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7화
“그런데 볼더산까지는 어떻게 가죠?”
“이 도시에는 용병 길드가 제법 있습니다. 제가 드린 돈이면 볼더산까지 가는 용병들을 충분히 구하고도 남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기스는 라핀의 충고대로 용병단을 구해 볼더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볼더산까지 가는 도중 힐탄과 라핀을 급습한 괴한들을 또 만나거나 하진 않았다.
얼굴을 철저하게 가린 덕에 용병들에게 이상한 짓도 당하지 않았다.
볼더산에 도착한 아이기스는 그 길로 용병들과 헤어진 뒤 볼더산 어딘가에 있을 검성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볼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볼더산을 뒤졌지만 아이기스는 좀처럼 검성을 만날 수가 없었다.
산의 밤은 빨리 찾아왔고 주변은 금세 어둑해졌다.
아이기스는 두려웠지만 힐탄에게 배운대로 몸을 숨길 동굴을 찾아 산짐승들이 싫어하는 약을 입구에 쳐 놓고 선잠을 잤다.
-그르르……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친 약은 산진승들을 쫓는데에만 효과가 있었지 몬스터들에게까지 효과가 있진 않았다.
고블린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필이면 고블린이라니.
오크와 더불어 인간을 겁탈한다는 놈들의 소문에 그녀는 호신용으로 가져온 단검으로 몬스터들을 위협했으나 놈들에게 가녀린 여자의 단검은 씨알도 안 먹히는 위협이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키악!
단말마와 함께 떨어지는 고블린들의 목.
웬 남자가 고블린들을 쓸어버린 것이다.
“괜찮소?”
하얀 머리.
그러나 머리색에 비해선 덜 늙어 보이는 중장년의 얼굴.
아이기스는 본능적으로 그가 볼더산에 기거하는 검성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거, 검성님이십니까?”
“날 아시오?”
그의 대답에 아이기스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검성에 의해 구출된 아이기스는 그에게 라핀한테 받은 증표와 더불어 그동안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렇군.”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침울해져 있었다.
그와 힐탄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도제 관계였고 제자가 그런 꼴이 되었다고 하니 꽤나 슬픈 모양.
아이기스가 말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전 제 손으로 직접 마녀를 죽이고 저주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 말에 검성은 아이기스를 얼마간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불가능하오.”
“불가능하다구요? 왜죠?”
“힐탄은 내가 가르친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제자였소. 단순히 검을 다루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검술에 대한 이해와 본질에 다가가려는 눈, 그리고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자질까지 갖췄기에 그 정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거요.”
검성의 타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뿐인 줄 아시오? 그 녀석이 내 밑에서 검을 배운 기간만 자그마치 15년이오.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배웠소. 그런데 몸도 다 크고 어떤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를 당신을 내가 왜 오랜 시간을, 그것도 내 시간을 들여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까?”
일리는 있었다.
그리고 허락을 받아 내는 데까지 쉬울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온 그녀는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아이기스가 마음의 준비를 마친 후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후드 안에 가려져 있던 빼어난 미모가 드러났고 아이기스의 얼굴을 본 검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마녀가 질투한 외모라더니…….”
검성은 눈앞에 그녀를 두고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그 또한 꽤 많은 여자를 만나 봤지만 단언컨대 눈앞의 아이기스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나무 같았던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힐탄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되는구나.’
자신이 아는 힐탄도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도 은거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더니 그 이유를 이해했다.
그렇기에 검성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기스에게 첫눈에 반한 것도 반한 것이었지만 눈앞의 여자는 한때 자신의 제자가 사랑했던 여자.
심란했다.
단번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은 검성은 한참의 장고 끝에 대답했다.
“……일단 자리를 옮겨 제 거처로 가시지요. 야밤의 산은 위험하고 지낼 곳도 없잖소,”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성의 집은 산속 깊은 곳에 위치했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는 산속에서 은둔할 뿐 야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라핀과 같았다.
방을 내주었고 씻을 물과 시간마다 식사를 주었다.
아이기스도 그에게 독촉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여자의 감으로, 그가 왜 아무런 말도 없이 저런 태도를 취하는지 알겠거니와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도 검성 쪽이었으니까.
그렇게 하릴없이 열흘이 흘렀다.
그리고 검성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검성이 그녀의 방으로 찾아왔다.
열흘 사이 그는 조금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고민이 많았을 테지.
그가 말했다.
“공주, 할 말이 있소.”
“드디어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그렇소. 내 선에서 납득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렸소.”
“어떤 결정이든 마녀를 죽이고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게 어떤 말씀이든 검성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아이기스의 말은 검성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마녀 때문에 그녀가 저런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로선 마음이 아팠으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그날,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 말에 아이기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이미 예상한 바였으니까.
하지만 이 또한 각오한 일.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은 한때 내 제자가 각오를 깨면서까지 사랑했던 여인으로 차마 당신을 마음에 품을 순 없소. 하지만 당신에게 반했기에 당신의 아픔 또한 못 본 척 할 수도 없게 되었소.”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내가 직접 그 마녀를 없애 드리리다.”
“거, 검성님께서요?”
이건 전혀 상정하지 못한 그림.
그렇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놀란 눈으로 검성을 쳐다보았을 때, 그의 표정은 이미 결심을 다짐한 얼굴이었다.
“그렇소. 내가 직접 마녀를 죽이고 당신을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소. 그런 다음 힐탄을 찾아보겠소.”
“힐탄 님을요?”
“아무리 당신에게 반했어도 도제 간의 의를 해칠 순 없소. 그러니 직접 힐탄을 찾아 녀석에게 허락을 구하겠소.”
“…만약 힐탄 님을 찾지 못하신다면요?”
“이 세상에 내가 찾지 못하는 건 없소. 그리고 만약 힐탄이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내어 주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땐 녀석을 구해 와야겠지.”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힐탄은 제국 시절의 과업으로 적이 너무나도 많은 상황.
그런 와중에 자신의 제자를 구해 오겠다니?
허나 그건 검성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택이었다.
그는 힐탄과 교류 없이 보낸 지 십수 년이나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힐탄을 자신의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힐탄과 당신만 행복할 수 있다면 이 늙은이의 감정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까요.”
“…제가 검성님께 검을 배울 순 없는 건가요?”
그 말에 검성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전에도 말했다시피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수요. 그리고 당신을 가르치는 동안 내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이 없소.”
“…그렇군요.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 채비를 합시다.”
“채비요?”
“말했잖소, 마녀를 죽여 주겠다고.”
“아……!”
검성은 전날 밤 미리 채비를 마쳐 두었다.
그는 진심이었고 그녀 또한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란 걸 예상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아이기스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저주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여.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북쪽 숲에 가고 있소.”
“북쪽 숲이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세상에 마녀는 실존하는 존재들이요. 다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들끼리 부락을 이루어 살 뿐.”
“검성님은 그녀들을 어떻게 아시게 되었나요?”
“나는 한때 검의 극의를 깨닫기 위해 대륙 전역을 누빈 적이 있소. 마녀는 그때 만났소.”
“그렇군요.”
검성은 자신의 체력을 과시하기 위해 걸어간다거나 말을 타고 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인근의 대도시를 찾아 장거리 이동 마법진을 이용했으며 그 덕분에 닷새도 지나지 않아 북쪽 숲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숲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검성이 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아이기스에게 주었다.
“정신오염을 막아 주는 보호구입니다. 마녀들은 겁이 많아 매우 공격적이니 절대로 이것을 풀지 말고 나 이외엔 아무도 믿지 마시오.”
“검성님은요?”
“난 괜찮소. 마녀들의 공격 따윈.”
그 말이 묘하게 안심이 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햇빛이 창창한 대낮이었으나 숲속은 묘하게 어둡고 음침했다.
마녀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기현상이 일어났다.
가만히 있던 나무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 검성님 저건!”
“앤트맨들입니다. 나무의 정령 비스무리한 것들인데 마녀들과 친해 그들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맡고 있지요.”
“위험한 것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그는 말을 마친 후 검을 뽑아 들었다.
보름 정도 그를 보았는데 처음 고블린들을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그가 검을 뽑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끼기기기기기……
앤트맨들은 마치 악령 들린 나무 같았다.
분명 나무의 정령이라고 한 것 같은데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트는 것이 악령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숲을 떠나라…… 인간……
앤트맨의 경고.
그러나 검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마녀들을 만나러 왔다. 그러니 가서 나무꾼이 돌아왔다고 전해라. 그럼 그녀들도 이해할 것이다.”
-웃기는…… 소리……
그 말에 검성이 픽 웃었다.
앤트맨 놈들.
예나 지금이나 말귀 어두운 건 여전하구만.
허나 상관없다.
자신은 이곳에 온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으나 거절한 것은 앤트맨 쪽이었으니까.
-죽여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의 명령에 앤트맨들이 검성과 아이기스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겁먹은 아이기스가 물었다.
“거, 검성님 어떡하죠? 수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가 왜 저를 나무꾼이라고 칭했는지 아십니까?”
“그, 글쎄요?”
“직접 보고 확인하시지요.”
말을 마친 검성은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갔다.
그런 다음 뽑은 칼을 자리에 서서 휘두르기 시작했다.
촤아아!
검으로부터 빛무리가 뿜어진다.
그것은 마치 뱀, 혹은 채찍 같았는데 신기한 건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앤트맨들의 몸이 후두둑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아……!”
아이기스는 알았다.
마녀들이 왜 그를 나무꾼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