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9화
“정말…….”
“이렇게 쉽게 상층을 클리어 했다고?”
“여길?”
1번 구역의 입구.
그곳에 방책을 만들어 대기하던 가우스 군단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부팀장격인 레반, 페트로, 킨만이 그랬다.
‘크흐흐, 그놈 참 정말 자신감 대로 사는구만.’
덩달아 라훔도 클클 웃었다.
자신의 군대가 되어 함께해 달라길래 위로 가서 한껏 난타전이라도 벌일 줄 알았더니 이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떠랴.
일족을 책임져야 하는 수장으로서, 아무리 전사라도 쓸데없는 싸움은 피해가는 게 최선이니까.
이윽고 그들 앞에 헨리가 나타났고 헨리가 부팀장들을 소집했다.
“다들 시스템 알림은 확인했겠지?”
“예.”
“예, 뭐.”
“그래서, 이중에 중층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가 있나?”
팀원들은 상층의 잔류를 포기하고 내려 갈 수 있다.
하지만 팀장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헨리의 물음에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여지껏 상층에 오고 싶어 이 난리를 피웠던 건데 어찌 이 자리를 포기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헨리도 예상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건 뻔했으니.
헨리가 물었다.
“역시. 하지만 그것은 나 또한 그렇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곳을 포기하고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게 내가 탑을 오르는 이유니까.”
“…….”
“…….”
“…….”
헨리의 말에 눈치 보는 세 사람.
그도 그럴 게 그 말이 꼭 자신과 함께 올라가자는 것처럼 들렸기에.
허나 그것은 섣부른 오해였다.
헨리가 말했다.
“뭔가 오해들을 하는 것 같군. 올라가는 것은 나 혼자다.”
“예?”
“혼자 가신다구요?”
“그럼 저희는요?”
같이 가는 게 아니라는 말에 갑자기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 온도 차이에 헨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들 중 하나는 여기에 남는다. 그리고 다음 층에서 하나, 또 다음 층에서 하나가 또 남는다.”
“…예?”
“싫은가?”
세 사람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상층의 한 귀퉁이다.
중층민과 상층민의 신분 차는 하늘과 땅 차이인데 그런 곳의 주인 자릴 이렇게 쉽게 넘겨준다고?
그러나 헨리는 진심이었다.
괜히 중층에 남겨 사고 치는 것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상층 자릴 떼어 주는 게 확실한 예방법이었으니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거인들은 상층에 관심이 없고 나는 클레버와 함께 상층을 계속 오를 생각이니까.’
말인즉,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들은 헨리에겐 필요가 없는 자투리땅이라는 말.
그런 헨리의 뜻도 모르고 세 사람은 크게 감동했다.
“싫을 리가요! 싫을 리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관리하겠습니다!”
잘됐다.
이로써 1번 구역을 관리해 줄 사람을 찾았으니.
이렇게 되면 거인들이 다스리는 중층과 중층의 적폐 세력이었던 자들이 문지기가 되니 천년전쟁이 부활할 일은 영원히 없다.
헨리는 제비뽑기로 1번 구역의 주인을 뽑았고 레반이 당첨되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주인 자리를 하사받은 레반이 울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렇게나 꿰차고 싶었던 상층을 이렇게 손에 넣게 되다니.
덕분에 헨리에 대한 원망 같은 게 싹 누그러졌다.
다음 구역으로 떠나기 전, 헨리가 라훔에게 파티 메시지를 보냈다.
-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젠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
- 내가 할 소릴 하는군. 모든 거인들을 대표하여 대신 감사의 말을 전하도록 하지. 헨리, 넌 우리 거인족의 영원한 친구이자 은인이다. 혹여나 나중에라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말만 해라. 물심양면으로 도울 테니.
- 말이라도 고맙군. 기억하지.
- 그런 의미에서 이걸 너에게 주도록 하겠다.
[ <전사의 휘장>을 획득하셨습니다. ]
라훔이 헨리에게 이별 선물로 준 것은 게덤에게 사절단의 증거로 보여 주었던 휘장이었다.
허나 브리타니아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인가 싶었지만 묘하게 달랐다.
“브리타니아의 휘장인가?”
“아니, 내 휘장이다.”
“너의?”
“내 마음이다. 그리고 넬바프의 모든 거인들의 마음이기도 하지. 그만큼 감사의 의미를 담은 거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옵션은 달리 없었다.
하지만 깊은 뜻이면 충분했다.
헨리가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부담스러울 리가.”
그 말을 끝으로 거인들은 중층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건 절반 정도로 줄어든 가우스 군단뿐.
가우스 군단은 거기서 3할에 해당하는 레반의 사람들을 분리한 후에 그제서야 다음 구역으로 향했다.
*
[ <상층 : 2번 구역>에 입장합니다. ]
[ 현재 위치는 <무영관>입니다. ]
헨리는 처음의 반도 안 되는 인원들과 함께 2번 구역으로 넘어 왔다.
무영관이라 불리는 2번 구역은 높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대수림 같은 곳으로.
해는 떠 있었지만 높은 나무들 때문에 별 정도로 겨우 보였고 주위는 그림자들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전략은 이전과 같았다.
방책을 만들어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
허나 이번에는 순서를 달리 했다.
헨리는 가우스 군단이 방책을 모두 완성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준 뒤에야 떠날 채비를 했다.
군단을 떠나기 전, 헨리가 킨만과 페트로에게 당부했다.
“시스템 알림이 뜨기 전까진 누가 와도 문을 열어 주지 마라. 그게 설령 나라고 할지라도.”
“알겠습니다.”
헨리의 당부에 킨만과 페트로는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들의 진지함을 확인한 헨리는 그제서야 떠날 수가 있었다.
방책에서 조금 떨어져 나왔을 때 클레버가 물었다.
“주인님.”
“왜?”
“아까 왜 그런 당부를 하신 거세요?”
“이곳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주의해야 하는 곳이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요?”
“그래.”
해가 없는 도시가 밤의 지속으로 네크로멘서와 언데드들에게 특화된 지역이라면 이곳의 주인은 은신에 특화된 자였다.
이름은 무영왕.
그림자가 없는 자들의 왕이란 뜻으로, 허멀트가 말하길 실제로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고 일부러 그림자가 많은 환경을 조성해 그 속에 숨어 다니는 게 특징이라 했다.
허나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무영왕이란 놈이 그림자 속에 숨어 다니는 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생각보다 더 쉽게 상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헨리는 검을 들었다.
그리고 가우스 군단이 방책을 지은 곳에 검을 휘둘러 깊은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업화를 발동시켜 칼날에 염기가 맺었다.
화륵!
염기를 맺은 헨리는 활시위를 당기듯 팔 근육을 당겼다.
그런 다음 마력과 함께 가우스 군단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칼날을 휘둘렀다.
그러자 칼날로부터 거대한 불꽃 초승달이 뿜어지며 수많은 나무들을 스쳐 베었고 동시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헨리는 같은 행위들을 반복했다.
그러자 하늘을 가리던 거목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숲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클레버는 얌전히 그 과정들을 지켜보았다. 헨리가 어떤 전략을 취하려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헨리가 스킬 하나를 추가로 발동시켰다.
[ <여왕의 눈>이 발동됩니다. ]
[ <여왕의 눈>으로부터 <관조> 효과가 발생합니다. ]
이어서 라의 눈도 발동시키자 눈에 비치는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지옥불로 활활 타는 세상 속에 희끄무레하게 방황하는 존재들이 보였다.
무영왕의 수하들인 무영병들이었다.
“정말이군.”
무영(無影).
그림자가 없다 하여 붙은 이름인 것 같은데 그들의 이름처럼 그림자만 없다면 정말 완벽한 암살자의 표본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숨겨주는 나무들이 쓰러지고 사위에 불이 타올라 더 이상 은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또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화염인 업화의 지속적인 피해로 은신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녀석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은신하지 못하는 암살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니까.
[ 타인의 에테르를 불태웁니다. ]
[ <염기>가 1 상승합니다. ]
[ 타인의 에테르를 불태웁니다. ]
[ <염기>가 1 상승합니다. ]
……
무영병들이 타 죽으며 염기도 따박따박 들어왔다.
헨리는 업화에 고통스러워하는 무영병들을 베어 나가며 숲에 더 큰 불을 질렀다.
그런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하자.
솨아아아!!
굉장한 살기.
에테르가 포함된 에너지 덩어리가 헨리를 향해 뿜어져 왔다.
카앙!!
헨리는 그것을 화산검으로 받아쳤다.
손아귀가 얼얼한 것이 힘이 굉장했다.
무영병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 무영왕이 나타난 것이다.
[ <침묵의 삭풍>이 발동됩니다. ]
사아아아아!
혜성처럼 등장한 무영왕은 분노하듯 삭풍을 뿜어냈다.
삭풍은 숲을 삼키는 불꽃들을 집어삼키며 천천히 소화시켜 나갔고 무영왕이 지나가는 곳마다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소화된 불꽃으로부터 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를 때쯤 삭풍은 멈췄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무영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이구나.”
무영왕은 이마 양쪽에 기다란 뿔이 달린 도깨비를 연상케 하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호리호리할 줄 알았던 체격과는 달리 꽤나 거대한 체격을 가졌고 그 옛날, 일본의 전국시대 장군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카타나도 세 자루나 꽂혀 있었다.
“네가 칠흑을 꺾고 올라온 놈이로구나.”
그 말과 함께 무영왕이 검을 뽑았다.
“건방진 놈. 칠흑을 이겼다고 해서 감히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그 말에 헨리는 잠시 무영왕을 보았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 대신 무영왕에게 달려들었다.
“이놈이 감히!”
카강!
캉!
파찰음이 튀었다.
그 중심에 검 세 자루가 교차됐다.
한 자루는 화산검이었고 두 자루는 무영왕의 것이었다.
“그 오만한 자신감도 지금뿐이다.”
“그래?”
그 말과 함께 헨리가 스킬 두 개를 사용했다.
열풍과 업화였다.
칼날에 불길이 치솟고 전신에 열풍이 뿜어지자, 무영왕 또한 삭풍을 뿜고 휘두른 칼날을 비틀었다.
카강! 캉! 캉!
바람과 바람의 격돌.
그 사이에 금속 불꽃이 튀었으며 고막을 때리는 파찰음이 들렸다.
무영왕의 공격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는 암살자였으나 기본적으로 검을 다룰 줄 아는 검사였고 암살자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진 건 그가 가진 은신 스킬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확신이 있었다.
이 새파랗게 어린 후배 플레이어를, 선배의 관록으로 짓밟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유롭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유가 사라지고 다급함이 밀려왔다.
맞부딪치던 바람도 묘하게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지?
뭐가 문제인 거지?
그때, 헨리의 검이 무영왕의 칼날들을 피해 어깻죽지에 박혀 들어갔다.
박혀 들어온 칼날은 불쏘시개처럼 순식간에 무영왕의 전신에 불꽃을 지폈다.
“크으으윽!!”
저항력 스탯으로 견뎠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자신의 무릎이 아래로 굽혀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 타인의 에테르를 불태웁니다. ]
[ <염기>가 1 상승합니다. ]
[ 타인의 에테르를 불태웁니다. ]
[ <염기>가 1 상승합니다. ]
……
헨리의 염기가 무영왕의 에테르를 불태워 좀먹어 갔으니까.
하지만 무영왕은 끝끝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알림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헨리뿐이었기에.
그게 무영왕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 <헨리 모리스> 님이 <무영왕> 님을 처치하셨습니다. ]
반가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