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2화
눈을 떴다.
컴컴한 주변.
기억이 없다.
육체적 의식이 날아가도 정신적 무의식은 분명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 희한하게도 꿈 없는 잠을 잔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컴컴하다.
라이트를 사용해 시야를 밝히자 순간 눈이 부셨다.
단순히 라이트 때문이 아니라 사방이 라이트에 반사되어 그런 것이다.
헨리는 라이트의 밝기를 조절했다.
그러자 대리석으로 추정되는 매끈한 바닥과 쇠로 추정되는 둥근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헨리는 비르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거인들이 너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쥐나 벌레처럼 못 잡아 죽여 안달인 게 거인들이야. 그리고 넌 요새의 거인들 중 플레이어들을 가장 싫어하는 놈들이 모인 곳에다가 던져 주마.”
그렇다면 이곳은 플레이어를 가장 혐오하는 거인들이 있다는 곳이라는 건데 그런 것치곤 자신의 몸 상태가 너무 멀쩡했다.
게다가 이런 장소라니.
여긴 어디지?
헨리는 우선 침착하게 몸 상태부터 체크했다.
그 시작은 시야 한켠에 밀려 있는 각종 아카이브 알림을 확인하는 것.
[ <역경진화>가 발동됩니다. ]
[ <모든 뱀들의 수호신>이 당신의 역경을 인정하고 탈피를 허락합니다. ]
[ 탈피를 시작합니다. ]
[ 탈피에 성공했습니다. ]
[ 스탯이 상승합니다. ]
[ 새로운 스킬을 획득합니다. ]
한켠에 쌓여 있던 알림들은 헨리가 역경진화에 성공했다는 것에 대한 알림들이었다.
파티원들에게 온 메시지는 없다.
그렇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란 뜻일 터. 그것들을 본 헨리는 서둘러 상태창을 확인했다.
++
[ 헨리 모리스 ]
- 신분 : 하층민, 이레귤러
- 특성 : <전설 추적자>
- 공격력 : 40
- 방어력 : 40
- 관통력 : 40
- 친화력 : 40
- 저항력 : 21
- 지배력 : 40
- 어비스 포인트 : 825,025 ap
++
아카이브의 말마따나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이 20% 이상 상승했는데 소수점 이하 수치가 반올림 처리돼서 그런 모양.
헨리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기권하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군.’
헨리는 비르파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여왕의 눈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배짱 좋게 덤빈 이유는 역경진화 스킬과 언제든 중층로 입구로 돌아갈 수 있는 기권의 기회 때문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멍청한 선택 덕에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게 됐다.
헨리는 이어서 스킬창을 확인했다.
정말 중요한 건 스탯보단 스킬이었으니까.
다행히 스킬창에 못 보던 게 보인다.
++
[ 충돌이뮨 ]
- 등급 : ???
- 설명 : 순간적 충돌로 인해 생기는 모든 물리적 데미지로부터 99%의 피해가 감소한다. 단, 베임 혹은 관통에 의한 피해는 제외한다.
++
짧은 설명.
그러나 설명 안에 들어 있는 건 상상이상의 것이었다.
‘충돌이뮨이라니?’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헨리는 이제 마차에 치여도 데미지가 없다는 말.
‘역경진화…… 정말 무서운 스킬이군.’
만독지체를 얻었을 때부터 심상찮은 스킬이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렇게 이상적인 스킬이 또 있을까?
물론 그 생성 조건이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점이 좀 흠이긴 하지만 어쨌든 살아남기만 하면 전보다 몇 배는 강해질 수 있었다.
헨리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역경진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놈에게 덤빈 것이긴 하나 상상 이상의 결과를 얻어 냈기에.
그때였다.
“이제 한번 확인해 볼까?”
굵직한 음성.
그리고 주위가 환해지면 천장이 높아졌다.
헨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위가 밝아지고 나갈 수 있는 틈을 확보하자마자 곧바로 마력을 폭발시켜 틈 사이로 쏘아져 나갔다.
틈 밖으로 나오자마자 본 것.
다름 아닌 다수의 거인들이었다.
“어어! 탈출한다!”
헨리는 그곳을 빠져나와 공중으로 치솟고 나서야 자신이 어디 갇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헨리가 갇혀 있던 곳은 놀랍게도 쟁반이었다.
스텐으로 만든 뚜껑 달린 쟁반.
“이런! 날 수 있는 쥐였어?”
“빨리 잡아 봐!”
“내가 채 가지고 올 게!”
“야, 근데 아깐 피 떡이었던 놈이 지금은 왜 저렇게 멀쩡해?”
“자가 치유가 가능한 쥐새낀가 보지.”
거인의 수는 다섯.
바이킹족처럼 뿔 달린 투구를 쓰고 있는 녀석들은 헨리를 정말 벌레나 쥐새끼 정도로 취급했다.
쟁반 안에 가둬 둔 게 그 증거였다.
헨리는 녀석들의 손이 닿지 못하게 공중으로 치솟은 다음 대들보 뒤로 몸을 숨겼다.
“아씨, 하필 저기로 들어가냐.”
탄식하는 거인들.
헨리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우선 미니맵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미니맵을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여긴…….’
플레이어를 가장 싫어하는 거인들이 모여 있는 곳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요새의 ‘본부’였다.
‘꽤 깊숙한 곳에 들어왔군.’
요새는 가장 외곽의 외부 경계 지대를 시작으로 병사들의 숙소와 병원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 훈련소, 대장간을 지나야지만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곳.
물론 본부가 요새의 가장 깊은 곳은 아니다.
본부를 지나면 거인병이 아닌 보통의 거인들이 지내는 마을이 나오고 그 뒤에는 자급자족을 위한 드넓은 농원이, 농원을 지나면 그제서야 모든 거인들이 존경하고 추모해 마지않는 ‘브리타니아’의 무덤이 있는 신전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레이어들은 여지껏 아무리 깊은 곳에 도달해도 ‘대장간’ 정도가 한계였다.
거인들은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기감이 예민하여 항상 귀신같이 플레이어들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야, 갈고리 찾았다. 이걸로 한번 쑤셔 보자.”
그 말과 동시에 날카로운 갈고리가 대들보 안에 걸쳐져 무자비하게 휘저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시급하다.
헨리는 환영 마법으로 자신의 분신을 두 개 정도 만들어 냈다.
그런 다음 자신에겐 은신 마법을 사용한 뒤 순간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어어, 탈출한다!”
마법.
놈들에게 금방 간파당할진 몰라도 아주 잠시 이목을 끄는 정도면 충분하다.
거인들은 헨리의 분신에 얼마간 시선을 주었고 그게 가짜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쯤, 헨리는 이미 그곳을 빠져나온 뒤였다.
‘본부라.’
여지껏 수집한 시야 오브젝트는 대부분이 대장간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은 함정도 많았고 거인들의 기감이 원체 예민해 접근조차 불가능 했으니까.
어쩌면 이곳의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거인의 근골을 손에 넣지 못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헨리는 즉시 파티원들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 나다.
그러자 론베르트가 가장 먼저 답장이 왔다.
- 무슨 일인가.
- 지금 즉시 하는 일들을 전부 중지하고 미로로 통하는 차원의 틈을 찾아라.
- 차원의 틈? 거긴 아까 가지 않았던가?
- 전투 후 빠져나온 상태다. 즉시 찾아라.
- 알겠다.
여기가 본부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가 본부라고 알려 줘 봤자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시야 오브젝트를 좀 확보해 둬야겠군.’
거인의 근골에 대한 단서를 찾는 것도 좋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혼자서 이 넓은 곳을 무작정 뒤지는 건 효율이 떨어진다.
그럴 바엔 그 누구도 도달 못한 영역의 시야 오브젝트를 확보해 두고 비르파를 처치한 뒤 천천히 수색 영역을 넓히는 게 훨씬 낫다.
벌컥!
“에이씨, 놓친 것 같네.”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시부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좀 전에 갈고리로 대들보를 휘젓던 놈이다.
헨리는 잠시 고민한 끝에 허멀트를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객님.”
“거인들도 눈치채지 못할 고레벨의 은신 아이템이 필요하다.”
“흠, 더 깊게 들어가 보실 생각이시군요?”
“근골을 얻으려면 그래야겠지.”
“그래야겠죠. 그나저나 어디까지 잠입하셨습니까?”
“본부.”
“오, 제가 알기로 대부분은 대장간까지가 한계던데 역시 고객님이십니다.”
그 말과 함께 허멀트는 자신의 짐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웬 띠 하나를 내밀었다.
“대도의 머리끈입니다. 전설적인 대도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아이템인데 기척과 존재감, 에테르 등 많은 것을 제거해 주고 어둠 속에선 그 위력이 더더욱 증가하지요.”
“거인들도 눈치 못 챌 정도인가?”
“그럼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왜지?”
“이거 중층에서도 엄청 귀한 아이템이거든요.”
“…그렇군.”
“고객님이니까 대여해 드리는 겁니다. 이것의 가치를 어비스 포인트로 환산하면 천만 포인트도 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고객님께 이런 걸 턱턱 내어 드리는 이유는…… 아시죠?”
안다.
투자였으니까.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끈을 받았다.
“잘 쓰지. 아, 그리고 말인데.”
헨리는 대도의 머리끈을 손목에 묶으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플레이어들 중에 관리자를 상대로 싸워 이긴 사례가 있나?”
“관리자를요?”
“그래.”
“흐음. 저는 못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왜지?”
“아래층 플레이어들은 관리자를 이길 정도의 실력이 안 되고 높은 층계의 주민들은 더 이상 관리자가 관리하는 스테이지에 도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전자는 이해하지만 후자는 무슨 말이지?”
“그건 위층에 가 보시면 알게 됩니다. 안 알려드리는 게 아니라 못 알려 드리는 거예요. 비밀을 함부로 누설했다간 큰 죄가 되거든요.”
“알겠다.”
“근데 그런 질문은 갑자기 왜 하세요? 설마 관리자랑 싸우시게요?”
“그냥 그럴 일이 좀 있다.”
헨리가 말을 얼버무리자 허멀트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웬만하면 관리자랑 싸우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전례가 없는 일에 자꾸 휘말리게 되시면 그땐 저도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알겠다.”
미주알고주알 말해 줄 생각도 없고 고집스럽게 뜻을 관철시킬 생각도 없다.
그래서일까? 허멀트는 자꾸만 불안해졌다.
이윽고 허멀트가 사라지고 난 뒤, 헨리는 대도의 머리끈에 담긴 아이템 옵션을 사용했다.
[ <대도의 머리끈>으로부터 <달빛걸음> 효과가 발생합니다. ]
아이템에 내장된 스킬의 이름은 달빛걸음.
달빛걸음이 사용되자 헨리의 몸에 은은한 빛이 휘감기며 기척과 존재감들이 제거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야 오브젝트 수집 작업을 개시했다.
*
‘생각보다 수집 속도가 붙는군.’
대도의 머리끈이 가진 달빛 걸음의 효과는 굉장했다.
고작 머리끈 하나 감았을 뿐인데 그 예민하던 거인들이 아주 가까이 있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시야 오브젝트도 벌써 10개도 넘게 모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절대로 가지지 못한 시야 오브젝트들.
헨리는 다음 목표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회의실처럼 보였는데 커다란 원탁에 신분 높아 보이는 거인들이 네 명 정도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이번 시야 오브젝트는 위치상 저기 협탁 뒤쯤이 되겠군.’
이제는 어느 정도 요령이 붙어 미니맵이 주는 힌트가 어떤 느낌인지 금방 파악이 됐다.
헨리는 최대한 그림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이동했다.
그때였다.
“……확실해, 그 제단에서 어비스 갓이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게.”
거인들이 나누던 대화 중 하나가 헨리의 귀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