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1화
세 사람은 그 즉시 미의 신전으로 향했다.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기세가 파죽지세와 같았다.
특히 검성의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번뇌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제자를 보자마자 깨끗이 비워졌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몇 번의 장거리 이동 마법진을 이용한 끝에 마침내 미의 여신, 로나스가 다스리는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북쪽 숲과는 달리 청량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하늘은 맑았으며 숲을 비추는 햇살은 따사로웠다.
산짐승들이 서로를 해하지 않고 어울려 놀고 있었으니 겉보기엔 아름다웠으나 숲의 생리를 아는 자들이 보기엔 퍽 해괴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길 한참.
세 사람은 마침내 미의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상상 속의 신전을 굉장히 닮은 곳이었다.
새하얀 대리석은 물론,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은 신성한 생김새는 그 자태만으로도 고귀함을 자아냈다.
그때, 신전의 안쪽에서 누군가 나왔다.
그는 굉장한 미남이었는데 한쪽 어깨를 드러낸 커다랗고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금발이 인상적인 평사제가 세 사람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여긴 미의 여신 로나스 님을 모시는 신전입니다. 이곳은 어쩐 일이실까요?”
그 말에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검성이 대표로 나가 말했다.
“이곳의 최고 사제를 만나고 싶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저희는 외부인을 함부로 들이지 않고 주사제님은 무척 바쁘십니다.”
“엘프들이 그러더군. 이곳에 아름다움을 시기하여 저주를 내리는 마녀가 있다고. 그러니 주사제가 나와 결백을 증명하지 않으면…….”
검성이 허리춤에 참 칼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베겠다.”
“그게 무슨…….”
검성의 직조한 겁박에 평사제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특히 온몸을 짓이기는 이 살기들이 그의 말이 진실임을 더더욱 증명해 주었다.
그때였다.
“멈추시죠.”
안에서 웬 여자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백금발에 청안을 가진 상당한 미녀였는데 먼저 나온 남자보다 직급이 더 높아 보였다.
검성이 물었다.
“넌 누구지?”
“이루나라고 합니다. 저 또한 로나스 님의 종들 중 한 명이죠. 안에서 들었습니다. 저흰 마녀도 아니고 시기와 질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돌아가 주시지요.”
“그걸 어떻게 믿지?”
“하지 않은 짓을 증명해야 한다는 게 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럼 엘프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그건…….”
엘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선민사상은 좀 있을지언정 인간들이 죄악으로 여기는 짓들을 그녀들 또한 행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행위들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고귀함을 더럽히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거짓말이 바로 대표적인 예였다.
이루나가 말했다.
“엘프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억울합니다. 저희는 이미 로나스 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다른 이를 시기하고 질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들로는 너희들의 결백함이 입증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심만 살 뿐이지. 예컨대 로나스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기에 다른 것들을 배척하고 시기할 수 있는 거잖아? 시기와 질투란 그런 거니까.”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그리고 이건 제안 같은 게 아니라 통보다. 너희들의 결백함을 어떻게든 증명하든지, 아님 내가 데리고 온 공주에게 걸린 마녀의 저주를 해주하든지 해라. 안 그럼 로나스의 신전은 오늘부로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될 테니.”
검성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아이기스와 힐탄은 침묵을 유지했다.
어쩌면, 로나스 측이 정말로 억울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들에게는 더 이상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저주.
이 악몽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음을 하였던가?
그 과정에서 힐탄은 한쪽 손을 잃었고 검성은 사랑을 잃었으며 아이기스는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악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응어리진 한을 풀기 위해선 방법이야 어찌 됐든 원인을 제거하는 수밖에.
검성의 겁박에 이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억지가 과하군요.”
“억지?”
그 말에 검성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나?”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그때, 참다못한 평사제가 검성의 말을 맞받아치려 하였으나 검성을 알아본 이루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평사제를 말렸다.
“자, 잠깐만요. 클리크 사제.”
“왜 그러십니까, 이루나 사제님?”
미남자의 이름은 클리크.
이루나가 클리크를 말리자 그것을 본 검성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날 알아본다니 다행이군. 저 친구의 목숨을 건졌어.”
“……당신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검성, 당신은 분명 검의 극의를 깨우치고 초야에 묻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왜 이런 용병 같은 짓을 하는 거죠?”
“용병이라…….”
그 말에 검성이 피식 웃었다.
“용병은 대가를 받고 움직이는 게 용병이지, 미안하지만 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았어. 난 그저 내가 쌓은 관계들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그게 무슨…….”
“혀가 길어지는군.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검성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루나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얼마간의 장고 끝에 이루나가 말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왔겠죠?”
“질투에 눈이 먼 추한 여자가 있는 집.”
“감히 로나스 님을 모욕하다니……! 제아무리 당신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 미의 사제들은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능력 또한 갖추어야지만 이곳에 입교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나오세요!”
그 말에 신전 안에서 클리크와 이루나와 비슷한 복식을 갖춘 미남미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창이나 방패, 지팡이 따위가 들려져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저것이 평화적인 대화 수단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검성이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당신은 우리가 모시는 신을 모욕했습니다. 이건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을 수 없어요.”
“난 저주의 시작을 알고 싶어서 저 멀리 대륙의 끝에서부터 왔다. 정말 미의 신이라면 억울함만 호소할 게 아니라 모든 아름다움을 보듬어 주고 안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궤변입니다.”
“그렇겠지. 덕분에 확실히 알았군.”
슬그렁.
검성이 검을 뽑아 들었다.
“보통의 신전이라면 빈자를 도와주고 병자를 치료해 주는 것이 상식이지. 그 신이 설령 돈만 밝히는 상인들의 신이라도 할지언정 말이야. 하지만 내 평생 도움을 모른 체 하는 사제들은 처음 봐. 덕분에 확신이 생겼어.”
츠츠츠츠-
검성의 몸에서 새파란 아우라가 넘실거린다.
검성이 고개를 틀어 힐탄에게 말했다.
“힐탄.”
“예, 스승님.”
“내가 신경 쓰지 않게 할 수 있겠니?”
“손 하나가 날아갔지만 그 정도는 충분합니다.”
“그래. 그래야 내 제자지. 만약 핑계를 댔다면 크게 실망했을 거다.”
“간만에 스승님의 실력을 볼 수 있어 기쁩니다.”
“알아서 잘 피하거라, 이번 건으로 난 꽤 오랫동안 참았으니까.”
그 말이 시작이었다.
“처단하세요!”
이루나의 외침과 동시에 절반의 사제들이 검성을 향해 달려들었고 힐탄은 하나 남은 팔로 아이기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마치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그 동작들은 모두 한 번에 이루어졌다.
콰광! 쾅!
힐탄이 자리를 뜨자마자 힐탄이 있던 자리에 폭음이 두어 번 터졌다.
검성과 힐탄의 예상대로 녀석들은 검성뿐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힐탄과 아이기스까지 노린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공격이 날아든 건 단연코 검성 쪽이었다.
뒤편이 폭음 두어 번이면 검성 쪽에는 최소 십여 개의 창칼이 날아들었으니까.
하지만 검성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쯤 느슨하게 뜬 눈으로 날아드는 창칼을 모두 확인한 다음 딱 한번 검을 휘둘렀다.
번쩍!
검성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검 끝에서 난 건 바람 가르는 소리가 아니라 빛이 번쩍이는 소리였다.
그리고.
카가강!
“……!”
“……!”
“……!”
놀랍게도 검성에게 창칼을 들이민 자들의 병장기가 모조리 반쪽이 되고 말았다. 방패라고 예외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퍼어엉!!
“크아아앗!!”
“크어억!”
병장기가 잘리기도 잠시, 뒤이은 거대한 충격파가 그들을 해일처럼 휩쓸며 뒤로 밀어내 버렸다.
더불어 그것은 뒤편의 마법을 부리는 사제들에게까지도 닿았는데 모두들 신음을 내며 뒤로 밀려나다 못해 두 바퀴를 뒤로 굴렀다.
착.
검성은 검을 칼집에 넣었다.
한 번 더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더 놀라운 건 분명 엄청난 일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 중 칼에 베인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그러나 모두들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팍을 부여잡고 있었고 검성이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너희를 가엾게 여겨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마. 그리고 이번엔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 순간, 웃음기로 가득하던 검성의 얼굴에 더 없이 차가운 살기가 담겼다.
“계속 로나스인지 뭔지를 모시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걸 고백하는 게 좋을 게다. 실토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그 말에 이루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검성이 강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는 늙었고 아무리 전설적인 존재라고 할지라도 과거의 망령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때였다.
“그 대답, 내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안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키가 큰 여성이었는데 안경을 끼고 전형적인 수녀복을 입은 여자였다.
주사제, ‘베로키’.
그녀가 바로 로나스의 최고 사제였다.
“베로키 주사제님……!”
베로키의 등장에 모두들 가슴 아픈 통증을 참으며 예를 갖추었다.
그 사이를 베로키가 걸어오며 말했다.
“내 이름은 베로키. 내가 바로 미의 신전의 주사제예요.”
과연.
그녀는 최고 사제인 주사제답게 여태 본 사제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검성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베로키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이기스만 못 했으니까.
검성이 건조하게 말했다.
“드디어 책임자가 나타났군. 처음부터 나오기엔 무서웠나 보지?”
“내가 직접 안 나서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전설은 전설이더군요.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요.”
“말이 길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데리고 온 여자는 혹시 아이기스인가요?”
“역시 알고 있었군.”
베로키의 아는 체에 검성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베로키도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알죠. 당신이 말하는 마녀, 우리가 보냈으니까.”
“주사제님!”
이루나의 외침.
그러나 베로키는 뭐가 그리 자신만만한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