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0화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밟아 온 진을 그대로 밟아 북쪽 숲을 빠져 나가는 것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없어 그 시간이 참 길게도 느껴졌다.
앤트맨들은 접근하지 않았다.
다크엘프들의 귀띔이라도 있었나 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북쪽 숲을 벗어나자 그제서야 검성이 발걸음을 멈춰 섰다.
아이기스도 덩달아 멈췄다.
사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녀는 검성만큼 강한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런 힘이 있다고 해도 봉혼검 없이 신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하염없이 걷는 그의 뒷모습만 보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멈춰 선 그가 말했다.
“공주님.”
“예, 검성님.”
“미의 신전에 가기 전에 우선 제자 녀석부터 찾아야겠습니다.”
“제자 녀석이라면…….”
힐탄.
그를 말하는 것이리라.
“알겠습니다.”
아이기스는 일부러 그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서운 것과는 별개로 그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가시죠.”
검성은 북쪽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사흘이 걸렸고 거기서 말을 빌린 다음 또 이틀을 달려서 제법 큰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제법 깔끔한 호스텔을 하나 잡아 아이기스에게 방 열쇠를 주었다.
“잠시 어딜 좀 다녀올 테니 쉬고 여독이라도 풀고 계시지요.”
“예.”
어디 가냐고 묻지는 않았다.
아마 힐탄을 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러 가는 걸 테지.
아니면 이미 방법을 알아서 준비를 하러 간 것이거나.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아이기스의 예상대로 행방 모를 제자를 찾을 방법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검성은 도시의 가장 어둡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기 마련이고 음지에는 음지에 걸맞은 자들이 살아가는 법이니까.
그곳은 도시의 슬럼가였다.
빈자와 약쟁이들을 심상찮게 볼 수 있었고 간혹 검성의 주머니를 털려는 좀도둑들이 검성에게 부딪히기를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그들의 어깨는 허공을 칠 뿐이었다.
검성은 그곳에서 가장 커다란 주점으로 향했다.
주점은 조용했다.
환한 대낮이었음에도 양지보다 그늘이 더 가득 했고 바에는 바텐터가 건조한 표정으로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검성이 말했다.
“네가 여기 마스터인가?”
“그렇습니다만?”
“사람을 찾고 있다.”
“술 손님이 아니시군요. 번지수를 잘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저흰 아무나 손님으로 받지 않거든요.”
그때였다.
철컥!
칼과 검집이 부딪히는 소리.
그것은 분명 칼집에 검을 집어넣을 때 나는 소리였다.
마스터도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기에 착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가 검을 뽑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콰드드드득!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그것은 머리 위에서 나는 것이었다.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소음에 놀란 마스터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소음과 부스러기 따위보다 훨씬 더 놀라운 걸 목도할 수 있었다.
“하, 하늘…!”
그것은 바로 하늘.
하늘이 보였다.
이곳은 3층짜리 건물이었고 창문은 일부러 막아 두었다.
그럼에도 천장에서 하늘이 보인다는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
바로 건물이 반으로 쪼개져서였다.
말도 안 되는 현상.
마스터를 비롯한 홀에 앉아 있던 놈들 대부분이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놀라 자리에 얼어붙었다.
검성이 고개를 들어 살벌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음은 없다.”
“아, 알겠습니다.”
어두운 뒷 세계.
음지.
그곳은 강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약육강식의 세상.
검성은 강자존의 법칙에 의거하여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었다.
검성이 말했다.
“테리언의 망령들을 찾고 있다.”
“테리언이라면…… 설마 망해 버린 옛 제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중 파르갈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을 찾아라. 특히 그들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힐탄을 찾아라. 방법과 과정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만약 살아 있다면 내게 위치를 보고해라.”
“죽일 수 있으면 죽여서 데리고 올까요?”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 보든지.”
말을 마친 검성이 그제서야 바 앞에 앉아 주문을 시작했다.
오늘은 독한 술이 필요한 날이었기에.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약 열흘쯤.
드디어 던져 놓은 찌가 고기를 낚았다.
“호메른에 있다고?”
“…예, 저희 애들을 네 번 정도 투입해 보았으나 도저히 생포할 수가 없어서…….”
크큭.
그럼 그렇지.
누구 제자인데 감히 생포가 가당키나 할까.
검성은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마스터에게 던졌다.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안내해라. 만약 보고가 거짓이라면 너흰 절대로 편히 죽을 수 없을 것이다.”
“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힐탄의 행방을 찾은 검성은 아이기스에게 갔다.
열흘간 두 사람은 얼굴도 거의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몇 번 정도 식사를 같이했을 뿐.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자신의 결심이 흔들릴까봐서.
아이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처음에 가졌던 두려움의 감정 때문에라도 쓸데없는 질문 같은 건 일체 하지 않았다.
호스텔로 돌아온 검성이 말했다.
“힐탄을 찾았습니다.”
“힐탄 님을요?!”
“호메른에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 즉시 가 보도록 하시죠.”
“예!”
세상에.
힐탄이 살아 있다니?
솔직히 아이기스는 힐탄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세상에는 그를 노리는 자들이 많았고 힐탄은 자신 때문에 팔 한 짝을 잃은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과연 검성의 제자.
힐탄은 힐탄이었다.
아이기스의 밝은 반응에 검성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지만 크게 내색치 않고 곧바로 호메른으로 움직였다.
*호메른은 먼 곳이었다.
장거리 이동 마법진을 네 번이나 갈아타야 할 정도로.
그곳은 뜨거운 뙤약볕과 달군 모래가 지옥처럼 퍼져 있는 사막 도시였는데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곳에 힐탄이 있다고 했다.
“여깁니다.”
호메른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마스터의 부하들이 힐탄의 위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힐탄은 의외로 도심 중심부에 숨어 있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마스터의 부하가 어느 집 문을 가리키자 검성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콰드득!
낡은 문틈 사이로 거친 칼날 하나가 문짝을 깨부수며 정확히 검성의 미간을 향해 뿜어졌다.
챙캉!
검성은 놀라지 않고 그것을 받아쳤다.
그러자 금속 파쇄음과 불꽃이 튀며 칼날이 위로 솟아 천장에 박혔다.
허나 곧 회수되었고 칼날의 주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 분명 죽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했을 텐…….”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갈무리 되지 않은 명백한 살기.
힐탄이었다.
그리고 적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드러낸 힐탄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승님?”
“오랜만에 보는구나. 힐탄.”
봉두난발이 된 머리.
정돈되지 않은 수염과 거친 피부결.
마지막으로 붉게 물든 두 눈동자는 그가 얼마나 지독하고 외로운 싸움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는 증표였다.
실제로도 그는 몹시 지친 상황이었다.
파르갈을 증오하는 자들이 고용한 암살자 집단과 더불어, 어느 날부턴가 나타난 뜻 모를 도둑 길드가 자신을 뒤쫓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힐탄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성의 넉넉한 덩치 뒤에 숨어 있던 아이기스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이기스를 본 힐탄의 눈이 십수 년 만에 재회한 스승을 보았을 때보다도 더 커진다.
“당신은……!”
“오랜만이네요, 현자님.”
아이기스가 그를 향해 웃는다.
약간의 슬픔과 반가움을 담아.
그래서일까?
한 마리의 상처 입은 야수 같았던 힐탄에게서 순식간에 흉흉함이 사라졌다.
*“……많은 일들이 있으셨군요.”
재회에 대한 해후도 잠시.
아이기스는 힐탄과 헤어지고 팔라디움을 거쳐 북쪽 숲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모두 다 그에게 말해 주었다.
검성은 묵묵히 곁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힐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정말로 신의 질투였다니…….”
지혜의 종족이라 불리는 다크엘프가 한 말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덩달아, 한때 이 모든 게 공주의 자작극이라는 생각을 품었던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말이 끝나고 난 뒤, 얼마간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힐탄이 말했다.
“…그래서, 미의 신전을 찾아가지 않고 도둑들을 풀어 절 찾으신 이유가 뭡니까?”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힐탄은 그중에서도 스승이 가진 저의가 가장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아는 스승은 원래 여자의 미모 따위엔 절대로 넘아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의외성이 꺾였고 이렇게 자신을 찾아 나섰으니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검성이 대답했다.
“알면서 무얼 묻느냐? 확신을 얻고 싶었다. 너를 직접 보고.”
“그래서, 이제는 마음이 굳혀지셨습니까?”
그 말에 검성이 픽 웃었다.
“그래. 굳혀졌다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내 어찌 네가 살아 있는데 자식 같은 제자의 여자를 넘볼 수 있겠느냐.”
“괜찮습니다. 사실 전 이제 제자라 할 수도 없지요. 스승님과의 약속도 못 지킨 제가 어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넌 기사로서 충을 다한 것뿐이니 되었다. 그만큼 속죄했으면 되었어.”
“스승님이 그리 말씀하셔도 세상에는 아직 저와 제가 몸담았던 곳을 증오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까지 모두 감안하고 널 만나러 온 것이니까.”
검성이 한결 측은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공주님의 굴레도 굴레지만 너 또한 굴레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어.”
검성의 말에 힐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떨어뜨릴 뿐.
한참의 침묵 끝에 힐탄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 저를 증오하는 자들을 벨 수 없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는구나. 네가 베지 않아도 된다. 넌 네가 첫눈에 반한 여인의 운명을 해하려는 것을 베어라. 난 네 앞길을 막으려는 걸 벨 터이니.”
“스승님…….”
그때였다.
“우리가 다시 왔다, 힐탄.”
파르갈을 증오하는 자들이 보낸 또 다른 암살자들이 나타난 것은.
그들의 등장에 검성이 먼저 그들 앞에 서서 경고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잘 와 주었구나. 가서 너희들의 고용주에게 전해라. 앞으로 내 제자를 건드리려면 나부터 꺾어야 할 것이라고.”
“제자?”
그 말에 암살자 무리의 리더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파르갈 단장의 스승이라면…… 설마 당신이 그 검성인 건가?”
“그래.”
“흰소리! 네놈은 누군데 감히 검성을 사칭하는 것이냐! 검성이 종적을 감춘 지도 벌써 수십 년은 되었거늘!”
“그 또한 사실이지. 하지만 이렇게 다시 제자를 위해 나타났으니 정녕 그 진위가 궁금하거든 기꺼이 칼을 뽑아라. 그렇다면 직접 알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아무도 검을 뽑지 못했다.
그들은 호기심에 목숨을 거는 멍청이가 아니었으니까.
암살자들은 얼마간 고민하더니 깨끗이 힐탄을 포기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