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8화
나무꾼……
왜 그들이 검성을 나무꾼이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숲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앤트맨들은 그 수가 얼마가 될지언정 검성의 칼춤 앞에선 한 그루의 나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앤트맨들이 장작처럼 쓰러졌을까?
“그만!”
낯선 목소리.
그와 동시에 앤트맨들의 공격이 멎었고 수풀림 같은 앤트맨들 사이로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동화책에서 흔히 볼 법한…… 예컨대 펑퍼짐하고 검은 옷에 고깔모자를 쓴 그런 마녀가 아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은백색 머리.
눈동자는 달을 박아 넣은 듯 황금색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귀는 뾰족하고 길었다.
“아……!”
마녀의 외형을 본 아이기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육성을 내뱉었다.
아이기스는 그들이 누군지 알았다.
왕궁에서 교육받은 적 있다.
저들은 전설적인 이종족 ‘다크엘프’였다.
그녀의 의복은 검은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암살자들의 그것처럼 꽤 타이트한 형태였다.
다크엘프, ‘레아’가 검성 앞에 서서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너냐?”
“레아인가, 오랜만이군.”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는지 이유나 한번 들어 보실까?”
레아라고 불린 다크엘프는 놀랍게도 검성과 구면이었다.
그러나 구면인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엘프는 숲의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만큼 앤트맨들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레아가 인상을 찌푸리자 검성이 유난이라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진짜 죽은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열을 내고 그러시나?”
“넌 항상 그게 문제야. 죽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한 그런 사고방식. 별로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손님을 계속 이리 세워 둘 건가?”
“누가 손님이라는 거야? 초대한 적도 없는데.”
“그러지 말고 손님 대접을 좀 해 주는 게 어떤가 싶군. 이번엔 나만 온 건 아니라서 말이지.”
그 말에 레아가 아이기스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그사이 결혼이라도 했는가 보지?”
“아직은.”
“…썩 내키진 않지만 따라와.”
다행히 레아는 더 이상 두 사람을 핍박하지 않고 숲의 안쪽으로 들였다.
거리가 꽤 될 줄 알았는데 엘프들이 사는 집성촌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엘프들은 특별한 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먼 거리도 단거리로 줄여 내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지요.”
“아…!”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호기심이 드러났는지 검성은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었다.
“여기야.”
마침내 도착한 집성촌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평범한 마을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세 사람이 도착할 때쯤, 마을 입구에는 다른 다크엘프들이 견제의 눈초리로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기스가 짐짓 긴장한 투로 물었다.
“적대심이 좀 있네요.”
“허허, 괜찮습니다. 그건 제가 앤트맨들을 베어서 그런 것이니까요.”
레아는 촌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고 회관 비슷한 것에는 꽤 직급 높아 보이는 다크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들 중 노파나 중년처럼 나이 들어 보이는 이가 없다는 것.
레아가 말했다.
“나무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레아가 어느 여인 옆에 섰다.
그녀는 이곳의 촌장 되는 다크엘프로, 이름은 ‘시올라’였다.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시올라가 제법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십 년 만이군. 나무꾼.”
“당신도 오랜만이오, 시올라.”
“그래…… 무슨 일로 이곳에 다시 발걸음 한 거지? 이번에도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 생각인가?”
“하하…… 그땐 젊을 적의 치기라고 해 두지. 내가 사과함세.”
“치기라…….”
검성은 한때 검의 극의를 깨우치고자 대륙의 강자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앤트맨과 다크엘프들 또한 최강의 검을 증명하는데 사용했다고 했다.
그러니 별로 환대받지 못할 수밖에.
시올라가 말했다.
“안 본 사이 실력이 훨씬 더 늘었군.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일 때문에 이곳을 찾은 거지? 제자라도 생겼나?”
“마녀를 찾고 있다.”
“마녀? 우리가 마녀라 불리는 건 인간들이 붙인 세간의 소문이라는 걸 알 텐데?”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건 진짜 마녀다.”
“진짜 마녀?”
검성은 시올라에게 아이기스의 사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시올라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어루만졌다.
“미모를 질투한 마녀라…… 별 미친년이 다 있군.”
미친년.
생긴 것과는 전혀 대조되지 않는 너무 적나라한 욕설에 아이기스는 조금 놀랐으나 티를 내진 않았다.
그때, 시올라의 시선이 후드에 가려진 아이기스의 얼굴로 옮겨졌다.
“널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사정까지 들었는데 저 여자의 얼굴을 안 볼 순 없겠지? 한낱 인간의 미모가 얼마나 빼어난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그 말에 검성이 아이기스에게 양해를 구하려 하자, 아이기스가 한 박자 더 빠르게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오…….”
“우웃…….”
“와…….”
놀랍게도 미의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엘프들이었으나 그녀들은 아이기스의 외모를 보고는 자기들도 모르게 새어 나오듯 육성을 내뱉고 말았다.
시올라가 말했다.
“과연…… 웬 미친년이 미모를 다 질투하나 했더니 그럴만했군. 감히 신조차도 질투할 미모야.”
“…감사합니다.”
아이기스는 그 말과 함께 다시 후드를 썼다.
검성이 물었다.
“그래서, 아는 바가 있나? 엘프들은 지혜의 종족이라고 들었다.”
“우리라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희가 마녀라고 착각하는 게 누구인지, 또 이런 일을 누가 벌였는지는 대강 짐작이 가는군.”
그 말에 아이기스의 눈이 커졌다.
처음으로 마녀에 대한 단서가 잡힌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죠?”
“이런 건방진…….”
시올라의 아는 체에 너무 놀란 나머지 아이기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질문했을 때였다.
시올라를 보위하는 보좌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춤의 검을 빼들려 하자 검성이 반 박자 빠르게 움직여 아이기스의 앞을 막아섰다.
“사사로운 건 그냥 넘어가지 그래? 이 아가씨는 엘프들을 처음 보거든.”
“……칫!”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선민사상을 갖고 있기에 웬만큼 그들의 인정을 받지 않는 한 감히 말조차 섞어서도 안 됐다.
아이기스가 제아무리 엘프조차 감탄할 미모를 가졌다곤 하나 그것은 단순한 생김새일 뿐, 격을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될 순 없었으니까.
보좌관이 검을 집어넣자 시올라가 픽 웃으며 말했다.
“꽤나 아끼는 아가씨인 모양이군. 약혼자인가?”
“아직은.”
“호오?”
“…쓸데없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래서, 당신이 아는 게 뭐지?”
검성의 처음 보는 모습에 시올라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우리가 왜 알려 줘야 하는 거지? 넌 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 텐데도 우리들의 형제와 다를 바 없는 숲의 파수꾼들을 헤쳤잖아?”
“처음엔 대화를 시도했다, 거절한 건 나무들이었고.”
“중요한 건 결과지. 그리고 설령 숲의 파수꾼 건들이 아니라도 설마 그냥 대답을 얻어 갈 생각이었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이기스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검성이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내뱉기 전까진.
“그래서?”
“…뭐?”
“시올라…… 북쪽 숲, 다크엘프들의 어머니여.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그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린 모양이군.”
그 말과 함께 검성은 아주 약간의 살기를 드러내 보였다.
오싹!
대단한 살기였다.
평생 검 한 번 휘둘러보지 않은 아이기스조차 순간 오금이 저릴 만큼.
그러나 시올라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마치 칼자루는 자기에게 있다는 것처럼.
“곧장 검부터 휘두르지 않는 걸 보면 마음이 많이 조급한가 보군. 너도 결국 인간이고 늙었다는 건가.”
“마음이 조급하다기보단 많이 자애로워졌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자신 있나 보군, 내 검은 시간을 먹인 만큼 더 날카롭게 벼려졌는데 말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과연 그 검이 네가 데려온 여자까지 지킬 수 있을까?”
그 말과 함께 다른 다크엘프들이 반 발자국씩 앞으로 나섰다.
그 수는 시올라를 제외해도 여덟.
덧붙여 이렇게 좁은 밀실이라면 검성 본인은 무사히 탈출할지언정, 아이기스의 생사는 장담키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게 다크엘프들은 절대로 그 힘을 무시해선 안 될 강력한 이종족들 중에 하나였으니까.
검성이 살기를 거두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지?”
“그 여자가 너에게 어지간히도 소중한 모양이로군.”
“쓸데없는 말을 하면 거래고 뭐고 전부 베겠다.”
“쿡쿡, 그러지. 나도 농담 몇 마디에 내 소중한 가족을 잃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야. 레아, 지도를 가져와.”
“예.”
레아가 가져다준 지도.
그 지도에는 어느 지점이 동그라미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받아.”
“이게 뭐지?”
“최근 북쪽 숲에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말이야.”
“이상한 놈?”
“전혀 본 적 없는 유형의 포식자더군. 아무리 먹고 먹히는 게 생태계라지만 이놈은 뭔가 좀 이상해. 생긴 것도 꼭 알을 닮았고.”
“알?”
“그래. 우리가 아는 건 이게 전부야. 원래는 며칠 내로 조사를 나가려고 했지만, 마침 네가 나타났잖아?”
시올라는 놀랍게도 솔직했다.
그러나 오히려 솔직했기에 검성도 별말 없이 납득했다.
“제거를 원하는 건가?”
“정확히는 조사지. 지성체라면 대화가 먼저고 위협이 된다면 제거해 줬음 좋겠어. 제거의 증거로는 시신을 가져왔으면 좋겠고.”
“알겠다.”
“아가씨는?”
“데리고 가겠다.”
“어머, 우릴 믿지 못하는 거야?”
“그래.”
“자상도 하셔라.”
시올라가 솔직했던 만큼 이번엔 검성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 검성이 말했다.
“시올라, 부디 네가 아는 것이 내가 원하는 답이어야 할 것이다.”
*“검성님, 괜……찮으시겠어요?”
아이기스가 걱정되는 투로 묻는다.
그에 검성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얼 말입니까?”
“지혜의 종족이라 불리는 그 다크엘프들조차 모르는 존재잖아요. 위험한 존재라면 어떡하시려구요?”
“뭐……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공주,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크엘프들은 그렇게 뛰어난 종족이 아닙니다.”
“엘프인데 별로 뛰어나지 않다구요?”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요. 그들이 정말로 뛰어난 종족이라면 왜 한낱 인간인 저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제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해석하기 나름일 듯했지만 그래도 납득은 됐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아이기스는 더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더러운 풍파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이끌 수 있는 건 오직 모두를 굴복시킬 만한 압도적인 힘뿐이라는 걸.
그렇게 두 사람은 검성의 보호 하에 점점 더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여기인 것 같은데요?”
마침내 두 사람은 시올라가 준 지도에 표기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