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3화
“가문?”
“그게 무슨 소리야?”
데를로.
플레이어 데를로.
다른 이름은 없다.
파티원 정보에는 그렇게 적혀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데를로는 진심이었다.
“데를로 파인 트릴로지. 플레이어 시스템에는 데를로라고 등록했지만 내 진짜 이름은 데를로 파인 트릴로지다.”
“그래서, 네가 저기 적힌 트릴로지 왕가의 일원이다?”
“일원 정도가 아니라 난 왕자였다. 적장자였고 트릴로지 왕가를 이끌어 갈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그럼 멸망의 날은 뭔데?”
듣고 있던 극독왕이 물었다.
그에 신궁 마티아스가 답했다.
“뻔하지. 눈치를 보니 어비스에 침공되던 날 같은 게 아니겠어?”
그 말에 데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내가 살던 세상에 어비스의 침공이 시작됐고 최후라 여겼던 날을 멸망의 날이라고 불렀다. 근데 문제는…… 그 날의 이름을 아는 게 나밖에 없다는 거지.”
“뭐?”
“세상이 끝난 날이었다. 우리 왕가는 끝까지 어비스에 항쟁했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 하지만 결과가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고 생존자가 나밖에 안 남았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이 바로 멸망의 날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데를로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데를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뭔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혼자서만 알고 있는 명칭을 시스템이 알고 있다?’
대체 어떻게?
개척왕이 물었다.
“그럼 그날의 진실이란 건 뭐지?”
그 물음에 데를로는 잠시 침묵하던 끝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혹시 너희들은 너희가 탑에 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해 아나?”
그에 저마다 다른 대답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절반은 알고 있다는 것, 나머지 절반은 모른다는 것.
그 대답들에 다들 반응이 갈렸다.
“모른다고?”
“안다고? 갑자기 탑에 초대된 게 아니었어?”
“초대? 소환이 아니고?”
“1층인 튜토리얼 층을 거친 게 아니고?”
“다들 그만.”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에 염제가 상황 중재에 나섰다.
“그래서, 데를로 넌 알고?”
“난 모른다. 최후의 전투가 있던 날, 분명 나를 비롯한 모두가 죽었고 나 혼자 탑에 소환되었으니까.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저기 적혀 있는 ‘진실’이란 게 설마 나만 탑에 소환된 것에 대한 진실이라면…….”
말을 잇던 데를로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어.”
결심을 마친 데를로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오며 기둥에 손을 뻗으려 하자 순간 개척왕이 데를로의 손목을 잡았다.
“뭐하는 거지?”
“아무래도 확인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수상하니까. 멸망의 날이란 이름은 분명 너 혼자만 알고 있다 했는데 어비스가 알고 있는 점이 수상하다.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함정?”
그 말에 데를로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개척왕의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
물론 데를로도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기둥이 말하는 그날의 진실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상관없을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말에 데를로가 ‘전사의 눈’이라는 위험 감지 스킬을 사용했다. 데를로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위험 요소는 감지되지 않는다. 그저 에테르 군집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 그리고 나는…….”
말끝을 흐리던 데를로가 결심했다는 듯 대답했다.
“최정상에 대한 것보다 그날의 진실이 더 궁금하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
“…….”
그 말에 모두들 침묵했다.
최정상을 위해 모인 멤버들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택하겠다는데 어찌 말릴까?
헨리가 대답했다.
“알겠다.”
“헨리!”
“놔둬. 말릴 수 없는 문제니까.”
헨리의 말에 데를로가 감사를 표했다.
“존중해줘서 고맙다.”
데를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기둥에 손을 댔다. 데를로가 형틀에 손을 꼭 맞춰 올린 순간.
“흡!”
데를로는 순간 전기가 통한 사람처럼 숨을 끊어 삼켰으나 이내 곧 눈을 감고 기둥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그 광경을 얼마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데를로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
“…….”
데를로는 정말로 그날의 진실을 본 것일까?
헨리가 눈물 흘리는 데를로를 뒤로한 채 말했다.
“…계속 나아가겠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멤버들 사이에는 침묵이 도래했다.
긴 복도가 이어졌고 침묵은 다음 방이 나타날 때까지도 계속 됐다.
그리고 또다시 커다란 방이 나타났을 때 그 방의 중간에는 데를로를 유혹했던 또 다른 기둥이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죽은 피안느의 진실 ]
그것을 본 염왕이 말했다.
“피안느의 진실? 무슨 진실의 기둥이야? 발견되는 것마다 죄 진실이래?”
그때, 이번에는 다른 멤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냥꾼이란 위명을 가진 ‘몰트’라는 플레이어였다.
몰트의 반응에 빙제가 탁 소리 나게 이마를 짚었다.
염왕이 물었다.
“이번엔 또 뭐야, 피안느가 뭔데?”
“피안느는…… 어비스 밖, 내가 원래 살던 세상에서 죽은 내 약혼자다.”
“얼씨구. 그럼 또 사연이 있겠군. 너 혼자 이해 못할. 저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
몰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는 모양.
그 말에 빙제가 말했다.
“이제 알겠다. 이제 보니 이것들 전체가 함정이었어.”
“함정?”
“혹시 몰라 데를로 옆에 시야를 붙여 놓고 왔는데 다들 봐봐.”
빙제가 공유안을 통해 시야를 공유하자 여전히 눈 감은 채 망부석처럼 기둥에 손을 얹은 데를로가 보였다.
“아직 무슨 변화는 없지만 저 상태에선 누가 죽여도 할 말 없을 만큼 무방비 상태지. 그리고 내 생각엔 이게 이곳 ‘세이버’라는 곳의 방어 시스템인 것 같다.”
그 말에 염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무력이 아니라도 불청객을 제거하거나 붙잡아 둘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이곳 세이버의 경비 시스템은 그 수단으로 호기심을 사용하는 모양이고.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턴 합의가 좀 필요할 것 같군.”
합의.
간단한 내용이었다.
앞으로는 어떤 정보가 나오더라도 파티를 이탈하지 않겠다는.
그리 해야 더 이상의 전력 손실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합의는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뭐야, 왜 다들 말이 없어?”
헨리를 비롯한 몇몇의 경우엔 염왕의 말에 쉽게 동의했다.
하지만 절반에 해당하는 파티원들…… 특히 자신이 어비스에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지 모르는 자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최상층도 중요하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파티원들.
그 말에 염왕이 덜컥 화를 냈다.
“방금 데를로 꼴을 보고도 그런 말들이 나와? 지나온 과거가 그리도 중요해? 저놈들의 목적이 뻔히 보이는데?”
“……중요한 사람도 있긴 하지.”
“뭐?”
“염왕, 넌 없나? 살면서 겪어 봤을 이해 못할 일들에 대한 진실을.”
“없다곤 못하지. 하지만 노림수가 뻔히 보이는 덫에 걸릴 만큼 멍청이는 아니다.”
“무엇에 가치를 두냐에 따라 다르겠지.”
대답한 건 몰트였다.
“피안느는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어비스에 들어온 지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난 여전히 피안느를 잊지 못해. 앞으로도 못 잊을 거고. 왜냐면 난 그녀가 갑자기 죽어서 이별하게 됐으니까.”
몰트는 피안느와 뜨겁게 사랑했다.
세상의 그 어떤 연인들보다 뜨겁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어느 날 피안느는 죽어 버렸고 몰트는 광인이 되어 살았다.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추측하기론 피안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지만 몰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을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 따윈 없을 테니까.
몰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질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그 눈을 본 염왕은 한숨을 삼켰다.
‘제기랄, 제대로 당해 버렸군.’
몰트의 말에 모두가 대답을 아끼자, 몰트가 기둥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짧지만 함께해서 영광이었다.”
그 말과 함께 몰트가 기둥 위에 손을 올렸고 데를로와 마찬가지로 전기에 감전된 듯 숨을 끊어 삼키더니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살아 있는 망부석이 되었다.
“……제기랄.”
입 안이 쓰다.
세이버의 방어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직 자리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있었다.
파티원들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간의 침묵을 깬 건 헨리였다.
“우린 국장을 잡을 때까지 계속 전진하겠다. 그리고…… 이제부터 진실을 택할 자들 또한 말리지 않겠다.”
억지로 말린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 너무 컸다. 진실은 무력보다 더 큰 위협이었으니까.
그 말에 모두들 무언의 동의를 했고 파티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엉망이구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글우글 하던 파티는 이제 일곱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기존의 멤버였던 헨리와 클레버, 그리고 개척왕과 염왕, 빙제를 제외하면 극독왕 제냐와 신궁 마티아스가 전부였다.
헨리는 이들이 정예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남아 있는 이들은 모두들 ‘진실의 기둥’이 보여 주는 진실의 유혹을 떨쳐 내는데 성공했으니까.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염왕이 말했다.
“이제 헨리 너만 남았군.”
클레버를 포함해 모두들 진실의 기둥을 통과했다.
그러나 아직 단 한 사람.
헨리의 것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공동이 나타났으며 모두들 그곳에 적힌 글귀를 보았다.
그리고 모두들 헨리를 보았다.
여기 적힌 글귀는, 적어도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헨리는 그 글귀를 건조하게 보았다.
클레버도 말을 아꼈다.
염왕이 물었다.
“표정을 보니 널 위한 기둥인가 보네. 어떡할 거냐?”
그 물음에 헨리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아귀에 업화옥을 소환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세이버가 나에 대해선 별로 조사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렇지 클레버?”
“그러게요. 겨우 이런 질문이라니, 심지어 별로 궁금하지도 않네요.”
말 그대로였다.
세이버는 꽤 열심히 헨리를 위한 질문을 준비하였으나 그건 클레버가 보기에도 흥미가 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헨리는 ‘신’이었으니까.
심지어 삶의 후회를 남겨 놓지 않을 만큼 몇 번이고 회귀하고 인간의 삶을 살았던.
말을 마친 헨리는 자신의 뜻을 보여 주기 위해 염기를 응축시킨 업화옥을 기둥에 던져 터뜨렸다.
쾅!!
그러자 큰소리가 나며 기둥이 통째로 파괴되었고 흙먼지가 가라앉자 기둥이 있던 자리 아래에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빛?’
그 빛무리에 신궁 마티아스가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던 차, 일순 마티아스가 크게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극독왕 제냐가 물었다.
“뭐야, 왜 그래?”
“무, 뭐가 있는데?”
“뭐가 있다니?”
“안에 뭐가 있다고. 그리고…… 눈이 마주쳤어.”
“눈?”
그 순간.
뻐거거걱!
지층에 균열이 일어나며 갈라진 틈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빠른 반응 속도로 뒤로 물러났고 무너진 바닥으로부터 형광체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닥 아래 빛을 뿜으며 가득 들어 있는 것들.
그것은 놀랍게도 수많은 문자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