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6화
“결혼……이요?”
“네, 결혼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이기스가 당황하자 즈만이 넉살 좋게 웃으며 질문을 바꿨다.
“아니, 질문 자체를 바꾸죠. 혹시 만나는 사람 있으십니까? 남편이나 만나시는 분이 없으면 저는 어떠세요?”
“네, 네?”
아이기스는 정말로 당황했다.
왜냐면 이렇게 로맨틱하지 않은 고백은 그녀로서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원래 이런 말 잘 안 하거든요. 근데 당신은 뭐랄까, 이런 말 하면 비웃으실 수도 있는데 첫눈에 반했습니다. 오늘 처음 봤지만 제 전부를 주고서라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게…….”
“만나는 사람, 있으십니까?”
만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저 고백을 받아 줄 만큼 아이기스에겐 여유가 없었다.
모든 걸 체념하고 지아비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힐탄이 떠난 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그녀에겐 힐탄이 준 증표도 있었고 그 증표를 가지고 가야 할 곳도 있었으니까.
“…죄송해요, 전 남편이 있습니다.”
“아아, 역시 그러시군요. 사실 그럴 것 같긴 했습니다. 당신은 무척이나 아름다우니까요. 아까 제가 했던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그때부터 아이기스는 공기가 불편하게 느껴졌고 얼른 밥을 먹고 그와 헤어졌다.
그런 다음 어두운 밤거리에서 한참을 묻고 물어 라핀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팔라디움 외곽에서 조그마한 잡화점을 운영하는 사내였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아이기스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런데 덩치가 어찌나 크던지 그 덩치에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니 마치 이불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힐탄…….”
라핀은 힐탄의 팬던트를 보더니 마치 그게 유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꼭 안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얼마간 흐느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 상관의 증표를 가지고 왔으니 그분의 뜻을 빌어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상관이요?”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힐탄을 상관이라고 표현했으나 힐탄처럼 그 이상으로는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라핀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그는 과묵한 사내였다.
잡화점도 조용했다.
장사가 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그는 힐탄처럼 글과 예의를 알았고 요리도 할 줄 알았다.
그가 하는 요리는 힐탄이 해주던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때때로 힐탄이 생각났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아이기스는 이 평화가 깨지지 않길 바랐으니까.
라핀은 아이기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모셔야 할 사람처럼 묵묵히 하수인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날 밤.
그날은 마녀가 찾아왔을 때처럼 환한 달빛이 도드라지는 밤이었다.
아이기스는 그 달빛이 보기 싫어 커튼을 쳤다.
하지만 달이 떠서였을까?
얼마 뒤,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쿠당탕!
누군가 구르는 소리.
가재들이 떨어지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등이 들렸다.
2층에 있던 아이기스는 너무 놀라 아래로 내려가 상황을 살폈다.
그러자 그곳에는 상처투성이의 라핀과 익숙한 복식의 암살자들이 라핀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기스의 인기척을 읽은 암살자 하나가 아이기스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저분은 건드리지 마라.”
“싫다면?”
“네놈들은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힐탄보다도 약해 빠진 주제에 우리 전부를 상대하겠다고? 왜? 너도 증표를 주고 다른 동료한테 저년을 떠넘길 생각인가? 그래 주면 우리야 고맙지. 저년만 있으면 파르갈의 잔당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라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에 두르고 있던 커다란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로브 아래 가려져 있던 거대한 몸뚱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몸뚱이를 이루고 있는 건 우락부락한 근육과 무수한 상처들이었다.
라핀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희들은 오늘 여기서 모두 죽는다.”
“헛소리!”
그 말과 함께 라핀의 몸에서 일순 섬광이 뿌려졌다.
그 눈부신 섬광에 아이기스는 두 눈을 가린 채 고꾸라졌고 눈을 뜨지 못하는 사이 신음 소리와 파열음이 뒤엉켜 굴렀다.
진한 피비린내.
아이기스가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 놀랍게도 라핀은 자신을 급습한 암살자들을 모두 해치워 냈다.
“후우우…….”
그는 뜨거운 숨을 토하며 무너지지 않은 장식장 한켠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다양한 술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파핀은 그중에서 아이기스도 아는 꽤 독한 독주의 마개를 뜯어 병째로 들이켰다.
그가 술을 반병쯤 비우고 난 뒤였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처음이었다.
그가 아이기스에게 먼저 대화를 요청한 건.
그녀는 피와 시체 사이를 걸어 라핀이 일으켜 세운 테이블 앞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무래도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라뇨?”
“혹시 파르갈에 대해 아십니까?”
“아뇨, 아까도 파르갈이라는 이름을 듣긴 했는데 파르갈이 대체 뭔가요?”
“파르갈은 옛 제국에 충성하던 기사단의 이름입니다.”
“옛 제국이라면…… 설마 테리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이기스는 그제서야 파르갈에 대해 기억해냈고 라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힐탄 님은 파르갈의 단장이셨고 저는 그분의 부관이었습니다.”
이십여 년 전 테리언이라는 제국이 있었다.
강대하던 제국이었으나 제국의 횡포를 버티지 못하던 여러 왕국들이 힘을 합쳐 테리언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고.
테리언이 정복되던 날,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전쟁 범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연히 파르갈도 원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야 할 운명이었다.
파르갈은 테리언의 번영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암살과 학살을 자행했던 기사단이었으니까.
“하지만 저희는 처형당하지 않고 코어를 파괴당한 채 추방되었습니다. 기사들은 그저 충성을 맹세한 도구로써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다는 명분으로 말이죠. 하지만 대의적으로는 추방에 그쳤으나 저희 손에 죽은 이들의 원한에서까지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습니다.”
“힐탄 님이 초야에 묻혀 살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셨군요.”
“한때 학살을 자행했던 자로서 이런 말씀 드리기엔 뭣하지만 우린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죽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변명한다고 한들 피해자들을 납득시키긴 힘들었습니다.”
“그럼 좀 전의 암살자들도…….”
“예. 파르갈에 원한이 있는 자들로 구성된 암살자들이거나, 혹은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어쌔신들일 겁니다. 그리고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절 찾아올 게 분명합니다. 이미 이곳의 위치가 노출되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아이기스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라핀이 잡화점 카운터 아래를 뒤적이더니 그 안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내밀며 말했다.
“저와 함께 있으면 당신도 오해를 받아 언젠간 죽임 당하고 말 겁니다. 그러니 이 돈을 가지고 이만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악연의 굴레 속에 들어오셔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을 테니까요.”
잘그락-
주머니 속에 비친 금화.
그러나 아이기스는 가득 든 금화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다.
아이기스는 한참을 침묵한 끝에 자신의 후드를 벗었다.
라핀은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랐다.
아이기스의 아름다움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그는 재물도 여자에도 관심 없는 은둔자였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놀란 이유는 그가 그녀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마녀의 미움을 산 공주. 그게 당신이었군요.”
“저를 아시나요?”
“소문은 빠르니까요. 그리고 단장님이 어디로 떠나셨는지도 방향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떠나신 방향과 당신의 외모를 보니 왜 당신이 그분의 증표를 가지고 있는지 납득이 갔습니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일평생 사랑 따윈 안 하신다더니 역시…….”
그는 뒷말을 흐렸다.
뻔한 말이었으니까.
아이기스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죠?”
“제가 역사로 배운 테리언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라 배웠고 그중에서도 파르갈은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영광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식은 건재하겠죠. 그래서 한때는 대륙 전역을 누비며 정벌 전쟁을 다녔던 파르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신과 마녀는 실재하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라핀은 눈을 감더니 프흐흐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시선을 아래로 두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직접 저주의 굴레를 끊으시려는 겁니까?”
“할 수만 있다면요.”
“힘드실 텐데요?”
“신과 마녀는 실존하는군요?”
“세상은 넓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들도 더러 존재하구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신과 마녀도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직자들이 성법을 구사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들이 불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만한 생각입니다. 전 살면서 딱 한 번 그런 존재들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라핀의 말에 순간 아이기스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리웠다. 그에 라핀이 또 한 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만 제 상관이자 존경하는 단장님께선 그런 존재를 물리친 적이 있으십니다.”
“힐탄 님이요?!”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못할 것도 없죠.”
“혹시 그 존재가 어떤 것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리치였습니다.”
“리치요?”
“거대한 목적의식 때문에 명계의 부름을 거부하고 삶의 진리를 역행한 존재. 저희는 한때 리치가 지배자로 군림하는 엘더산을 지나가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리치가 위험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칼튼 요새를 공략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리치를 쓰러뜨리셨나요?”
“쓰러뜨리진 못했습니다. 다만 군대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녀석을 쫓아낼 수 있었을뿐. 그리고 그때 리치를 베어 쫓아내신 게 바로 단장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분은 제가 봤던 인간들 중 가장 강력한 분이셨으니까요. 아무튼 신과 마녀를 죽이고 싶다면 적어도 제가 모시던 단장님보다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불가능해요. 당신처럼 유약한 몸으론. 왜냐면 저도 해내지 못한 경지니까요.”
“해 보기 전까진 모를 일이죠. 아까 그러셨잖아요.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설마 제게 거짓말을 하신 건가요?”
“푸흐흐, 제가 한 말에 잡아먹히게 됐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하려는 건 무모한 도전입니다. 어쩌면 평생이 걸려도 해내지 못할 수도 있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제게 방법을 알려 주세요.”
그 말에 라핀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을 더듬었다.
그러자 나무로 된 가벽이 뒤집히며 무수한 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핀은 그중에서 평범해 보이는 단검 한 자루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볼더산에 가면 단장님의 스승님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전설 속 검성이라 불리는 분으로 단장님을 가르치셨던 그분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 배운다 한들 절대로 초월적 존재를 베지 못할 겁니다. 이건 그분이 단장님께 하사하셨던 도제간의 증표입니다.”
볼더산.
그녀가 가야 할 다음 행선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