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7화
청담동의 펜트하우스.
땀에 흠뻑 젖은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펼쳤다.
“렌! 드디어 완성했어!”
“정말입니까, 신 상?!”
그 말에 렌이 후다닥 뛰어와 함께 만세 하며 기뻐해 주었다.
“대단합니다, 신 상! 난 아직 2서클인데 신 상은 벌써 4서클이라니!”
“시작은 내가 더 빨랐잖아, 너도 얼마 안 있음 3서클이 될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헨리가 떠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헨리가 보낸 전령인 렌과 만났고 이제 같은 비밀을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게이트 레이드는 언제부터 나갈 겁니까?”
“보아 하니 5서클은 돼야 압도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으흠, 그렇다면 더더욱 정진해야겠군요.”
“그렇지. 그래도 오늘은 드디어 4서클을 달성했으니 하루 정도 쉬고 내일부터 다시 달려야겠어.”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우리 변신 마법으로 위장해 요 앞에 있는 국밥집에 다녀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상도 국밥 말하는 거지? 좋지, 거기.”
같은 비밀을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의 목표도 같았다.
재하가 가진 헨리의 마법 지식을 바탕으로 힘을 기른 후 정부도 무시 못 할 정도의 힘을 쌓고 어비스에 입탑하는 것.
그때였다.
위이잉!
핸드폰 진동 소리.
발신자는 협회장이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재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렌도 호들갑을 떨었다.
“협회장이네요? 무슨 일일까요?”
“모르지.”
“받을 거예요?”
“아니.”
렌이 방문한 이후 첫 전화였다.
그도 그럴 게 헨리가 한국을 떠나기 전, 협회장에게 재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고 갔으니까.
그런데도 연락이 왔다는 건 어지간히 급한 사안일 터.
그렇기에 받지 않았다.
정말 급한 사안이라면 문자로라도 용건을 남길 테니까.
얼마 뒤 짧은 진동이 울렸고 재하의 예상대로 협회장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그런데 문자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어비스가…… 사라졌다고?”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재하의 말에 렌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재하는 황급히 테라스로 나가 바깥을 확인했다.
그런데 협회장의 말대로 정말 항상 보이던 어비스가 사라져 있었다.
“어, 어?”
“어비스가?!”
놀란 마음에 티비를 켰다.
뉴스에는 갑자기 사라진 어비스에 대해 열띤 토론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인터넷에서도 온갖 추측들이 펼쳐지며 난리가 났다.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 아, ㅅㅂ 열쇠 조각 겨우 다 모았는데
- 이제 딱 들어가려고 했는데 ㅅㅂ 하필이면 왜!
SNS에 업로드 되는 헌터들의 게시글을 보아, 아무래도 이젠 신규 입장도 안 되는 모양.
렌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신 상, 이대로 어비스가 정말 사라져 버린 거라면……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그게…….”
재하는 말문이 막혔다.
여지껏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 헨리의 뒤를 쫓는 것만 생각해 왔는데 이런 식으로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릴 줄이야.
그때,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어비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지금, 어쩌면 게이트 또한 사라지고 더 나아가 몬스터의 존재와 헌터들이 가진 이능 또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추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 한 말이었다.
렌이 커진 눈으로 말했다.
“그, 그러네요! 어비스를 시작으로 게이트와 몬스터, 헌터들이 가진 시스템의 힘까지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죠?”
“그땐…….”
그 순간.
“어쩌긴 뭐가 어째, 그땐 너희가 지구 유일의 이능력자들이 되는 거지.”
낯선……
아니,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들어 순간 분간해 내지 못한 목소리.
다름 아닌 헨리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런 헨리의 등장에 두 사람은 자리에 선 채로 얼어 버렸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만큼 큰 충격을 받았으니까.
그 모습들에 헨리가 혀를 차며 씩 웃었다.
“쯧쯧, 고얀 놈들. 간만에 온 사람 무안하게 유령 취급이라니.”
“스, 스승님!!”
“헨리 씨!!”
헨리의 말에 두 사람은 그제서야 헨리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남자 둘에게 안긴다는 게 퍽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헨리는 간만에 만난 제자들을 강아지 어루만져 주듯 토닥여 주었다.
오랜만의 재회였다.
*
두 사람이 진정되기까지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헨리는 그 과정을 모두 기다려 주었고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그제서야 그간의 사정들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었다.
“……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메르키스 족이라는 이차원 종족의 동포 찾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구요?”
“그래.”
“그리고 이젠 헨리 씨가 어비스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거구요?”
“그래.”
“세상에 맙소사…….”
“…….”
헨리의 설명이 끝났을 때 재하와 렌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은 꽤 길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충격이 큰 모양.
한참의 침묵 끝에 재하가 물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실려고 저흴 다시 만나러 오신 건가요?”
“그런 것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너희들에겐 특별히 선택권을 좀 주려고 한다.”
“선택권요?”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어비스 내에선 현재 편입된 세상들 중 원하는 곳에 한해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주고 있다. 어비스가 그들의 세상이 나타나기 이전으로 말이지.”
“지구도 그렇게 하실 건가요?”
“그럴 생각이다. 그편이 깔끔하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반대할 텐데요?”
“살아 있는 자가 반대한다고 해서 억울하게 죽은 이를 무시하면 안 되니까. 물론 어비스가 시작되고 막대한 부를 쌓은 인간들도 있고 탑 안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플레이어들도 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역행 목록에서 제외해 주기로 했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한테 주신다는 선택권은 대체 뭔가요?”
잠자코 듣고 있던 렌이 물었다.
그 물음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내가 마법을 배우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내 제자를 구슬려 잘도 마법을 배우고 있구나.”
“하하…… 그런 건 그냥 넘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내 심부름을 해 주었으니 그 값이라고 생각하고 허락해 주마. 무튼, 내가 너희에게 제안하고자 하는 건 내 밑에서 내 일을 돕는 어비스의 관리자가 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다.”
“관리……자요?”
“졸지에 어비스까지 떠맡게 되어 해야 될 일들이 엄청 많아졌거든. 마스 녀석의 동포란 놈들도 찾아줘야 하고.”
“그걸 진짜 찾아주시게요? 보통 일이 아니실 텐데?”
“약속은 약속이니까.”
“으음.”
재하가 고민하는 기색을 띠자 렌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잽싸게 손을 들며 말했다.
“전 할래요! 무조건 합니다. 시켜 주세요, 관리자!”
“의욕이 넘치는구나.”
“어차피 저도 역행 목록에서 빼 달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전 고아원 출신이라 아쉬울 게 없거든요. 이러나저러나 시궁창 같은 삶의 반복이라면 차라리 어비스의 주인인 헨리 씨 밑에서 일하겠습니다. 아니, 일하고 싶습니다!”
과연 렌이었다.
렌은 계산이 빨랐고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재하는 여전히 고민 중에 있었다.
헨리가 말했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아, 그게 아니라, 저도 하고는 싶은데요…….”
“근데?”
“제가 스승님 밑에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마법도 이제 겨우 4서클이고 어비스는 한 번도 안 가 봤는데요…….”
잦아드는 목소리에 렌이 헨리의 등을 팡! 치며 말했다.
“신 상! 신 상답지 않게 왜 이리 주눅 들어 있습니까? 누구나 처음부터 일을 잘하진 못합니다! 다 배우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스카우터이던 시절에도 그랬어요!”
“그,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근데…… 헨리 씨?”
“왜 그러지?”
“만약 어비스에서 일하게 되면 더 이상 지구에는 오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그 물음에 헨리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가족도 없다면서?”
“가족은 없지만 어비스에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어비스에서 일하게 되면 딱히 보수 같은 것도 필요 없을 텐데 먹는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관리자들에게 보수가 무슨 소용일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에 관리자가 되는 것인데.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쉴 때는 지구로 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하지만 지구에 영향이 가는 행동을 하면 즉각 출입을 금지시키겠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저는 그거면 충분해요!”
헨리는 이어서 재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느냐?”
“아, 아닙니다! 스승님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두 사람의 합류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위이잉!
그때, 또다시 재하의 전화기가 울렸다.
협회장이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재하는 헨리를 물끄러미 보았고 헨리는 턱짓으로 받으라 했다.
그 허락에, 재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재하 씨! 드디어 전활 받아 주시는군요! 혹시 제가 보내드린 문자는 보셨습니까? 지금 세상이 난리입니다! 갑자기 어비스가 없어졌다구요!
“압니다.”
- 사태가 심각합니다! 전문간들이 추측하길 이대로라면 게이트는 물론 헌터들이 가진 플레이어 시스템까지 사라질 수 있다는데 그렇게 되면 저희들의 입지가……
“그래서 어쩌라고?”
- 네?
“내 알 바 아니잖아. 힘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 난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헌터가 아니야. 아, 그래도 카드는 잘 썼어. 집도 이런 집은 처음 살아 보는데 몇 달 살아 보니 감흥도 별로 없어지더라.”
- 네? 재하 씨,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속다니요?
“그동안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몰라. 근데 이제라도 말할 수 있게 되니 속이 다 후련하네. 욕할 이유는 없으니까 욕은 안 할게. 그동안 고마웠어.”
- 네? 그게 무슨? 재하 씨? 재하 씨?
“수고.”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재하가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렌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마지막이라고 그렇게 화끈하게 저질러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마지막이니까. 어차피 시간이 역행되면 다 기억 못할 일들이잖아?”
“그것도 그렇죠.”
제자의 귀여움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하고 싶은 일은 다 끝난 건가?”
“대충 그렇긴 한데…… 스승님, 혹시 저희한테 주어진 시간이 촉박합니까?”
“별로. 이제 내가 하는 일에 촉박함은 없다. 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으니.”
“그럼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식사나 하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식사?”
“요 앞에 돼지국밥 잘하는 데가 있거든요. 안 그래도 좀 전에 렌이랑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에 렌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느낌상으론 이번이 마지막 식사가 될 것 같은데 국밥 같은 걸 먹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라멘이나 초밥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극히 일본인 입맛이라 안 땡기네. 스승님은요?”
두 사람의 물음에 헨리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최후의 만찬도 나쁘지 않겠지. 뭐가 됐든 먹으러 가자꾸나.”
“옙! 그럼 바로 모시겠습니다!”
세 사람은 회귀될 지구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펜트하우스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제는 당연히 협회에서 준 것으로 할 예정이었다.
《8서클 마법사의 환생 2부》 마칩니다
작가의 말
그동안 8서클 마법사의 환생 2부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2부 연재였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연재할 수 있게 되었고 운 좋게 생긴 기회이니 만큼 질질 끌지 않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만 빠르게 전개하였습니다.
2부 연재를 하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모두 다 제 성장의 밑거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헨리의 이야기는 아직 30편 정도가 남아 있으며 남은 이야기는 외전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무거운 이야기보단 가벼운 일상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이고 항상 쓰고 싶었던 다른 이야기들을 담아 볼 생각입니다.
덧붙여 제 글을 기억해 주시고 끝까지 봐주신 독자분들과 2부 연재의 기회를 주신 로크 미디어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외전으로 금방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 자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