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1화
“투자라…….”
그 말에 허멀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객님은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하신단 말이에요.”
“내 가치 증명은 충분히 됐을 텐데?”
“참 겸손만 하셨어도 밉지는 않았을 텐데.”
그 말과 함께 허멀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수많은 무구와 소모품들이 허멀트의 주변에 둥둥 떠올랐다.
“뱀 신전의 테마가 뱀이라는 건 눈 뜬 장님이 아니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일 테고 이무기가 진짜 주인이 아니어도 어차피 그 진짜 주인도 뱀과 관련된 존재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뱀잡이에 특화된 아이템들로 장비를 새로 꾸려야겠죠. 근데 이게 값이 만만치가 않아요. 더 이상 마냥 외상으로만 드리기에는 제가 좀 부담이 될 정도로.”
“그래서?”
“근데 고객님이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외상이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하라고. 그래서 생각을 좀 해 봤는데 투자, 까짓 거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근데 투자라는 건 보통 투자처에 대해 좀 알고서 하는 거잖아요?”
“원하는 바를 말해라.”
간보듯 살살 거리는 행동에 헨리가 직구를 던졌다. 허나 허멀트는 평소와는 달리 훨씬 더 침착했다.
“크흠. 너무 조급해하신다. 제 입장에서도 이건 엄청난 고민이라구요. 그러니 확실한 투자를 원하신다면 투자자의 마음부터 좀 얻어 주시죠?”
“…일 리가 있군.”
헨리의 수긍에 허멀트가 웃었다. 그리고 슬슬 본론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럼 우선 고객님이 먼저 천년전쟁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저도 한번 말해 볼 게요. 제 생각에 고객님은 반드시 중층으로 올라가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삼강 세력과 마주하게 되시겠죠.”
삼강.
허멀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멀트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전에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고객님은 현재 스폰서가 있습니까?”
스폰서.
소속이 있냐는 말.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없다.”
“두실 생각은 있구요?”
“삼강 중에서 말인가?”
허멀트는 대답 대신 눈빛을 빛냈다.
그에 헨리가 고개를 저었다.
“없다. 제안이라면 혁명군 쪽에서 진작에 들어왔고 이미 거절한 지 오래다.”
“왜 거절하셨어요? 그런 제안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랑은 뜻이 안 맞아. 난 내 세상을 구하는 것과 더불어 탑의 주인 되는 놈들을 부숴 버릴 생각이거든. 게다가 무엇보다도…….”
헨리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난 이미 모시고 있는 분이 있다.”
“고객님이요?”
“그래.”
헨리가 모시는 자.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가 멈춘 세상에서 홀로 외로움과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의 위에 누군가를 둘 수 없었다.
“신기하네요. 제 잘난 맛에 사실 줄 알았던 고객님이 의외로 누군가를 모시고 있었다니.”
“엄밀히 따지자면 돌봐 주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그래서, 이제 호기심은 다 채웠고?”
“예, 다 채웠습니다. 덕분에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감이 왔구요.”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지?”
“제 생각이 맞다면, 고객님은 삼강을 고객님의 발아래 두실 거 아니신가요?”
그 말에 헨리가 옅게 웃었다.
의표를 찌르는 물음.
사실이었다.
“그래, 그럴 생각이다.”
“역시. 삼강을 규합하고 새로운 세력을 만드실 줄 알았습니다.”
“결국 천년전쟁은 상층에 도전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요.”
허멀트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이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앞으로 고객님께 필요한 모든 걸 지원해 드릴 테니 대신 고객님은 고객님께 필요한 걸 제외한 모든 것들을 제게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모든 걸 넘겨달라고?”
“풀어서 설명드리자면 새로 만드실 단체에서 발생될 금전적 이권의 모든 걸 독점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전 어비스 최고이자 최대 규모의 거상이 되는 게 꿈이거든요. 근데 그러려면 크고 좋은 거래처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겠죠?”
“기존의 거래처를 빼앗는 게 아닌 새로운 대형 거래처를 만들어 독점하겠다는거군.”
“뭐 그 과정에서 기존의 거래처들도 흡수해 올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뭐 어쨌든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밖엔 생각이 안 나네요.”
“내가 실패할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건가?”
헨리의 물음에 허멀트가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 전혀요.”
확신에 찬 대답.
그 어떤 아부보다도 듣기가 좋았다.
“그 투자, 꼭 보답하지.”
“좋습니다.”
그때였다.
[ <화산 푸줏간 주인의 칼>을 획득하셨습니다. ]
[ <화령자수의 망토>를 획득하셨습니다. ]
[ <빈약한 고집불통>을 획득하셨습니다. ]
[ <고리대금업자의 독주머니>를 획득하셨습니다. ]
[ <편집증 환자의 눈>을 획득하셨습니다. ]
눈앞에 뜨는 다섯 개의 메시지들.
허멀트가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아이템들이었다.
“다섯 개?”
“투자는 원래 확실하게 해야 투자인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보다 어비스의 뱀들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이를 테면?”
“어비스에선 상식인 건데 이곳의 뱀들에게 조심해야 할 것 3가지라던가요.”
“세 가지라면 독, 조르기, 은신술을 마하는 건가?”
“맞아요. 그럼 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요?”
“불.”
헨리의 막힘없는 대답에 원래라면 잘난 척 한다며 인상을 찌푸렸을 허멀트가 이번에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준비한 이 다섯 가지는 방금 언급한 것들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설명해 드릴까요?”
“써 보면서 직접 확인해 보지.”
“좋네요. 포션은 안 필요하세요?”
“해독제는 좀 필요할 것 같네.”
그 말에 허멀트는 가진 해독제 중 가장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가득 안겨 주었다.
“그럼 행운을 빌어요.”
허멀트는 마지막으로 명함을 건네주었고 헨리가 그것을 받아 들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허멀트가 사라진 뒤 헨리가 받아 든 장비들을 겉으로 훑어보며 생각했다.
‘준비는 이게 최선이겠지.’
더 이상 아는 조력자는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렸다.
헨리가 어둠 속에 벌어진 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참방-
물은 없었지만 마치 물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순간 전신에 퍼졌다.
그와 함께 공기층이 달라졌다.
‘무겁고…….’
갑갑했다.
마치 고산지대에 올라 선 느낌.
공기 중에 녹아 있는 에테르 농도가 달라져서 이런 것이다.
헨리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푸른 은하수가 펼쳐진 천장.
앞에는 거대한 터널이 있었다.
“라이트.”
화악!
어둠을 만났으니 발광체를 뿌리는 건 당연지사. 발광체를 흩뿌리자 사위가 밝아진다.
그런데……
‘음?’
이상했다.
발광체로 분명 사라졌어야 할 터널 속의 어둠이 걷히지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라의 눈을 사용했으나.
‘음.’
라의 눈으로도 특별히 포착되는 게 없었다.
그냥 가야 할까.
아니.
육감이 말하길, 저 어둠 속엔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게 확실했다.
그러다 문득 허멀트가 준 아이템들이 떠올랐다. 헨리는 아이템들의 정보를 차례대로 훑어보던 끝에 ‘편집증 환자의 눈’을 착용했다.
그것은 안경의 형태로 된 것이었는데 코 위에 얹자마자 자연스레 녹아 사라지며 플레이어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
[ 편집증 환자의 눈 ]
등급 : 특별, 장인
설명 :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어야 했던 어느 편집자의 눈. 착용 시, 위장과 은신 계열의 스킬 사용자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
재밌는 설명.
헨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식으로 스킬 사용자를 구분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의 정체를 알게 되자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쁜 기운을 풍기는 어둠.
어둠이 아니었다.
그 진실은 다름 아닌 어둠인 척 하는 ‘뱀’이었다
뱀들은 조용히 어둠인 척 위장하여 헨리가 자신들의 아귀에 들어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나 방심할 수가 없군.’
헨리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 다음.
[ <서리풍>이 발동됩니다. ]
슈아아!
스킬이 발동됐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서리풍이 거센 풍압으로 파도처럼 뿜어졌다.
“시시시시!”
마법이 아닌 에테르가 함유된 스킬이기에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녀석들은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강추위에 군집을 풀고 고통에 떨었다.
그러다 얼마 못 가……
[ <어둠무늬 흑뱀>이 빙결 상태에 빠집니다. ]
[ <어둠무늬 흑뱀>이 빙결 상태에 빠집니다. ]
[ <어둠무늬 흑뱀>이 빙결 상태에 빠집니다. ]
……
수많은 양의 아카이브 알림이 헨리의 눈앞으로 쏟아졌다.
알림을 오프한 헨리는 허공에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동굴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바위가 생겨나더니 이내 곧 무서운 속도로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 <어둠무늬 흑뱀>을 처치하셨습니다. ]
[ <어둠무늬 흑뱀>을 처치하셨습니다. ]
[ <어둠무늬 흑뱀>을 처치하셨습니다. ]
……
롤링 스톤.
스킬이 아닌 마법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녀석들이 구르는 바위에 터져 죽은 까닭은 마법이나 에테르와는 관련 없이 롤링 스톤의 순수한 물리력에 의해서였다.
으적! 으적! 으적!
바위는 계속 굴러 갔고 바위 구르는 소리와 더불어 얼음 깨지는 소리, 뱀의 살과 뼈가 터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렸다.
바닥에 녀석들의 살얼음 피가 밟힌다.
헨리는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제 라의 눈도 슬슬 힘을 다 하지 못하는군.’
슬픈 일이었다.
그러니 얼른 라의 눈을 대체할 만한 것들을 찾아야 했다.
이를 테면 이번에 손에 넣은 ‘편집증 환자의 눈’ 같은.
터널은 꽤 깊었다.
한참을 나아가니 또다시 미지의 어둠이 나타났다.
다행히 이번엔 어둠으로 위장한 뱀이 아니었다.
순수한 어둠이었고 어둠을 거의 헤쳐 나갈 무렵, 저 멀리 빛이 보였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
물 특유의 냄새도 난다.
이윽고 빛이 뿜어지는 곳에 완전히 발을 들였을 때 눈앞에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그곳은 드넓은 호수와 더불어 하늘이 보이는 거대한 공동이었다.
다음 장소로 향하는 문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였다.
부그르르르……
호수 전체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그와 동시에 수포가 솟았고 헨리는 제자리에 서서 호수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콰아아아!
마침내 호수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저걸 과연 호수의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정확히는 주인‘들’에 가깝겠군.”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호수의 주인들.
그들은 몸이 하나였다.
허나 머리가 여러 개였다.
그렇기에 주인들이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그쯤 아카이브의 알림이 눈앞에 떠올랐다.
[ 보스 몬스터가 출현합니다. ]
[ <아르고스>가 강림합니다. ]
아르고스.
아카이브는 녀석을 보스 몬스터라고 불렀다.
허나 헨리는 아르고스라는 이름보다는 그에게 더 어울리는 이름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의 주인은 아르고스처럼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고 머리를 잘려도 잘린 목에선 계속해서 새로운 목이 돋아났다.
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독을 가졌다고도 알려졌다.
그 이름은 바로 ‘히드라’.
호수의 주인.
히드라를 연상케 하는 아르고스와 마주한 헨리가 조용히 검을 치켜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