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6화
허무함에 눈을 감았던 헨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 무엇이 됐든 자신의 사정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모든 건 상대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 누가 마스터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냐고.
이러한 점에선 헨리의 생각도 같았다.
이해했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마스터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지.’
헨리가 물었다.
“그럼 어비스 시스템은 왜 만든 거지? 세상에 몬스터를 풀고 탑 내에서 경쟁시키는.”
“말에 어폐가 좀 있네요. 몬스터는 풀었지만 경쟁을 시킨 적은 없습니다. 경쟁은 그냥 자기들이 알아서 한 거지.”
“뭐?”
“사는 집이 커지면 가장 힘든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관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만든 시스템은 여러 가지 수고를 덜게 해 주죠. 생존과 상승심이라는 목적하에 계속해서 몸부림쳐야 하니까요.”
“너의 재미를 위해 벌인 일들이 아니고?”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갑자기 탄생한 저로서는 서사가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는 게 좋았습니다.”
“그렇군.”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가 네 마음대로 했듯 나 또한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다.”
“그건 억지가 아닐까요?”
“왜 억지라고 생각하지? 네가 한 행동들을 존중받고 싶다면 너 또한 내 행동을 존중해야 할 텐데? 만약 그게 싫다면 날 강제로 추방시키거나 어비스에서 날 배제시키면 되잖아?”
“그건…….”
그가 자신을 이곳에 초대했을 때 헨리는 확신이 있었다. 헨리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말했다.
“내 말이 틀릴까? 넌 어비스를 만든 자답게 어비스라는 먹이 사슬에서 포식자의 위치에는 오를 수 있었지. 하지만 절대자는 되지 못했다. 플레이어 시스템은 네가 만든 힘이지만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힘들에 기반되어 만들어졌으니까.”
이 또한 확신이 있었다.
거인들이 가진 힘이 그랬고 스카샤가 가졌던 포스가 그랬으니까.
어비스에서 최고 힘으로 분류되는 에테르는 기존에 존재했던 힘이었기에 에테르 자체가 강화되면 어비스의 주인인 마스터조차도 어찌 할 수가 없었던 것.
‘만약 마스터가 모든 걸 제어 할 수 있었다면 거울용이 합격기를 피하는 일도 없었겠지.’
아무리 마스터가 재미를 추구한다곤 하지만 재미란 것은 본인의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나 즐길 수 있는 것.
게다가 동포를 찾아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놈이 고작 재미 때문에 최후의 방어 프로그램인 거울용을 그런 식으로 설계했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헨리의 눈이 커졌다.
“넌 거울용과 관리국, 그리고 세이버까지 날려 버린 플레이어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던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울용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날 더 이상 어찌 할 방법이 없었겠지. 그래서 나만 따로 초대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고.”
“그, 그건…….”
마스터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헨리의 말이 이어졌다.
“네 말마따나 개인의 사정과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힘없는 놈은 약육강식과 강자존에 의거해 따를 수밖에 없지.”
그 말과 함께 헨리가 화산검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몰랐다면 모를까, 내가 이곳에 오기까지 너무 많은 자들의 신세를 졌다. 그러니 난 그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넌 나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안전을 약속해 준다고 했지만 설마 그 말을 정말로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 그건 진심입니다! 당신을 어비스에서 분리시킨다고 해서 당신의 힘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건 상관없다. 난 너로 인해 발생할 리스크를 조금도 지기 싫은 것뿐이니까.”
“설마 저를 죽이고 어비스를 파괴하실 건가요?”
“아니.”
“네?”
“그 반대다.”
“…예?”
“어비스를 가져야겠다. 어비스를 가져서 내 휘하에 둬야 안심이 되겠어. 그러니 내게 어비스를 넘겨라.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네에?!”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스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비스의 소유권을 넘기라니요?”
“말 그대로다. 네 말을 듣고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리스크를 없애면서 차후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할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만약 어비스를 해체하더라도 나중에 네가 새로운 어비스를 만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
“그건……!”
“또 한 가지. 만약 널 죽이고 어비스를 해체하더라도 다른 차원의 어비스가 나타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되지? 새로운 어비스의 주인은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새로운 시스템을 굴리고 있을 텐데 만약 상성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마스터는 할 말을 잃었다.
헨리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기 때문이다.
“난 네가 만든 어비스의 새로운 주인이 되겠다. 그러니 넌 죽은 국장을 대신해 새로운 관리자가 되어라. 그리고 내 뜻에 맞춰 새롭게 어비스를 구성해라. 그게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꿀꺽.
마스터는 침을 삼켰다.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스터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세상을 접하며 그 누구보다 잇속이 밝고 계산이 빨랐다.
그러니 현재 상황이 외통수임을 아는 것이다.
마스터가 한참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말뿐인 약속은 믿지 않겠다.”
마스터의 대답을 들은 헨리는 양손바닥을 붙였다.
그리고 실로 오래간만에 마법 하나를 발동시켰다.
바로 ‘권속 계약의 서’였다.
헨리가 권속 계약진을 눈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네 뜻이 진실 된다면 내게 영혼으로써 종속되어라. 그리 하면 나 또한 널 존중하여 네가 찾는 동포들을 찾는 것을 도울 것이니.”
마스터의 눈앞에 권속 계약의 서가 마법진의 형태로 떠올랐다.
마스터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더니 숨을 크게 내쉬며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화아아!
빛이 뿜어졌고.
“너는 이제부터 나의 소중한 권속이다.”
그 말에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네 이름은 마스다. 나를 부를 땐 주인님이라 부를 것이며 현 시간 부로 네가 가진 모든 것들…… 물론 목숨까지 모든 것이 내 영혼에 귀속되었음을 알린다.”
“…예, 주인님.”
어비스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스터……
아니 마스를 새로운 권속으로 받아들이면서 헨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마스’의 역사를 읽는 것이었다.
헨리가 눈을 감는다.
*
“……그래서, 얘가 어비스의 주인이고 주인님께서 새로운 어비스의 주인이 되셨다구요?”
“그래.”
이후.
헨리는 즉각 클레버를 최상층으로 불러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우스’에 이어 이제는 ‘어비스’까지 관리하게 되었으니 마스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으니까.
자초지종을 알게 된 클레버가 한쪽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말했다.
“…근데요 주인님, 의도도 좋고 왜 이런 선택을 하시게 된 건지도 잘 알겠는데 이러한 선택을 다른 플레이어들은 납득할까요? 이미 마스로 하여금 희생된 사람들이 많을 텐데?”
“당연히 납득 못하겠지.”
“네?”
“하지만 현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스를 죽이는 것뿐이겠지. 그래서 내가 어비스의 주인이 된 것이다. 어비스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조작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이해를…… 못했습니다?”
“원하는 자들에 한해 시간을 되돌릴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테니.”
“아?”
헨리의 해결책에 클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 또한 시간을 되돌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으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마스가 말했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한 번도 못 해 본 생각인데…… 그런 거 막 되돌려도 됩니까? 저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아이템이나 스킬에 담을 생각은 안 해 봤거든요.”
“누가 다루냐에 따라 다르지. 누군가는 시간의 흐름을 섭리에 맡겨야 한다곤 하지만 시간조차 지배하에 둘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도구이자 약이 된다. 특히 네놈 같은 놈들이 저지른 일들을 처리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인.”
“네에…….”
“대회의를 열겠다. 회의에 초대할 사람들은 현재 어비스에 편제되어 있는 모든 세상의 대표자들로 하고 대표자를 뽑지 못하겠다면 모두가 와도 상관없다. 그들 전부를 소집해 ”
“하지만 그럼 너무 많을 텐데요? 시간도 많이 걸릴 거고.”
“상관없어. 그럼 이 모든 걸 하루아침에 정리하려 했느냐?”
“그건 아니지만…….”
“저, 잠시만요.”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마스가 손을 들었다. 그에 두 사람이 마스를 쳐다보자.
“그러지 말고 그냥 아카이브 시스템으로 플레이어들한테 공지 띄우면 됩니다.”
“공지?”
“공지 사항의 줄임말입니다. 의도는 알겠으니 대회의장으로 사용할 장소를 새로운 스테이지로 만들고 그곳으로 모두 집결할 수 있게끔 하겠습니다. 또 여지껏 있었던 일들을 모두 정리해서 그들에게 보내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마스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클레버가 말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관리자 하나는 잘 뽑은 것 같네요.”
“그런 것 같군. 그럼 이제 슬슬 정전된 어비스에 불부터 켜는 게 좋을 것 같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 말에 마스가 어비스 시스템을 조작하더니 이내 곧……
- 오, 불 들어왔다.
- 뭐지? 갑자기 왜 들어온 거지?
- 시스템이라도 복구된 건가?
각 층에 흩어져 있는 파티원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그럼 일을 시작하지.”
“예.”
명령을 받은 마스가 공지 사항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약속대로 마스는 그간 자신이 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시간 역행에 대한 선택지를 주었고 그 과정에선 수많은 찬반 의견들이 대립했다.
“…그럼 정리하자면 모두들 어비스에 편입하되 각 차원들을 독립된 차원으로 인정하고 어비스에 위험이 닥쳤을 땐 힘을 모으는 것으로…….”
“에, 또…… 시간을 되돌리는 걸 원치 않는 자들은 스테이지 밖에 나와 시간 역행에 몸담지 않는 것으로.”
시간이 꽤 걸렸고 아직 많은 것들이 조율되진 않았으나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어비스에 편입되기 전의 세상을 그리워했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시간 역행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고향보다 어비스에 더 오래 몸담았던 이들은 여전히 플레이어 시스템을 고수하며 고향과 어비스의 다른 스테이지들을 자유로이 오가며 플레이어로서의 삶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회의 결과를 정리한 마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취지는 좋지만 아무래도 문제가 많이 생길 겁니다. 어비스에 흡수되기 전까지 시간을 되돌리면 죽은 이들이야 모두 살아나겠지만 그들끼리의 시간선도 꼬일 거고 또 되살아나선 안 되는 자가 되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 봤자 그건 그들 차원의 문제겠지. 강제로 빼앗은 목숨과 자유니 그것들은 돌려주는 것이 맞다. 덧붙여 늘어난 인구로 기근 같은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면 그건 네가 책임지고 최대한 문제를 처리해야겠지.”
“너무 탁상 행정 아닙니까……?”
“엮인 세상이 많은데 그깟 문제들 하나 해결 못할까, 물론 그 일을 관리하는 관리자야 힘들겠지만 모든 게 다 네 업보잖아? 그리고 일이 힘들뿐이지 처리 못할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말을 잇던 마스가 헨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정말 제 동포들을 찾는 것을 도와주실 겁니까?”
“도와주마. 난 가우스의 신으로서 영원을 사는 존재다. 그리고 차원의 바다를 누빌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지. 그러니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네가 동포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난 밀린 내 일들을 해야겠군.”
“주인님의 일이요?”
“그래.”
말을 마친 헨리는 그간 익힌 어비스 시스템을 열어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뒤, 반가운 메시지가 헨리의 눈앞에 떠올랐다.
[ <본층>의 출입 페널티가 삭제됩니다. ]
이제는 어비스 밖으로 나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