 것이냐! 신이더냐! 드래곤이더냐! 아님……!
“인간입니다.”
-……뭐?
순간 동굴의 떨림이 멈췄다.
분노는 분명 들끓었지만 시올라의 대답이 상상 이상으로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소행입니다. 정확히는 인간들 중 최강의 검이라 불리는 존재가 로나스 님을 그리 만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무리 인간들 중에 아무리 강하다 할지언정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다! 그런데 어떻게 한낱 인간 따위가 초월적 존재인 우리를……!
“영혼을 바쳤습니다. 그자는.”
-뭐?
시올라는 검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에 대해.
그 과정에서 그 옛날 자신들의 마을이 날아갈 뻔했던 이야기도 자존심 아랑곳 않고 모두 해 주었고 그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엔……
-……이루지도 못할 사랑 때문에 그짓거릴 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하물며 인간 주제에 미의 여신이라 칭송받는 년 때문에?
“예, 그렇습니다.”
-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검성이 왜 로나스에게 검을 휘둘렀는지, 그리고 로나스가 왜 그런 공격을 당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말해 주었다.
물론 그 이야기에서 봉혼검은 언급되었지만 그 봉혼검을 자신이 주었다는 말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건 로나스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으니까.
시올라의 말을 들은 하노스는 예상대로 광소를 터뜨리더니 끝없는 분노를 표출했고.
만약 마법으로 보호막을 두르지 않았다면 고막이 터지고 떨어지는 종유석에 맞아 큰 상처를 입을 뻔하였다.
하노스의 폭주……
어찌 보면 단순한 화풀이였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 겨우 진정을 다 잡은 하노스가 말했다.
-네년도 참 맹랑한 년이구나, 사랑도 질투도 아닌 주제에 단지 존경과 동정심만으로 그런 일을 로나스에게 제안하다니.
시올라는 로나스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숨기지 않고 말해 주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로나스가 아닌, 자신의 온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기다 분노까지 더해진 하노스였다.
하노스가 귀신같은 눈빛으로 시올라를 꿰뚫어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난 네 말을 믿지 않아. 왜냐면 너한테선 아주 깊은 복수의 향기가 느껴지거든. 네년은 나름대로 감정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복수의 신이다. 네 안에 복수심이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절대로 내 앞에선 숨기지 못해.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윽고 하노스가 그녀에게서 고개를 떼어 내며 말했다.
-하지만 상관없지. 네년의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건 내게 중요한 바가 아니니까. 가서 로나스에게 전해라. 내가 당신을 위해 머저리 같은 인간들에게 복수의 단죄를 내려주겠다고 말이야.
“로나스 님과는…… 거래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거래? 크하하하핫!
거래라는 말에 하노스가 웃는다.
-거래로 얻어 낸 사랑이 과연 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니 한 번만 더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지껄이면 네년의 귀를 모조리 뜯어먹어 주지.
“제가 실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가서 로나스에게 전해. 복수는 지금부터 시작되었다고.
펄럭!
말을 마친 하노스가 잿빛 날개를 퍼덕이며 달빛을 쏟아 내는 천장의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