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3화
중독되어 거무칙칙하게 죽어 가던 피부가 거짓말처럼 다시 제색을 되찾았다.
그 변화에 놀란 건 헨리뿐만이 아니었다.
아르고스의 여덟 머리도 심상찮음을 느끼고 또다시 합동 공격에 들어갔다.
[ <업화>가 발동됩니다. ]
허나 헨리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고리대금업자의 독주머니는 셈을 시작했고 분노한 아르고스는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으니까.
전신에 지옥의 업화를 두른 헨리는 몸을 회전시켜 화차(火車)가 되었다.
회전하는 화차에서 뿔처럼 튀어나온 건 화산검이요, 그것은 곧 사악한 뱀을 단죄할 징벌의 검이 될지니.
화아아악!!
헨리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일순간 불꽃 무지개가 만들어졌고.
서걱!
놀랍게도 일격에 베이지 않던 아르고스의 머리가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두 동강 나고 말았다.
“키에에에에에!!”
아르고스가 울부짖는다.
범의 앞발처럼 스스로를 휘둘러 머리를 벤 헨리는 허공을 발판 삼아 다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대각선 방향으로 치솟아 한 대의 용맹한 화차가 되어 또 다른 머리를 베었다.
[ <아르고스>가 분노합니다. ]
[ <아르고스>가 분노합니다. ]
[ <아르고스>가 분노합니다. ]
……
남은 머리는 다섯.
남은 머리들은 마치 형제라도 잃은 것처럼 울부짖었다.
울부짖음이 클수록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고 슬픔과 비례한 분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르고스들을 강력하고 흉포하게 만들었다.
“쿠아아아아아!!”
네 개의 머리가 동시에 헨리에게 뿜어졌다.
화령자수의 망토에 지옥불을 휘감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한 폴 뿐인 천 자락만으로 그들의 포이즌 브레스를 모두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 <고리대독>이 발동됩니다. ]
허나 그때마다 독주머니가 복어처럼 몸을 부풀렸다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그와 함께 헨리를 좀먹던 죽음 같은 맹독들을 한 번에 흡수했다.
헨리의 허리춤에는 죽음이 자라났다.
헨리도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속도를 냈다.
화차가 또 하나의 머리를 베어 낸다.
“쿠와오오오오!!”
머리는 여럿이나 몸은 하나였기에 형제의 고통은 곧 자신의 고통과 같다.
사방에 아르고스의 울음이 높아진다.
그즈음 하나의 머리가 또다시 베어 넘겨졌고.
“키아아아아아아!!!”
범인(凡人)이라면 귀가 멀고도 남을 울음소리가 또 한 번 천장 없는 동굴을 가득 메워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칼질은 계속됐고 불꽃은 끊임없이 번졌다.
절삭음은 물론이요 탄내와 피 비린내, 독내음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은 머리는 단 하나.
‘이제 정말 시간이 별로 없다.’
간신히 땅에 발을 붙인 헨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 회복정을 쥐어 입에 넣고 까드득 씹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찼고 심장이 아려왔다.
지나친 업화의 남발로 탈수 증상 비슷한 것도 왔다.
허나 이젠 정말 다 왔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떻게 8개에 달하는 머리는 모두 베고 태우는데 성공했으나 정작 제일 중요한 우두머리 대가리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제는 ‘아르고스들’이 아닌 ‘아르고스’가 되어 버린 녀석.
참수된 머리들은 모두 새카맣게 타 버려 새로운 머리가 자라나지 못했다.
녀석은 울부짖지 않았다.
대신 그르르 입 안에 독을 품으며 품은 독보다 더 매서운 눈빛으로 헨리를 노려보았다.
소강상태일까?
아니.
두 존재는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흔히들 고수의 싸움이 한 합 만에 끝나버린다는 것처럼, 싸움의 끝자락에 선 두 존재는 자신들의 싸움이 절정에 다다랐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 <업화>가 발동됩니다. ]
모든 걸 태워 삼킬 지옥불이 헨리의 전신에 솟구쳤고, 로켓이 발사되듯 아르고스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헨리의 손에는 이 싸움을 끝낼 비장의 한수가 들려져 있었다.
화산검이 아니었다.
바늘이었다.
화산지대에 사는 커다란 도롱뇽의 척추뼈로 만들어졌다고 알린 용암 도롱뇽의 바늘이.
아르고스는 분노했다.
옆이나 뒤도 아니고 앞으로 돌진해 오다니.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누구보다도 정직한 공격로였기에 아르고스는 더더욱 분노했다.
그렇기에 가진 에테르와 전신의 독을 모두 끌어모아 독무(毒霧)가 아닌 독액(毒液)으로 이루어진 최후의 포이즌 브레스를 뿜었다.
콰과과과과과과!!
보라색도 아닌 거무칙칙한 독액.
독을 넘어 산성(酸性)까지 띤 그것은 닿기만 하면 중독되기도 전에 모든 걸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헨리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고 바늘과 함께 한 발의 거대한 불화살이 되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치아아아아아!
검은 독액 사이, 그 안에 화염살이 들어갔고 잠시 뒤 사라졌다.
아니, 집어삼켜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죽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후콰학!!
대나무살이 터지듯 포이즌 브레스가 터졌다.
그리고 독액을 뿜어내는 아르고스의 아가리 지척에서 헨리는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라!
바늘과 하나 된 헨리의 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치솟는 붉은 화염은 실이 되어 도롱뇽 바늘과 함께 아르고스의 목구멍을 꿰고 뒤편까지 이어졌다.
화화화화화!!
치솟는 불꽃,
타오르고 있는 건 이제 혼자 남은 마지막 머리였다.
“키에에에에!!”
괴물이 사는 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아르고스의 울음소리는 피멍울이 뒤섞여 그렇게 울었다.
쿵!
쿵!
쿵!
가장 끔찍한 고통이 작열통이라고 했던가.
마지막 남은 머리가 우두머리의 그것이라 그런지 녀석은 꽤 오랫동안 발버둥 쳤다.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히고.
그리고 마침내 오랜 발악이 끝났다 생각되었을 때였다.
쿠웅!!
참수되지 않은 녀석의 머리가 지면으로 떨어졌고.
[ <아르고스>를 처치하셨습니다. ]
어비스 아카이브가 헨리의 완전한 승리를 보증해 주었다.
“후우…….”
바닥에 착지한 헨리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현기증이 돌았지만 금방 회복됐다.
평소와는 달리 매 순간을 최대 출력으로 에테르를 쥐어짜서 사용했다.
아마 스카샤의 심장이 없었다면 진작에 폭주하여 신체 어딘가가 망가졌을 것이다.
‘신체 개조를 괜히 하는 게 아니군.’
그렇기에 더더욱 메두사의 보상이 기대가 됐다.
‘그나저나 얼른 여길 나가서 루메인을 만나야 한다.’
아르고스는 쓰러뜨렸지만 아직 헨리에겐 처리해야 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헨리의 허리춤에 도사리고 있는 검은 죽음, ‘고리대금업자의 독주머니’였다.
고리대금업자의 독주머니는 새하얀 가죽 주머니였던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검붉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진동 소리.
그와 함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공동이 울렸으며 이윽고 공동의 열린 천장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처럼 거대한 존재감.
허나 어둠과 함께 등장한 그것의 실루엣은 익히 아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 금빛 눈동자가 개안된다.
메두사였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설마 했더니 정말로 아르고스를 해치웠을 줄이야.”
달처럼 트여진 거대한 눈동자는 매우 흥미롭다는 듯, 참수되고 불탄 자신의 자식을 보았다.
그에 헨리는 죽은 자식을 구경하는 어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로써 자격은 증명된 건가?”
“자격이라…… 여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으니 자격이야 당연히 증명했지.”
“그럼 이제 약속한 걸 이행해라.”
“쿠쿠, 너무 메마른 거 아냐? 이래 뵈도 난 자식 잃은 어미인데.”
“보통의 어미들은 타인을 시험하기 위해 자식을 내놓지는 않지.”
“그건 맞아.”
그 말과 함께 메두사의 몸이 서서히 축소되었고 선녀가 안착하듯 헨리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확실히 고집 있는 애는 다르네. 여태 키우는 선수랍시고 보내 온 놈들은 보통 놈들보단 강했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온실 속 화초처럼 보였거든.”
온실 속 화초라.
그들 또한 목숨 걸고 투쟁하는 자들일 텐데 아이러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메두사는 호수에 반쯤 몸을 담근 채 죽은 아르고스에게 다가갔다.
그런 다음 유일하게 목이 잘리지 않은 머리에게 다가가 진짜 어미처럼 부드럽게 탄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태어나게 되면 그땐 성질머리 좀 죽이거라.”
뭘 하는 걸까?
죽은 자식 불알이라도 만지는 걸까?
변화는 그때 생겨났다.
화아아!
덕담인지 충고인지 뭔지 모를 것이 끝난 순간, 아르고스의 몸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쓰다듬은 머리를 기점으로 천천히 온몸을 잠식해 나간 금빛은 이내 곧 호수 속에 잠긴 꼬리 끝까지 모두 감싸 안았으며, 차츰차츰 그 덩치를 줄여 가더니 마침내 두 손으로 안을 수 있을 만큼 작아졌다.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웬 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메두사는 그것을 들어 올려 헨리에게 보여 주었다.
“후훗, 보았느냐?”
“뭘 한 거지?”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처음?”
“그래. 혹시 장수를 상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느냐?”
갑작스러운 물음.
그 물음에 헨리는 가우스에서 장수로 가장 유명한 생물인 ‘거북이’를 이야기했다.
“그렇지. 거북이도 장수의 상징 중 하나지. 하지만 제아무리 거북이가 장수의 상징이라 할지라도 그건 장수일 뿐이지 영생은 아니지.”
“영생의 상징이 뱀이란 걸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그래. 뱀은 장수가 아닌 영생의 상징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바로 죽은 껍데기 속에서 새로운 육체를 싹 틔우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우린 그걸 ‘뱀의 운명’이라고 부르지.”
말을 잇던 메두사는 알이 된 아르고스를 자신의 품에 집어넣었다.
“내가 너에게 줄 것들 중 첫 번째가 바로 뱀의 운명이다. 스카샤가 네게 근본적인 강함을 선물해 주었다면 나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는 오직 뱀들만이 타고 나는 운명을 네게 선물해 주마.”
메두사가 말을 마친 순간, 그녀의 목과 가슴 사이에서 황금빛 구슬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것이 바로 뱀의 운명이다. 어비스에서 오직 나만이 나눌 수 있는 고귀한 힘이지. 자, 받거라. 이걸 받는 순간 너는 사경을 헤매는 죽음의 고비 때마다 한층 더 강력한 존재로 진화하게 될 테니.”
자격을 증명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시간이다.
금빛 구슬이 헨리의 몸에 스며들어갔고 그것은 맑은 호숫가에 비치는 햇살처럼 신비로운 파동을 뽐내며 흡수되었다.
헨리는 자신의 두 손아귀를 비롯한 몸 전체를 살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뱀의 운명으로 인해 생긴 변화라던가 아카이브의 알림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스카샤의 심장 때와 마찬가지였다.
“아카이브는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가?”
“성격이 급하구나. 곧 알게 될 거다.”
헨리의 물음에 메두사가 웃는다.
그러더니 이내 곧 손가락을 튕겼고.
빠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다름 아닌 헨리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고리대금업자의 독주머니’였다.
독주머니가 부서지자 그 안에 들어 있던 독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