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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512화 (512/522)

# 외전. 15화

얼마간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다름 아닌 로나스 쪽이었다.

-그래서, 이유가 뭐지?

“드디어 말씀하실 기분이 되셨나 보네요?”

-시끄럽고 용건만 말해.

“그냥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개인적인 감정?

“검성이라 불리던 남자가 우리 일족에게 한 짓을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죽음으로써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되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원한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감정?

“저는 그에게 원한과 동시에 존경의 감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저희 모두가 덤벼도 어쩌지 못할 강함을 가진 것에 대한 존경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를 위해 그의 제자를 죽이려 합니다.”

로나스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몇 번인가 곱씹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지금 네가 말하는 감정은 동정심인 것이냐?

“후훗,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저는 그를 존경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걸 희생했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행복은 얻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그놈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오지랖이 과해.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원하는 사랑을 지켰으면 그건 그것대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정말로 그를 존경한다면?

“으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아닐까요?”

-뭐?

“엘프는 엘프들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니 훈수는 받지 않겠어요. 이건 주고받음이 확실한 거래니까요.”

-무섭군.

“상관없어요. 전 저만의 방식으로 그를 위해 움직일 겁니다. 힐탄을 죽이는 건 그 시작이 될 테고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건가?

“물론이죠. 전 그의 제자뿐만이 아니라 그 여자 또한 그 누구와도 사랑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래야 공평하죠.”

그 말에 로나스는 약간의 혐오감까지 느꼈다.

아무리 이종족간에 문화 차이가 있고 사고방식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로나스의 입장에서 저것은 그저 ‘광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로나스가 물었다.

-혹시 그를 사랑했었던 건가?

그 물음에 시올라가 재밌다는 듯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하핫! 사랑이요? 천만에요, 제가 아무리 그를 존경한다 할지언정 사랑까진 하지 않습니다. 존경과 사랑은 전혀 다른 감정이니까요.”

그 말에 로나스가 다시 한번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더 이상은 말을 아끼는 게 좋겠군. 어쨌든 내 입장에선 전부 다 복수 대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요, 그래요. 서로 원하는 것을 취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혹시 제가 추가로 더 도울 것이라도?”

-하노스를 만나고 싶다.

“하노스라면?”

-복수와 질투의 신. 그의 도움이 있어야 네 부탁과 내 복수를 동시에 할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시올라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복수와 질투의 신, 하노스가 미의 여신 로나스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건 대륙적으로도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확실히 그분이 있다면 가능하겠군요. 좋아요. 대신 말을 전해 줄 테니 증표를 주세요. 제가 당신이 보낸 전령이라는.”

로나스는 파괴된 신전 어딘가에 묻혀 있는 자신의 성물을 영력으로 꺼내 시올라에게 주었다.

시올라가 그것을 받으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흥.

시올라가 폐허가 된 미의 신전을 벗어난다.

멀어져 가는 시올라를 보며 로나스가 중얼거렸다.

-미친년…….

*아이기스를 안고 도망치던 힐탄은 사람 사는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야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힐탄이 아이기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먼저 가시지요, 공주님.”

“예? 힐탄 님은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생각해 봤지만 역시 돌아가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이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요.”

그럴만했다.

상대는 무려 신이었으니까.

그렇게 떠나려는 힐탄을, 아이기스는 잠시 머뭇거리던 끝에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왜 그러십니까?”

“그…… 안 가시면 안 될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힐탄이 미간을 좁히자 아이기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솔직히 저는 두렵습니다. 검성님은 분명 강한 분이시지만 만약 그분이 신에게 살해당했고 검성님의 안위를 확인하러 간 힐탄 님마저 신에게 해를 입는다면…… 저에겐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공주님,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제가 참 이기적이라는 걸요. 하지만 힐탄 님. 만약 그런 식으로 당신마저 죽어 버린다면 검성님은 자신의 목숨을 헛되이 쓰게 된 게 아닙니까?”

“…….”

아이기스의 말을 들은 힐탄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긴 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보통의 존재라면 모를까.

무려 신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의 경우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결코 가벼이 여겨선 안 됐다.

그 작은 가능성 때문에 자신이 죽기라도 한다면, 아이기스의 말마따나 그동안의 긴긴 여정이 모두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테니까.

“…….”

힐탄은 침묵했다.

오랫동안 침묵하며 장고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기운 방향은 아이기스가 있는 곳이었다.

아이기스는 여전히 힐탄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닻이 되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힐탄이라는 배를 무겁게 지탱해 주었다.

사랑.

이 모든 건 자신의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벌어진 일.

적어도 힐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더러운 과거 때문에 이미 한 번 공주를 버린 적이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공주만 놔두고 홀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건 공주를 두 번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힐탄의 몸이 가늘게 떨었다.

그의 결심은 이제 공주에게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렇기에 슬펐다.

하나를 얻기 위해선 하나를 포기해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부모와도 같은 스승.

힐탄의 눈에 눈물이 흘러 턱 아래로 떨어진다.

“힐탄 님…….”

아이기스는 그런 힐탄을 꼬옥 안아 주었다. 그의 눈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았기에.

힐탄을 안아 준 아이기스는 가늘게 떨고 있는 힐탄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두 사람은 다시 아이기스의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폐, 폐하!”

“무슨 일이지?”

“그, 그게! 고, 공주님께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뭐라고?!”

현자와 공주가 떠난 이후, 왕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차츰차츰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아이기스의 가족들은 슬픔에 잠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지도자이자 리더로서 개인의 아픔 보단 왕국과 백성들을 더 위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으로 키운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과.

그런 자식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죄책감은 좀처럼 이겨 낼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왕비가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슬픔 속에 살았던 왕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위어 갔고 툭하면 혼절했다.

의사들은 왕비가 마음의 병을 얻어 저러는 것이라 치료할 방도가 없다고 했다.

왕은 슬펐지만 자신마저 쓰러질 순 없었기에 슬픔을 꾹 참으며 속이 썩어문드러져 가도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그렇게 슬픔이 지속되던 나날, 그때 갑자기 공주가 돌아온 것이다.

“내 딸! 아이기스야!”

왕은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왕국의 안정을 얻은 대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두 여자를 잃을 뻔했다.

왕은 자신이 왕이기 전에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남자로서 그 사실들이 무척이나 두려웠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주가 돌아왔으니 희망의 등불이 강림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과연.

바깥에는 자신의 딸, 아이기스 공주가 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전혀 뜻밖의 인물도 함께 하고 있었다.

“저자는…….”

한때 단신의 몸으로 왕국 전역을 하나로 합쳤던 현자라고 불리던 남자, 힐탄이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왜?

왕은 그를 곱지 않은 눈빛으로 보았다.

그도 그럴 게 왕국의 백성들은 그를 현자 혹은 구도자라고 불렀지만 아이기스의 아비되는 왕으로서는 그가 공주를 마녀로 몰았던 파렴치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한때는 그가 공주를 독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딸을 마녀로 몬 것이라고 의심까지 했었다.

왕은 심경이 복잡했으나 일단 두 사람을 맞이했다.

사정이 무엇이 됐든 우선은 자초지종부터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뒤늦게 소식을 접한 왕비도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아픈 몸을 이끌고 공주가 있는 곳으로 왔다.

“내 딸! 내 딸, 아이기스야!”

뒤늦게 나타난 왕비는 신하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발견하자마자 아이기스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마치 죄인이 고해성사를 하듯, 왕비는 그동안의 죄악한 감정을 고백하며 참 서럽게도 울었다.

“아이기스야… 내 딸 아이기스야…… 내가 그동안 너를… 내가 너를…….”

“어머니…….”

어머니의 절절한 울음과 가슴에서 우러나는 죄책감의 고백에 아이기스도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비난할 수 없었다.

종국엔 왕조차도 고개를 떨어뜨리며 울었다.

힐탄은 뒤늦은 죄악감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을 때, 아이기스는 그제서야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모두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왕족과 신하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두 귀로 듣고도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전부 사실이었고 힐탄의 잘린 손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회장의 모든 이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현자의 정체가 파르갈이라는 것과 전설 속의 검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흑막이 미의 여신 로나스였다니.

“그래서…… 로나스는 그럼 완전히 죽인 것이냐?”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니?”

“검성님이 저희만 먼저 탈출시켜 주셨기 때문에 저희는 그 싸움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중간에 힐탄 님이 되돌아가 확인하려고 하셨지만 제가 말렸습니다. 힐탄 님마저 잃게 될까 두려워서요.”

깊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모두들 아이기스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혹여 정말 그분이 이기셨다면 언젠간 돌아오시겠지.”

“신이 분노하여 그들의 종이 찾아온다면 실패하게 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왕은 잠시 고민한 끝에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부턴 군대를 키워야 되겠구나. 멍청한 신에게 더 이상은 농락되지 않아도 될 만큼 강력한 군대를 키워야 되겠어.”

그 말에 신하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며 왕의 말에 동의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폐하.”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폐하.”

신하들의 지지에 힘입은 왕이 더더욱 비장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 아이릭 왕국은 이제부터 철혈군대로 명성을 드높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러한 비극을 반복되게 하지 않게 할 것이다.”

왕의 선언.

그것이 철혈강국 아이릭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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