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3화
“주신님!”
두 사람의 인사에 그렁그렁 눈물 맺힌 클레버가 주신에게 안겼다. 그런 클레버를 주신은 아이 어루만지듯 만져 주었다.
“그래. 마신이구나. 결국 마신도 데리고 왔어.”
품에 안겨 아이처럼 엉엉 우는 마신을 쓸어 만져 주며 주신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옅게 눈물을 머금었다.
수천 년만의 재회였다.
수만 년을 산 주신이라 할지라도 가우스 전체의 운명이 걸렸던 일이기에 초연한 그조차도 이번에는 눈물이 맺혔다.
헨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신과 늘 체스를 두던 천산이었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헨리는 바람을 일으켜 그것들을 치웠다.
그러자 안개에 가려져 있던 비스…… 아니, ‘종말’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손을 뻗은 채 주신을 향해 있었다.
‘여전하군, 여긴.’
따지고 보면 완전히 같은 건 아니었다.
아주 약간의 차이였지만 헨리는 분명히 보았다. 전보다 좀 더 빨라진 놈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게다가 이곳에 모여 있는 놈들의 숫자. 가우스 전역에 퍼져 있는 종말들이 전부 이리로 모인 듯 했다.
‘그동안 홀로 부지런히 옮겨 다니셨겠지.’
안 봐도 뻔했다.
왼팔 오른팔인 격인 천신과 마신이 없으니 주신 홀로 모든 걸 처리해야 됐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귀찮음보다 더 가늠이 안 되는 것은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홀로 싸우고 있었을 주신의 고독함이었다.
헨리는 화산검을 뽑았다.
그런 다음 주신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얼 하려는 게냐?”
“이 땅에 종말들을 몰아내려 합니다.”
그동안 주신이 그토록 말렸던 일.
그도 그럴 게 주신은 너무 많이 보았으니까.
헨리가 종말들의 상대가 안 되는 걸.
그러나 이번만큼은 말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지만 헨리로부터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에게서 종말들과 비슷한 힘이 느껴지는구나.”
“에테르라 불리는 힘입니다.”
“너 또한 괴물이 된 것이냐?”
“그럴 리가요. 전 저일 뿐입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알겠다. 네가 그리 이야기하니 내가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뜻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주신의 허락을 받은 헨리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 <업화>가 발동됩니다. ]
스킬이 발동되자 모든 것을 불태워 삼킬 지옥불이 칼끝에 솟구쳤다.
헨리는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힘들 중 하나인 ‘시간의 권능’을 발동시켜 놈들에게서 빼앗은 시간을 돌려주었다.
시계태엽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 수만 마리에 달하는 비스들이 일제히 헨리에게 달려들었다.
헨리가 검을 휘두른 것과 같은 타이밍이었다.
화산처럼 뜨겁고 피보다도 진한 불꽃의 파도가 그것들을 향해 덮쳐졌다.
“키에에에에에에!!”
비명이 뿜어진다.
작은 점에서 뿜어진 붉은 파도는 하늘이라 믿어도 좋을 만큼 거대한 것이 되어 오랫동안 가우스를 좀 먹어 온 기생충들을 일시에 쓸어안았다.
울대를 높이며 활짝 날개를 펼치는 봉황처럼 헨리의 화염은 하나의 기생충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집어삼켰다.
탐욕스러웠다.
그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불꽃은 닥치는 대로 종말들을 휩쓸었다.
그럴 때마다 피멍울 맺힌 비명들이 하늘 위를 난무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하늘 위 굉음 소리에 깜짝 놀랐다.
피가 뿌려졌다.
살점이 부서졌다.
뼈가 가루가 되었다.
그 모든 게 황사처럼 천산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헨리의 화염은 그것들의 낙하조차도 감히 허락하지 않았다.
흩뿌려진 피는 금세 타서 수증기가 됐고 부서진 살점은 노릇하게 익다 못 해 재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 날렸다.
뼈 또한 버티고 버텼지만 결국 스러진 살점과 운명을 같이했다.
헨리의 업화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문장에 온점을 찍듯 검은 점자가 된 잿가루들이 자기가 존재했음을 알리기 위해 허공에 무수히도 점을 찍어 댔다.
그러나 가우스의 그 무엇도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하늘이 깨끗해졌다.
부자연스러운 안개가 걷히고 하늘의 구름도 걷히니 비로소 맑은 햇빛이 천산을 드리워 체스판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체스 한판 두기 딱 좋은 날씨였다.
헨리가 화산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근처 천산 끝자락으로 다가가 구름 한 점 없어 모든 것이 보이는 산천초목 푸르른 아래 땅을 보았다.
내 고향 가우스.
이리 보니 그 어떤 차원보다 가장 아름다웠다.
헨리는 이어서 스킬을 하나 더 발동시켰다.
[ <여왕의 눈>이 발동됩니다. ]
[ <여왕의 눈>으로부터 <관조> 효과가 발생합니다. ]
라의 눈도 발동시켰다.
그러자 금색 안광이 두 눈 형형히 빛났으며 헨리는 뒷짐을 지고 곧바로 공간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가우스 전체를 접어 달리며 혹시라도 자신이 놓쳤을 종말들을 손수 찾아다녔다.
무려 열 바퀴를 돌았다.
그런데도 시간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관광지 돌아다니듯 가우스 구석구석을 굽이 살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야 겨우 만족한 헨리는 그제서야 다시 주신과 클레버 앞에 나타났다.
“다녀왔느냐.”
“예,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없느냐?”
“예, 없습니다. 천계와 마계는 물론, 가우스의 모든 곳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헨리는 체스판 앞에 앉았다.
클레버는 예전처럼 고양이로 변해 주신의 무릎 위에 안겨 있었다.
“간만에 한판 두시렵니까?”
“좋지. 그동안 연습 많이 했단다.”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흑백 말들이 양측으로 나뉘었다.
흑은 주신에게 백은 헨리에게로 갔다.
이윽고 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몇 차례 수가 나뉘어졌을 때쯤 주신이 말했다.
“여행은 다 끝났느냐?”
“아직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남았느냐?”
그 말에 헨리가 나이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공격 활로에 나이트를 갖다 놓는 순간, 그동안 가우스를 떠나 다시 가우스로 돌아오기까지의 헨리의 기억들이 주신에게로 옮겨졌다.
주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뜨며 대답했다.
“…그렇군. 그동안 혼자서 참 많은 고생을 했구나.”
“그건 클레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있고?”
대답을 할 때쯤 헨리의 차례가 다시 되었다. 이번에는 룩을 들어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헨리의 기억들이 주신에게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번에 헨리의 기억을 본 주신은 쥐려던 말을 쥐지 못하고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구나.”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입니다.”
“네 계획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넌 항상 그랬지. 네 생각은 차디 찬 금속으로 이루어진 성 같지만 막상 만져 보면 온기가 도는 따뜻한 것이란 걸.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겠다.”
“반드시 이루어 증명하겠습니다.”
그때, 주신의 나이트가 헨리의 킹 근처에 섰다. 주신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체크메이트.”
“후후, 승부는 나중에 결착을 지어야겠군요.”
“패배를 인정하는 게냐?”
“그럴 리가요. 그리고 이건 체크메이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신님이 위험한 상황이지.”
“뭐?”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시지요.”
“끄응, 클레버는 데려갈 셈이냐?”
“제 권속입니다. 함께 탑을 올랐던 아이니 끝까지 함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헨리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마지막 문장을 삼켰다.
“금방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오냐.”
헨리와 클레버가 주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어비스로 떠나기 전, 헨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로이 일상을 보내는 가우스 사람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이로써 등록이 끝났습니다.”
헨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캔시는 이미 악룡의 땅을 모두 정화시키고 가우스를 등록시킬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캔시가 정식 등록서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제 여기 사인만 하면 가우스는 정식으로 어비스 상층에 편입하게 됩니다.”
“정말 여기 사인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가요?”
클레버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그에 캔시가 웃으며 친절히 알려 주었다.
“문제가 있을 수가 없죠. 따지고 보면 어비스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죠. 어비스가 하루에 침공하는 차원의 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많겠지.
엄청 많을 거다.
가우스란 곳이 있는 줄도 모를 만큼.
“그런 마당에 자기들이 알아서 어비스에 편입되어 온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오히려 윈윈이죠. 가우스 입장에선 애매한 층계가 아닌 상층이니 이상한 일에 휘말릴 일도 적을 테고요. 뭐, 대신 가우스 주민들은 어비스에 편입된 만큼 모두들 플레이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건 아시죠?”
캔시의 재확인에 클레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들어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어비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어비스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하물며 관리자도 플레이어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어찌 가우스 주민이라고 시스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도 바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 천년까지는 유예할 수 있다면서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천년 뒤에는 얄짤없어요?”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편입되자마자 즉각 플레이어 시스템이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것.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게 가우스 주민들에게 갑자기 플레이어 시스템이 적용된다면 가우스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천년의 유예 기간은 일종의 준비 기간이자 적응 기간 같은 것이었는데 클레버는 천년 정도라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헨리의 생각은 좀 달랐지만.
헨리가 말했다.
“사인하겠다.”
“예, 여기에 해 주시면 됩니다.”
사인을 마쳤다.
그러자.
[ <R134> 구역에 <미등록 차원 : 가우스>가 등록됩니다. ]
[ <미등록 차원 : 가우스>가 <정식 등록 차원 : 가우스>로 등급이 격상됩니다. ]
[ <가우스>의 주인은 <헨리 모리스> 플레이어입니다. ]
[ <가우스>의 부주인은 <클레버> 플레이어입니다. ]
[ 등록된 <가우스>에 아직 아카이브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즉시 아카이브 시스템을 적용시키겠습니까? ]
아카이브 시스템이 헨리를 정식으로 구역의 주인으로 인식하며 이것저것 물어왔다.
부주인은 클레버로 등록했다.
당연했다.
낯선 이국땅, 믿을 수 있는 거라곤 동향 사람뿐이었으니.
헨리는 아카이브 시스템의 등록을 천 년 뒤로 유예시켰다.
모든 작업이 끝마쳤을 때, 가우스는 비로소 어비스 안으로 편재되어 종말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캔시가 물었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고향을 구원한 사람은 처음 보네요. 근데, 그거 아시죠? 이곳은 점령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라는 거? 얼른 명성을 쌓지 않으면 쓸데없는 플레이어들이 당신의 고향에 난입할지도 몰라요?”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방법도 구비해 두었고.”
헨리는 즉각 만물상을 떠났다.
그리고 바로 향한 곳은……
[ <염가원 입장권>을 사용하셨습니다. ]
[ <염가원>으로 이동합니다. ]
바로 염가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