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1화
“…네?”
순간 테이블 위에 침묵이 도래했다.
“말 그대로야. 상층민 목 100개 정도면 된다고.”
“그게 무슨…… 여긴 플레이어 목이 화폐인가요?”
그 말에 캔시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비유하자면 그런 거지 비유하자면. 정확히는 상층에서 가장 급 낮은 플레이어 100명분이 가진 땅이 필요해. 3번 구역을 통과한 플레이어들은 모두들 자기 땅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점령전을 벌이니까.”
“근데 땅은 왜 필요한 거죠?”
“왜 필요하다니? 땅이 있어야 미등록 차원을 등록 차원으로 둔갑시키지. 이주 안 시킬 거야?”
“그럼 결국 어비스 내로 편입시키는 거잖아요?”
“그럼 안 돼?”
“네?”
“미등록 차원들이 왜 미등록 차원인데? 어비스에 포함되지 않아서 침공받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순간 클레버가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러거나 말거나 캔시는 말을 이어 나갔다.
“탑 안의 플레이어들은 아무리 잘나봤자 플레이어야. 여기서 한가락 해도 결국은 고향을 떠난 몸들이라는 거지. 그리고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너도 잘 알 텐데? 혼자선 절대로 탑을 상대할 순 없다는 걸.”
클레버는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했고 캔시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결국은 탑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입장이야. 내가 뭐 전지전능한 신인 줄 알아? 탑의 눈을 피해 미등록 차원을 완전히 독립시켜 주게? 그럴 힘이 있었음 내 고향부터 그렇게 했겠지. 아무튼 네 손속 아래 네 고향을 지키고 싶다면 이곳에 안주시킬 네 땅을 확보하도록 해. 그게 어비스에서 쟁취할 수 있는 최대의 평화니까.”
캔시의 말대로였다.
캔시 역시 탑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플레이어들 중 하나로 하는 일이 상인과 같은 역할이라 그렇지 결국은 시스템 속에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명하느라 고생했군.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어.”
“진짜 중요한 이야기?”
“미개척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어머, 미개척지도 알고 계시는구나? 진작 말을 하지.”
“미개척지요?”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오자 클레버가 의아한 표정으로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헨리는 눈길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당신한테 의뢰하고 싶은 건 세 가지다. 하나는 가우스의 정식 등록화, 두 번째는 미개척지를 베이스로 한 안전한 토지 확보의 설계.”
“흐응, 조언자가 있다더니 아주 확실한 분을 데리고 계시나 보네. 좋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아시는데 더 이상 말장난할 수는 없지.”
미개척지는 말 그대로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상층의 땅을 말했다.
상층은 넓다.
어쩌면 중층보다 더.
확인된 바는 없지만 중층이든 상층이든 아무도 그 끝에 도달해 본 자가 없다고 했으니까.
이유야 간단했다.
수많은 차원계가 넘실거리는 차원의 바다에 나무처럼 뿌리를 뻗어 양분 흡수하듯 차원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고 있는 곳이 어비스다.
거기서 탑으로 온 플레이어들의 수는 절대로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그중에서 최소 0.1%만 위층으로 온다고 해도 상층은 금방 포화 상태가 된다.
그러니 클 수밖에.
그에 덩달아……
‘어비스가 플레이어의 목숨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이유 중에는 이런 이유도 있겠지.’
그렇기에 모든 층계는 무한하게 넓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중에는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미개척지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순간 말을 잇던 캔시의 눈동자에 푸르스름함이 꽃폈다.
“오, 당신…… 생각보다 더 재밌는 플레이어였네요?”
“칭찬으로 듣지.”
푸르스름한 눈빛.
그것은 일순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였으나 헨리는 일부러 두었다.
디자이너가 완벽한 디자인을 하기 위해선 재료를 보고 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윽고 스캔을 마친 그가 품에서 새로운 책자를 꺼내며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알죠?”
“물론.”
“아참, 참고로 난 어비스 포인트 안 받아요. 그런 따분한 화폐는 은행 창고에 썩어 넘치도록 있으니까.”
“알고 있다. 어차피 이번 의뢰들의 값까지 더해 설계에 포함시킬 것 아닌가?”
“헛헛, 재미없네. 이 양반. 그래도 기대는 되네요.”
캔시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며 양피지 한 장을 꺼내 깃털이 인상적인 펜대로 무언갈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작성 중 캔시가 물었다.
“그런데…… 의뢰는 세 개라고 들은 것 같은데 왜 두 개만 이야기 하죠? 나머지 하나는 뭔가요?”
“혹시 거울용에 대해 아나?”
멈칫.
순간 캔시의 손이 멈추었다.
“여기서 지내면서 거울용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거울용은 왜요?”
“마지막은 거울용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뭐…… 관광이라도 하시게?”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 설마 거울용이랑 한바탕할 생각은 아니죠?”
“맞다만.”
“에이.”
캔시는 인상을 구겼다.
정말 길 가다 똥이라도 밟은 표정.
그러더니 부지런히 펜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당신 상층에 온 지 얼마 안 됐다며? 당신 조력자가 거울용이 어떤 존재인지 말 안 해 주던?”
“해 줬다. 충분히.”
“그런데?”
“알고서 가는 거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나 봐?”
그 물음에 침묵했다.
그러자 캔시가 쩝 입맛을 다시며 다시 펜대를 들었다.
“…이거 이러다 괜히 꽁으로 일해 주는 거 아닌 가 몰라. 그럼 순서가 어떻게 돼요? 미개척지 먼저예요, 아님 거울용부터예요?”
“거울용부터다.”
“…….”
캔시는 다시 인상을 구겼다.
그러다 다시 헨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기요.”
“왜 그러지?”
“혹시 삼재앙이라고 들어 봤습니까?”
“알고 있다. 거울용과, 관리국, 그리고 개척왕이 삼재앙 아닌가?”
“근데도 나한테 어떻게 일처리를 할 건지 안 알려 준다고?”
“밑질 건 없잖아? 정 못 믿겠다면 스탯 양도각서라도 작성해 주지.”
“…오, 그건 좀 흥미로운데?”
스탯 양도각서.
말 그대로 사망 시 미리 지정해 둔 양도자에게 가진 스탯 전부를 양도하는 각서를 의미했다.
그리고 캔시는 거기에 흥미를 느꼈다.
헨리도 빈말이 아니었고.
캔시는 즉시 스탯 양도각서를 꺼내 헨리에게 내밀었고 헨리는 어렵지 않다는 듯 그것에 사인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너무나도 태연히 사인하는 헨리의 모습에 캔시는 사인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무모한 건지…… 뭐, 스탯 각서를 받았으니 저야 상관없다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캔시는 상층에서도 탑티어에 속하는 플레이어였다.
차원상인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 버금가는 힘을 가진 독보적인 존재로,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아한 것이다.
촉 좋은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캔시는 작성하던 양피지를 마저 작성한 뒤 리본까지 묶어 리본 사이에 자기 명함을 끼워 넣으며 헨리에게 건넸다.
“명함은 이리로 다시 오는 프리 티켓이고 설계도는 양피지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디 허겁지겁 도망쳐 오는 꼴이 아니었음 좋겠네요.”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양피지를 건네받은 헨리는 클레버와 함께 만물상을 나섰다.
만물상을 나오자마자 클레버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공세를 쏟아 냈다.
“주인님, 미개척지가 뭔가요? 거울용은 또 뭐고 삼재앙은 또 뭐며 스탯 양도각서는 왜 작성을…….”
“일단 가면서 설명해 주마.”
헨리는 대답 대신 양피지부터 펼쳤다. 그러자……
[ <저장된 체크 포인트>가 존재합니다. ]
[ <1번 체크 포인트>로 이동하시겠습니까? ]
아카이브가 의사를 물어 왔고 헨리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시야가 바뀐다.
*
시야가 바로 섰다.
주위는 어두웠다.
어둠이라도 내려앉은 것처럼.
하지만 이것은 거짓이다.
헨리는 신체에 에메랄드 빛에 가까운 아주 약한 광명을 둘렀다.
그러자……
화아아아!
사방에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주위에 수천 명의 헨리가 있었다.
“주, 주인님!”
놀란 클레버가 화들짝 헨리에게 붙었다.
“놀랄 것 없다. 거울이니까.”
“거울요?”
“그래.”
그 말에 클레버는 그제서야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헨리의 말대로였다.
주변을 가득 메운 수천 명의 헨리는 다름 아닌 거울에 비친 모습이었다.
“거울이 왜……?”
“거울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긴 거울산이라 불리는 거울용의 땅이고.”
“그, 근데 갑자기 거울산엔 왜 오신 겁니까, 주인님? 삼재앙이 뭔진 모르겠지만 ‘관리국’이라면 관리자들이 근무하는 곳인 것 같은데 그럼 삼재앙이란 것도 안 좋은 것 아닙니까……?”
잔뜩 겁먹은 목소리.
그에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거울용은 어비스가 만들어진 이래로 상층의 그 누구도 쓰러뜨리지 못한 최고, 그리고 최악의 환수니까.”
“그런데 그런 놈이랑 한바탕이라니요?!”
헨리는 대답 대신 몸에서 뿜어내던 빛을 거두었다. 그러자 사방이 다시 어두워졌고 헨리는 주위를 둘러보던 끝에 희미하게 빛나는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헨리는 그 점이 있는 곳으로 날았다.
점인 줄 알았던 그것은 놀랍게도 바깥으로 이어진 출구였다.
헨리는 거울석이 잔뜩 피어난 어느 갱도 안에 소환된 것이었다.
‘좌표 설정이 별로 친절하지 못하군.’
일부러 그런 것이었을까?
아님 거울석 갱도조차 통과하지 못하면 그냥 돌아오라는 배려였을까?
무엇이 됐든 헨리는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고 갱도를 탈출하자마자 본 것은 형형색색의 나무들로 뒤덮인 드넓은 산맥과, 그 사이에 뿔처럼 돋아난 수많은 거울석들이었다.
헨리는 더 높이 날았다.
더 높이 날아서 여왕의 눈과 라의 눈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화아아!
두 눈에 형형한 안력이 밀집한다.
클레버도 주인이 무얼 하려는지 일찍이 눈치채고 열심히 거울용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용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형체를 찾을 수 있었다.
“저기, 저놈인 것 같습니다.”
클레버가 가리킨 곳.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있었으나 자세히 보아야지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한 번의 호흡마다 크기가 줄었다 작아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며 묘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
전신의 비늘이 거울로 이루어진 상층의 ‘삼재앙’ 중 하나인 ‘거울용’이었다.
거울용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헨리는 거울용을 얼마간 내려 보던 끝에 검을 들었다.
그리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 <업화>가 발동됩니다. ]
업화가 발동됐다.
발동된 업화는 이내 곧 칼끝에서 거대한 업화옥을 만들어 냈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 달을 헨리의 업화옥이 가리고 있었다.
헨리는 에테르와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거칠게 내뿜었다.
업화옥을 던지기 전, 헨리가 물었다.
“클레버.”
“예, 주인님.”
“왜 한낱 환수 따위를 여태 아무도 취하지 못한 것 같으냐?”
“글……쎄요? 강해서일 것 같긴 한데 강함의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게 상층의 가르침을 준 염왕이 그러더군. 만약 거울용을 만난다면 무조건 피하라고. 왜냐하면 그놈은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불꽃인 자신의 불꽃마저도 어린애 불장난처럼 튕겨 내며 그 어떤 스킬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반사시키는 힘이 있다고.”
“아……! 자, 잠시만요. 주인님. 그럼 주인님께선 어떻게 거울용을 잡으시려는 겁니까?”
“난 거울용을 잡는다 한 적이 없다.”
“예? 그럼요?”
“한바탕한다고만 했을 뿐.”
그 말과 함께 헨리가 거울용을 향해 응축한 업화옥을 던졌다.
번뜩!
업화옥이 투척된 순간 거울용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아가리를 벌리며 고막을 터뜨릴 듯한 하울링을 울어 젖혔고 하울링이 퍼지는 순간, 거울용의 몸이 새하얗게 빛났다.
녀석의 전매특허 기술인, ‘드래곤 미러링’이 발동된 것이다.
헨리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헨리가 외쳤다.
“지금! 특전을 사용하겠다!”
그 외침에 아카이브가 반응했다.
[ <특전 : 스킬 복사 1회>를 사용합니다. ]
[ 대상 스킬은 <거울용>의 <드래곤 미러링>이 맞습니까? ]
그 물음에 헨리는 주저 없이 승낙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