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7화
콰아앙!!
반죽 밀대가 식료품 창고 어느 모서리를 친다. 그로 인해 파생된 진동과 소리가 굉장하다.
귀 따가운 음량에 헨리가 미간을 좁히며 공중에 치솟아 식료품 창고 내부를 살폈다.
그러자 늙수그레한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허둥대는 게 보인다.
헨리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도롱뇽 바늘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반죽 밀대를 휘두르는 거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 <업화>가 발동됩니다. ]
화아아!
뿜어지는 불꽃과 함께 헨리의 몸이 회전하며 거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으악!”
목덜미에 칼날이 닿은 순간, 거인은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제법 출력을 높였는데도 겨우 저 정도 반응인가.’
딱히 어느 이름 모를 플레이어를 구하려고 했다기보단 궁금했다.
클레버의 조언대로 정말 이곳의 거인들은 웬만한 공격이 통하지 않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제법 힘껏 찔렀음에도 거인은 그저 벌에 쏘인 정도의 반응이었다.
“아우! 열받아! 오늘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아무래도 이전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다.
그 틈에 이름 모를 남자는 도망쳤다.
자신과 거인의 격차도 알게 된 헨리도 주방에서 나왔다.
주방문이 닫혀 있긴 했지만 문이 워낙에 거대한 지라 문틈 사이로 나올 수 있었다.
주방에서 탈출한 헨리는 즉시 대들보 위로 올라갔다. 그런 다음 명함을 찢어 허멀트를 불러냈다.
“넵, 고객님! 이번엔 또 어떤 일이십니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등장하는 허멀트.
헨리가 물었다.
“거인들의 요새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거인들의 요새요? 그렇군요. 뱀의 신전 다음이라면 확실히 거인들의 요새겠군요.”
“그래서, 대답은?”
“필요한 정보가 혹시 출구에 대한 겁니까?”
“출구도 출구지만 거인의 근골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흠. 역시 그 두 개일 줄 알았습니다. 근데 이거 어쩌죠, 이번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고객님이 찾으시는 출구는 요새에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들어 올 때마다 매번 위치가 바뀝니다. 그래서 무의미 하다고 말씀드린 거고 거인의 근골 같은 경우는 전부 소문에 불과한 것들뿐입니다.”
소문.
또 소문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결국 소문을 추적하다 보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여지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그래요? 그렇다면야 뭐…… 우선 이 이야기들을 해 드리려면 이 요새가 왜 생겼는지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요새가 생긴 이유.
이건 클레버에게 들어 조금이지만 알고 있었다.
“어떤 거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들었다만.”
“맞습니다. 한때 거인족을 이끌었던 거인병단의 단장, 브리타니아라는 거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근데 고객님 그거 아십니까? 거인족도 실은 어비스 외부에서 온 이주민들이라는 거?”
“이주민? 강제로 흡수 당한 게 아니고?”
“하하, 좋게 표현해서 이주민이라는 거죠. 제가 아는 한 어비스 내에 오리지널이라 부를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저기 아주 높은 층계에는 그런 곳이 존재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좀 해 드리자면…….”
거인들에 대한 이야기.
그건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 전, 거인들의 세상 넬바프에 어비스가 침공을 시작했고 거인들은 넬바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최강의 전투종이라는 명성답게 거인들은 잘 싸웠고 그만큼 전쟁도 길어졌다.
허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어비스의 전력을 버텨 낼 재간은 없었고 승기가 어비스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질 무렵, 어비스의 지도자 중 하나가 그들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그것은 바로 너희들의 지도자, 브리타니아를 제물로 바치면 나머지는 살려 주겠다는 그런 제안.
거인들은 반대했다.
하지만 거인들의 수장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랜 전쟁은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으니까.
“그럼 여기서 질문. 어비스로 이주해온 거인들은 과연 이곳에만 존재할까요?”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는 건가?”
“네. 절반은 여기에 절반은 중층에 살고 있습니다.”
“왜 나뉜 거지? 수장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만든 거라면 다 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막상 어비스에 이주해 올 때쯤 뜻이 나뉘었습니다.”
“뜻이 나뉘어?”
“어비스는 브리타니아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허락해 주긴 했지만 그 무덤을 중층이 아닌 중층 아래에 위치한 꽤 위험한 곳에 만들었습니다. 죽어 살아가는 놈들인, 어비스 갓이 돌아다니는 아주 위험한 지역에다가 말이죠.”
“어비스 갓? 종말을 말하는 건가?”
“종말이요?”
“내가 어비스 갓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렇군요. 그럼 종말이라 표현하겠습니다.”
“고맙군. 아무튼 종말이 돌아다니는 지역에다가 무덤을 만들었다고?”
“네. 그건 일종의 심술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힘들게 한 일종의 벌 같은 거죠. 이런데 무덤을 만들어 놓으면 무조건 종말들에 의해 파괴될 게 뻔하니까요.”
그때부터 거인족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더 이상 종말과 싸우기 싫은 쪽과 그래도 브리타니아의 무덤을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치졸한 짓을 했군.’
어비스가 그런 짓을 한 이유?
단순히 심술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어비스는 아마 거인들의 성가심을 경계해 그들 사이를 일부러 갈라놓은 것일 터.
“아무튼 그런 이유로 거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고 이곳의 거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브리타니아의 무덤에 요새를 세워 종말들과 싸워 왔습니다.”
“그럼 요새의 중심부로 갈수록 경비가 삼엄해지겠군.”
“그렇죠. 요새 가장 깊은 곳에 무덤이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무덤에 가까워질수록 거인의 근골을 얻을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는 소문도 있더라구요.”
“음.”
그렇다면 확실히 이번 신체 입수 난이도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겠어.’
허멀트가 말했다.
“그나저나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거인들이랑은 싸우지 마세요?”
“그렇잖아도 좀 전에 맞부딪혀 봤는데 내 공격이 조금도 통하지 않더군.”
“아이구, 벌써 싸우셨구나. 아무튼 거인들이랑은 웬만하면 안 싸우시는 게 좋습니다. 타고난 크기 차이도 크기 차이인데 이게 기본적으로 타고 난 에테르 코어가 달라서 스탯이 달라요, 스탯이.”
“방법이 아예 없나?”
“없죠?”
“그래? 너라면 방법 한두 개쯤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
“아, 뭐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허멀트. 허멀트가 꺼내든 건 알약들이 든 작은 유리병이었다.
“이게 뭐지?”
“이거…… 갖고 있는 상인도 얼마 없을 정도로 정말 귀한 겁니다. 혹시 ‘거인단’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거인단?”
“거인족의 정수를 받아 만든 영약인데 먹으면 몇 분간 거인족만큼 커질 수 있게 해 주는 약입니다.”
“덩치만 커지나?”
“당연히 거인족 만큼 강해지죠. 물론 그 원리 자체가 스탯이 높아진다든지 에테르가 높아지는 건 아닌데, 같은 수준의 에테르라도 타고난 양 자체가 달라요. 연못이랑 바다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렇군.”
“하지만 이건 그만큼 후유증도 심해요. 억지로 몸을 거대화시키는 거라 사용하는 동안 에너지 소모도 엄청 나고 사용 직후엔 에테르가 한동안 생성이 안 됩니다. 회복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요. 이건 코어 자체가 과부화 되서 뻗어 버리는 거라.”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위급 시에 사용할 수 있겠어.”
“그야 그렇죠.”
“또 주의해야 될 건 없나?”
“글쎄요? 거인들이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자들이란 거?”
별로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니다.
“알겠다, 참고하지.”
“아참, 주의해야 할 것보다는 이걸 가져가도록 하세요.”
[ <오감변동 보호체>를 획득하셨습니다. ]
“이게 뭐지?”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환경 변화에 따른 오감을 보호해 주는 보호체입니다. 용암이나 극지처럼 너무 극렬한 온도 차이는 못 견디지만 거인들의 요새 같은…… 갑자기 커진 소리라든지 그런 것들로부터 오감을 지켜 줄 겁니다.”
마침 필요한 것들.
마력으로도 커버가 잘 안 되던 것들인데 좋은 선물이었다.
“잘 쓰도록 하지.”
그때였다.
[ 지금부터 미니맵을 지급합니다. ]
[ 미니맵은 요새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시야 오브젝트를 확보할 경우 그 지역의 시야를 영구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
아카이브의 알림.
그와 함께 시야 한켠에 미니맵이 생겨났다.
“미니맵?”
“아, 미니맵이 지급되셨나 보군요.”
“알고 있었나?”
“알기야 알죠? 설마 미리 안 알려 드렸다고 뭐라 하실 건 아니시죠?”
“그럴 생각 없다.”
“다행입니다. 그럼 아마 시야 오브젝트를 확보하라는 메시지도 보셨을 텐데 현재까지 중층로에 밝혀진 시야 오브젝트의 수가 적게 잡아도 족히 200개는 될 겁니다.”
200개라.
이 빌어먹을 요새가 얼마나 넓은지 대충 감이 왔다.
“참고로 미니맵은 다른 플레이어의 것을 흡수할 수도 있으니 모쪼록 조심하시길.”
“흡수당한 미니맵은 사라지게 되나?”
“아뇨. 그냥 공유된다고만 들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허멀트는 사라졌다.
허멀트가 사라지고 난 뒤, 헨리는 미니맵을 몇 번 조작한 끝에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알았다.
미니맵은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에 대한 모든 지형지물을 간략하게 표기해 주는 시스템으로 작동했는데 지형물 중 회색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미확보된 시야 오브젝트였다.
헨리가 현재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시야 오브젝트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시간이 꽤 걸리겠군.’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비스란 곳은 그저 빨리 올라간다고 해서 상을 준다거나 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으니까.
*
[ 시야 오브젝트를 확보하셨습니다. ]
[ 미니맵의 일정 구역이 영구히 밝혀집니다. ]
‘이걸로 다섯 개째.’
시야 오브젝트.
그것은 요새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일종의 퍼즐 조각 같았는데 어쩔 때는 구조물에, 어쩔 때는 거인들의 생필품에 낙서처럼 새겨져 있었다.
확보 방식은 간단했다.
낙서처럼 새겨진 주문진에 손을 잠시 올려 두는 것.
헨리가 미니맵을 활성화시킨 후 전체지도를 확인했다. 그러자 거대한 요새 형상이 눈앞의 홀로그램처럼 띄워지며 현재 헨리가 있는 위치가 나타났다.
‘이쯤에 무덤이 있을 거란 말이지.’
홀로그램처럼 띄워진 지도는 요새의 외형만 보여 주었다.
허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내부까지 자세히 보여 줄 거란 건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헨리가 다섯 번째로 획득한 시야 오브젝트는 요새의 외곽에 위치한 거인병사들의 숙소 쪽이었다.
‘이제 여기만 넘으면…….’
병사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시설 및 병원이 나타난다. 문틈을 넘자 매캐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른다.
“지금!”
그때였다.
휘리릭!
헨리의 위로 그물망이 떨어진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