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0화
아카이브의 물음을 본 헨리는 잠시 침묵했다. 이런 건 여태 그 누구도 말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 론베르트를 비롯한 나머지 녀석들이 다가와 붙었다.
그들은 침묵했다.
척 봐도 헨리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으니까. 허나 론베르트만큼은 용기를 냈다.
“초대에 응할 건가?”
“이게 뭔지 알고 있나?”
“우리는 안다. 여지껏 보아 왔으니.”
“설명해.”
“이곳은 일종의 미로다. 안에 들어가면 어비스 갓들이 있고 그 안에는 요새로 통하는 수많은 길들이 있다.”
“직접 들어가 본 건가?”
“그렇다.”
“놈들은 얼마나 있지?”
“떼거지처럼 모여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미로 너머에는 녀석들의 본거지로 보이는 신전도 있다.”
“신전?”
“그래. 가본 적은 없지만 생김새도 그렇고 우린 거길 죽음의 신전이라 부르고 있다. 어쨌든 녀석들은 어비스 ‘갓’이니까.”
론베르트의 말에 헨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이내 곧 결정을 내렸다는 듯 모두를 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난 미로에 다녀오겠다.”
“뭐? 진심인가?”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안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좀 전에 벤 놈들 말고도 성가신 놈이 있어.”
“성가신 놈?”
“이름은 모른다. 우리도 한 번밖에 못 봤거든.”
“시답잖은 이유군. 그건 나를 막을 이유가 못 된다. 내가 저길 다녀오는 동안 너흰 거인의 근골에 대해 계속 추격해라. 보고는 6시간에 한 번씩으로 텀을 바꾸겠다.”
“…알겠다.”
헨리의 단호함에 론베르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듣지 않을 걸 알았고 자신들은 헨리를 말릴 힘도 없었기에.
헨리가 틈 속으로 사라진다.
*
[ <???>에 입장합니다. ]
시야가 바뀌었다.
혹여나 던전 같은 곳일까 싶었지만 아카이브가 잠잠한 걸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
미로라 불린 그곳은 검붉은 하늘에 정말 미로처럼 수많은 지벽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순간.
슈아아!
사각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져 몸을 비틀었다.
쾅!
간발의 차이로 피한 그것은 어느 이름 모를 종말의 거대한 도끼였다.
그것도 손에 달린 손도끼.
입이 실로 봉해져 있고 단추 같은 눈을 가진 녀석은 생김새가 참 그로테스크 했다.
종말 특유의 생김새였다.
[ <여왕의 눈>이 발동됩니다. ]
[ <여왕의 눈>으로부터 <관조> 효과가 발생합니다. ]
관조 효과로 놈을 살폈다.
아까 전에 처리한 잔챙이와 다를 바 없다.
서걱!
업화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녀석의 목은 화산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베어 넘겨졌다.
놈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헨리는 지평선에 걸려 있는 어느 건물을 응시했다.
‘저게 그 신전이라는 곳인가 보군.’
요새 사람들은 저걸 죽음의 신전이라 부른다지만, 헨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비스 갓.
신은 무슨 신이란 말인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헨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헨리의 몸에서 헨리의 눈에만 보이는 마력실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헨리가 나온 틈 앞에 묶였다.
나중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사용할 이정표였다.
이후 헨리는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워 지평선의 신전까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중비행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화화화화!!
날아드는 투사체들.
지상에 있던 종말들이 공중의 헨리를 보고 각자의 무기를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저 멀리 허공을 떠다니는 종말들도 보인다. 아무래도 공중으로 이동하는 건 무리일 듯하여 어쩔 수 없이 지상에 착지했다.
그러자 산 자의 냄새를 맡은 종말들이 헨리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헨리의 눈에 형형한 이채가 돌았다.
“그래. 내 오랜 한을 조금이나마 한번 풀어 보자꾸나.”
몰려드는 종말들?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놈들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해 시간의 권능으로 급급히 도망만 다니던 세월의 합이 천 년이 넘는다.
그 종말들과 이 종말들은 분명 다른 놈들일 테지.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이들의 사연이 어찌 됐든 결국 이놈들은 어비스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텐데.
헨리가 화산검을 들었다.
[ <서리풍>이 발동됩니다. ]
칼끝에서 스카샤의 숨이 뿜어진다.
녀석들은 때아닌 혹한의 바람에 까드득 소리를 내며 관절이 얼어붙었다.
그 수가 적게 잡아도 최소 수십.
허나 그 사이로 또 다른 종말이 새어나왔다.
헨리는 에테르 회복정 하나를 씹었다.
루메인이 준 것이다.
효과는 에테르의 즉시 회복이 아닌 천천히 회복되는 형태로, 회복되는 속도는 느리지만 즉시 회복되는 형태보다 전체 회복량 자체는 많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말인즉, 이런 식의 전투에 더 효율적이라는 말.
헨리는 화산검을 지휘봉처럼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계속해서 서리풍을 뿜었다.
그리고 녀석들의 앞에 도착했을 때.
[ <업화>가 발동됩니다. ]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지옥의 불꽃을 피워 냈다.
“키에에에에!!”
“크웨에에에!!”
덕분에 그들은 두 번의 화상을 입었다. 냉기에 한 번, 열기에 한 번.
허나 치료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치료를 걱정하기도 전에 녀석들은 더 이상 생을 유지할 수 없을 테니.
피도 튀지 않았다.
흩날리는 건 얼음 결정과 더불어 열기에 녹아 흩뿌려지는 물기, 그리고 타들어 간 재뿐.
이상하리만치 지치지가 않았다.
달아오른 말초 신경은 차츰차츰 식어 갔으나 그럴수록 몸에 힘은 더더욱 들어갔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앞을 헤쳐 나갔을까?
쿵! 쿵!
묵직한 굉음.
그와 함께 저 멀리서 야성 넘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헨리는 놈의 뚜렷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놈이었다.
론베르트가 경고했던 그놈.
엄지손톱처럼 보이던 녀석은 얼마 안 가 형체가 보일 만큼 또렷해졌고 그만큼 녀석이 가진 특유의 거친 에테르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여왕의 눈>으로부터 <관조> 효과가 발생합니다. ]
여왕의 눈이 녀석을 간파한다.
피부로 느껴지는 거친 기운만큼이나 녀석의 내부는 다른 종말들과는 다르게 살기와 광기로 가득 했다.
헨리는 검을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화풀이를 할 수 있겠어.
그간의 녀석들은 가만있는 허수아비를 베는 것만 못했다.
헨리는 놈들의 처절한 비명과 발버둥을 원했다.
살점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잡아먹을 듯 구는 그 원성이 듣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이 복수를 행하는 자의 보람되는 것이니까.
“우어어어!!”
녀석은 머리가 없었다.
대신 가슴에 얼굴 비스무리한 것이 달려 있었고 거대한 근육질 덩치에 상아색 피부, 군데군데 곰팡이 핀 듯 청록색이 슬어 있는 환부들은 놈이 시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헨리는 이름 모를 그 녀석을 콥스 골렘이라 부르기로 했다.
콥스 골렘은 다른 종말에 비해 덩치가 세 배는 컸다.
그리고 커다란 덩치를 바탕으로 걸리적거리는 작은 종말들을 던지거나 뭉개듯 가르고 다가왔다.
헨리는 간만에 빙마의 방패를 들었다. 그런 다음 기사 특유의 방어 자세를 취한 다음 멧돼지처럼 돌격해 오는 녀석을 기다렸다.
그래서일까?
도망치지도 겁먹지도 않는 헨리의 모습에 오히려 약이 올랐는지 녀석은 더 맹렬히 달려와 헨리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빙마의 방패와 녀석의 주먹이 부딪힌다.
놀랍게도 녀석은 헨리의 다른 부위가 아닌 정확히 방패를 가격했다.
도발에 응수해 준 것이다.
방패와 주먹이 격돌하자 부딪힌 접점을 중심으로 강력한 에테르 파장이 일어났다.
그 파장에 멍청하게 서 있던 주변의 종말들은 뒤로 데굴데굴 굴러 가거나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찌르르한 몸의 감각.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 낸 헨리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게 전부냐?”
“그어어어어!!”
헨리의 말을 알아들은 걸까?
콥스 골렘은 곧바로 반대쪽 손을 치켜들어 헨리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헨리는 몸을 아주 조금 비틀었다.
그리고 화산검을 위로 비껴 치듯 올렸다.
그러자 운석처럼 떨어지는 녀석의 왼팔이 날카로운 화산검의 단면에 성둥 잘려 나갔다.
“……!”
커지는 놈의 눈.
허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륵!
잘린 단면에 불꽃이 피어오른다.
아르고스와 싸운 이후로 잘린 단면에 불을 붙이는 게 어느 샌가부터 습관처럼 굳어졌다.
당황한 콥스 골렘은 왼팔을 휘저으며 불을 끄려 하였으나 그사이 헨리는 녀석의 대각선 아래 위치한 종아리를 그었고 아까와 똑같이 불꽃을 일으켰다.
쿵!
불꽃이 치솟음과 동시에 녀석이 무너진다.
헨리는 그 잠깐의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놈이 넘어지자마자 곧바로 녀석의 위를 밟고 올라가 몸을 틀어 생긴 회전력으로 가슴팍을 베었다.
푸슉!
정확히는 녀석의 얼굴처럼 생긴 가슴팍을 사선으로 그었다.
절단되지는 않았지만 내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갈라진 그곳에 헨리는 비어 있는 왼손을 들었다.
그런 다음 칼로 손바닥을 그어 상처를 냈고 상처 난 손바닥에서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놈의 벌어진 상처에 떨어졌다.
그리고 뒤로 물러났다.
놈은 베인 상처에 발악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
커지는 놈의 눈동자.
그리고.
“키아아아아아아!!”
명치쯤에 달린 녀석의 입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현재 헨리는 만독지체의 몸으로 신체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극독의 지경.
하물며 그 피는 아르고스의 진한 맹독을 모으고 모아 증폭시킨 것이었으니 그 독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픈 것.
콥스 골렘의 전신이 금방 거무죽죽하게 변한다.
마치 독사에게 물린 것처럼 고통에 바르르 떨더니 곧 사지가 뻣뻣이 굳은 채로 죽었다.
아카이브는 녀석의 죽음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으나 모든 종말들의 죽음이 그랬다.
허나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대신 놈을 죽인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 <여왕의 눈>으로부터 <위압> 효과가 발생합니다. ]
갑작스레 여왕의 눈으로부터 위압 효과가 발생하기 시작한 건.
이제 와서 갑자기 왜?
헨리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콥스 골렘을 처치한 순간, 녀석보다 못한 종말들 모두가 더 이상 헨리에게 덤비지 않기 시작한 것.
아니, 정확히는 겁을 먹고 시선을 피했다.
‘위압……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효과였군.’
덕분에 좋은 걸 알게 됐다.
헨리는 검을 집어넣었다.
콥스 골렘을 베자 어느 정도 화가 풀린 듯하여 이제는 이동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속도를 냈다.
헨리를 막는 종말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나가자 론베르트가 말했던 죽음의 신전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후우우!
파공음.
그리고 머리 위에 그려지는 거대한 그림자.
그것은 손이었다. 몹시 거대한.
헨리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려 손아귀로부터 벗어났다. 헨리가 있던 자리에는 손 모양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감이 좋네?”
낯선 목소리.
미로에 들어오고 처음 듣는 사람 말이었다.
고개를 들자 종말이 아닌 웬 소년이 구름 위에 걸터앉아 헨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