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2화
말 그대로였다.
마치 흑막처럼 웃는 베로키의 웃음은 너무나도 당당하여 순간 협객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검성이 웃으며 말했다.
“당당해서 좋군. 혹시 미친 건가?”
“저 같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그런 말은 실례입니다.”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나?”
날카로운 살기.
검을 빼어 들지 않았지만 베로키는 순간 자신의 턱밑으로 칼이 들어온 줄로만 알았다.
그럼에도 베로키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예법을 모르는 자군요. 아이기스를 살리려고 온 게 아니었나요?”
“흠.”
그 말에 검성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서걱!
베로키의 팔을 베었다.
푸슈슛!
동시에 베여진 단면으로부터 핏물이 뿜어졌다.
핏물이 뿜어지기까지 고통이 없었다.
그만큼 검성의 칼질은 극의에 달해 있었으니까.
자신의 팔이 잘렸다는 걸 인지했을 때, 베로키는 그제서야 몰려오는 고통에 단면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끄으윽!!”
“베로키 님!”
“주사제 님!”
놀란 사제들이 일제히 베로키를 외친다.
동시에 검성은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며 말했다.
“들어주기 역겹군. 저주는 너희가 걸어 놓고 왜 나한테 예법을 운운하는 거지?”
“크윽! 공주를 구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구하고 싶다. 하지만 고개 숙여 구걸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라서 말이야.”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분명 몇십 발자국이나 멀리 떨어져 있던 검성이 순식간에 베로키의 눈앞에 나타나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자신감?”
“어, 어떻게?”
“놀랐나? 이런 움직임은 내게 일도 아니지. 보아 하니 고위 마법사 같은데 입도 벙긋하기 전에 혀가 잘리고 싶다면 얌전히 구는 게 좋을 거야.”
“…….”
베로키는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였다.
특히 영창 속도가 빨라 마법사들 간의 결투는 물론 칼잡이들과의 싸움에서도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외부에서 일어난 싸움을 보고 메모라이즈해 둔 마법 몇 개도 세팅한 채로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제아무리 소문 속의 검성이라 할지라도 마탑 몇 개의 간판을 뜯어 버린 자신이라면 제아무리 검성이라 할지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검성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벌어지는 입보다도 빨랐고 핏물이 몸을 적시기 전에는 고통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했다.
하물며 분명 눈앞에 있었음에도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보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아.
이자는 진짜구나.
어쩌면 자신은 스스로의 실력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반성까지 들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미의 사제들은 외모와 능력만큼이나 머리도 똑똑해야 했고 그녀는 그런 사제들 중에 최고 사제였으니까.
그래서 준비한 수가 공주의 목숨이었다.
삼류 악당 같아 보이긴 했지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의 앞에 서서 그림자를 만들었을 때 베로키는 그게 잘못된 가정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검성은 모든 것이 자신의 예상 범위 밖이었다.
거대한 벽.
마치 초월체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었다.
만약 공주를 데리고 협박한다면 자신에겐 끔찍한 미래가 남아 있으리란 걸……
“이제야 표정이 좀 볼만해졌군.”
검성은 초점 잃은 베로키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런 다음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공주에게 접근한 마녀가 누구지?”
“……그건.”
그 순간.
서걱!
검성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쿵!
그러자 신전 지붕의 끝 모퉁이가 잘려 나가며 하얀 대리석 일부분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답이 느려 터졌군. 한 번만 더 답답하게 굴면 다음번엔 신전 전체를 베겠다.”
“저, 저예요! 제가 그랬어요!”
그때, 사제들 무리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이름 모를 사제는 다른 사제들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그녀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무리에서 나와 손을 들었다.
“접니다! 제가 보름달이 뜨는 날 밤, 아이기스 공주를 찾아가 저주를 내렸습니다!”
검성은 그런 사제를 얼마간 바라보더니 다시 베로키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상하군.”
검성이 눈을 좁히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일개 사제인데 대체 무슨 저주를 내린 거지? 주사제인 네년도 끽해야 마법사처럼 보이는데 너보다 약해 빠진 저 여자가 무슨 저주를 내렸단 말이냐?”
그 말에 베로키가 힘겹게 대답했다.
“저주는…… 내리지 않았다.”
“뭐?”
“우린 그저 로나스 님을 모시는 사제들일뿐, 마녀 같은 게 아니다. 단지 마녀를 사칭하여 그럴 듯한 혼란을 조성했을 뿐.”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우리들은 신의 사제지 사람의 운명을 주무르는 힘 따윈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조금 이용했지. 잘 생각해 봐라, 저주가 내려졌다고 해서 너희들의 그녀가 어디 몸 한번 아픈 적이 있었던가? 나라에 기근이 내린 적이 있었던가?”
그때였다.
거리를 벌렸던 아이기스와 힐탄이 가까이 다가온 건.
아이기스는 어느덧 후드를 벗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
아이기스를 본 베로키가 말했다.
“과연 아이기스 공주, 명성대로 정말 아름답군. 하지만 너의 그 외모가 신의 분노를 사게 했어.”
그 말에 아이기스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거죠?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전 저를 아름답게 태어나게 해 주신 로나스 님께 감사의 기도도 드렸다구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냐. 넌 너무 오만했어. 사람들이 로나스 님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고 모두가 너를 새로운 미의 여신이라고 칭송할 때 네가 정말로 로나스 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자들을 그냥 두어선 안 되었어.”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내 나라의 백성들이었어요. 그들의 사랑을 내가 어찌 막을 수가 있겠어요!”
“아니. 넌 기회가 있었어. 우리가 마녀의 탈을 쓰고 직접 경고까지 했을 때, 넌 사람들을 설득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반기를 들었지. 그게 정녕 로나스 님을 존경하는 자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흰소리! 난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뿐, 당신처럼 로나스를 떠받드는 자가 아니야!”
“떠받든다라…… 세상에 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모르는군. 생각보다 더 어리석은 자였어.”
베로키가 입꼬리를 광대까지 올리며 말했다.
“마녀의 단서를 찾아 여기까지 온 건 칭찬해 줄게. 하지만 우리를 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 인생은 네가 짓밟은 거야. 봐봐, 너에게 눈이 멀어 세상에 나와선 안 될 녀석까지 세상에 나와 버렸잖아?”
베로키의 시선은 힐탄에게 가 있었다.
그녀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잘린 힐탄의 팔을 안타깝다는 듯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베로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이 아닌 존재는 설사 신에 준하는 무언가를 가졌더라도 반드시 겸손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닥칠 거대한 운명의 굴레를 절대로 소화시킬 수 없을 테니까.”
“할 말은 그게 끝인가?”
“뭐?”
서걱!
베로키의 목에 새하얀 일자 선이 그어졌다.
검성이 검으로 그려 낸 선이었다.
이윽고 베로키의 목이 뒤로 떨어졌고 그녀의 목에서 분수 같은 핏물이 뿜어졌다.
동시에 베로키의 무릎이 꿇어졌고 검성은 그녀의 가슴을 발로 차 뒤로 넘어뜨렸다.
검성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공주에게 내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계속 듣고 있자니 너무 역겨워서 말이지요.”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보입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이자의 말은 전부 진실인 것 같으니까요. 그것과 더불어 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이자들이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네?”
“동감입니다, 공주님.”
검성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나온 건 힐탄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습니다. 다들 공주님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광신도들처럼 마녀사냥을 시작했고 그것이 왕국이 쇠락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공주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 생각했던 거고요.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왕국으로 돌아가 잘못된 걸 바로 잡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바로 잡는다.
그 말에 아이기스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검성이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자신에게 쓰인 저주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저까지 세상 밖으로 끌어낸 분이 아니십니까. 좀 돌아가더라도 반드시 바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검성님……!”
“제가 당신과 제자의 앞날을 위해 끝까지 돕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시지요.”
검성은 진심이었다.
비록 그 대상이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 한눈에 반했던 여자이고,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걸 알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칠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휘오오오!
휘몰아치는 바람.
검성과 힐탄은 본능적으로 아이기스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스승님, 이건…….”
“그래, 이 느낌은…….”
두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뭉쳐 있던 사제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귀청이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풍이라도 불려는지 산천초목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화사함으로 가득 했던 숲은, 엔트맨들이 사는 그곳처럼 으스스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검성이 목을 베어 죽인 베로키의 몸이 벌떡 일어난 것이다.
마치 좀비의 그것처럼 절대 물리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형태로 몸을 일으킨 그것은, 잘린 몸의 단면 곳곳에서 핏빛 같은 줄기들을 내뿜더니 이내 곧 잘려 나간 팔과 목들을 이어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
그런데 목과 팔이 거꾸로 붙었다.
그때였다.
끼기기긱……
기이한 소리.
베로키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오래된 나무 문을 열 때 나는 소리처럼 그녀의 몸에선 음산한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돌아간 팔과 목이 한순간에 바로 잡히며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감겼던 그녀의 눈이 뜨인다.
안(眼)색이 바뀌었다.
청록에 가까웠던 베로키의 눈은 어느덧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 어리석은 놈들, 기어코 선을 넘고야 마는구나.
벙긋거리는 입.
그러나 그것은 결코 육성이 아니었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 울리는 그것은 명확한 초월체의 음성……
신의 목소리였다.
화화화화!
베로키로부터 진분홍색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올랐다.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그것들은 다들 관절인형처럼 기괴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좀비처럼 몸을 흐느적거렸다.
리치처럼 허공 위로 떠오른 베로키가 말했다.
- 신의 종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베로키는 로나스의 그릇이 되었다.
화신체.
그러나 육체가 죽어 버린.
그렇기에 분명 미의 여신을 모시는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녀에게선 한줌의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검성이 품에서 검 손잡이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역시 엘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군.”
품에서 꺼낸 것.
그것의 정체는 다크엘프, 시올라가 준 봉혼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