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0화
거인.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메두사는 거대했다.
티탄만큼 거대한 그녀는 금빛 누런 황금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헨리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물었다.
“자식 대신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건가?”
“앙갚음이라…… 후훗, 재밌구나.”
헨리의 물음에 그녀가 후훗 웃는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맞서 싸워야겠지.”
메두사의 물음에 헨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도롱뇽 바늘을 꺼내 들었다.
허세 같은 게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런 점이 메두사의 흥미를 끌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대답은?”
그 순간, 티탄처럼 거대했던 그녀의 몸이 헨리와 비슷할 정도로 작아졌다.
그 탓에 헨리 또한 바닥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자신 앞에 선 헨리에게 메두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앙갚음은 무슨, 겨우 그 정도 공격으로 우리알은 안 죽어.”
적의가 없다면 헨리 또한 메두사와 싸울 이유가 없다.
도롱뇽 바늘을 집어넣자 두 사람 사이에 티 테이블이 생겨났다.
티 테이블 위엔 아무것도 없었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녀가 먼저 테이블 앞에 앉자 헨리도 따라 앉았다. 그녀가 고혹적으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스카샤를 만나고 오는 길이지?”
그 말에 헨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메두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내가 스카샤를 알고 있어서 놀랍니?”
“안 놀랍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별로 놀랄 것도 없어. 중층로의 터줏대감인 내가 중층로에서 모르는 건 없으니까.”
“그렇군.”
중층로의 터줏대감이라.
말인즉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거물이라는 말.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초행길에 스카샤를 만났다는 건 위쪽에 줄이 있다는 얘기겠지?”
“아는 녀석이 하나 있을 뿐이다.”
“아는 녀석 하나? 특이하네. 난 적어도 네가 위층 세력 중 하나가 키우는 놈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왜긴, 나랑 약속했으니까 그렇지.”
“약속?”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네. 뭐,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난 약속만 이행하면 되니까.”
그녀는 알쏭달쏭한 말들만 했다.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메두사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비스에는 주기적으로 세력 전쟁이 일어나. 승자는 상층에 도전할 자격을 얻게 되고 패자는 승자의 수하가 되는 그런 시스템이지.”
처음 듣는 말.
클레버가 준 정보 중에는 없는 말들이었다.
“중층에는 세 개의 거대 세력들이 존재해. 혁명군, 질서단,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생긴 뉴어비스까지. 이 녀석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힘의 균형을 이뤄 온 놈들인데 곧 녀석들을 위한 무대가 다가오고 있어. 천년전쟁이라고 아나 몰라.”
천년전쟁.
처음 듣는다.
그와 더불어 혁명군의 언급에 헨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혁명군은 클레버가 속해 있는 단체의 이름이었으니까.
경청하는 헨리에게 메두사가 물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 그들은 왜 천년이라는 주기를 정하고 그때까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 물음에 헨리는 잠시 고민 끝에 대답했다.
“외부의 개입이 있었겠지.”
헨리의 대답에 메두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맞아. 바로 상층이라는 외부의 개입이 있었기에 녀석들의 삼강 구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거야.”
“그럼 천년이라는 시간은 외부에서 정해 준 일종의 준비 기간이겠군.”
“맞아. 그래야 진짜 강자를 가릴 수가 있었으니까.”
세력 전쟁.
탑에선 그걸 천년전쟁이라고 불렀다.
천년전쟁은 일종의 스포츠였다.
최선의 컨디션과 최고의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열강들이 모든 힘을 쏟아부어 싸우는.
그래야지만 진정한 강자를 가릴 수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빈집털이나 음해, 이간질로 얻어 낸 승리는 진정한 승리라고 볼 수 없지. 왜냐면 그들의 최종 목적은 자기들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상층’에 도전하는 것이니까.”
“천년전쟁에 대해선 이해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네가 말하는 약속이란 게 뭐지?”
“후훗, 그렇잖아도 지금 말하려고 했는데 참을성이 꽤 부족하구나. 약속이란 건 간단해. 준비 기간인 천년의 세월 동안 어느 세력이 됐든 먼저 나한테 ‘선수’를 보내는 쪽을 키워 주기로 한 것, 그게 바로 내가 그들과 한 약속이야.”
“선수를 키워?”
“그건 알지? 이곳 어비스는 한번 층계를 올라가면 두 번 다시 아래로 내려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씩 위층의 존재가 아래에 나타나는 건 무슨 경우지?”
“그건 굉장한 패널티를 감수하고 행동하는 거란다. 그리고 그놈들 대부분이 삼강에서 나온 애들이고.”
“선수란 걸 영입하기 위해서인가?”
“맞아.”
그 말에 헨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어쩌면.
어쩌면 클레버도 그런 이유로……
아니, 아직 모든 걸 속단하기엔 이르다. 모든 균열의 시작은 불신에서 시작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먼저 선수를 보내는 쪽을 키워주기로 했는데 삼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내가 나타났다?”
“맞아. 그래서 의아한 거지. 너 진짜 아무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거 맞아?”
“내가 찾고 있는 녀석이 혁명군에 소속되어 있단 건 안다.”
“흠, 어쩐지.”
“하지만 너에 대한 정보는 조금도 듣지 못했다.”
자신은 혁명군과 관련이 없음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메두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못 듣긴. 내 신전에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뭘 알고 있으니 들어온 거겠지. 스카샤도 그런 식으로 알게 된 거잖아?”
“그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키워 줄게, 널.”
“키워 준다고?”
“너도 혁명군 소속이잖아.”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난 아무 세력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혁명군에 들어오라는 제안도 거절했고.”
“하지만 혁명군의 정보는 이용하고 있지.”
“그건…….”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어찌 보면 클레버가 알게 된 정보들은 모두 혁명군이 알려 준 것들일 테니.
메두사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됐어. 네 신념 같은 건 네가 알아서 하고 난 진실을 확인했으니 약속만 이행하면 돼. 그러니 얻게 된 힘은 네가 알아서 쓰도록 하고.”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원래 스스로 지는 것이니.
헨리가 물었다.
“그래서, 날 어떻게 키워 주겠다는 거지?”
“너에게 내 일부를 나눠 주마.”
“뭐?”
“뭘 놀라고 그래? 플레이어들이 강해지려면 신체 개조란 걸 해야 하잖아? 그러니 나눠 주겠다는 거야, 내 일부를.”
스카샤 때와 똑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일부를 플레이어에게 나눠 주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반쯤 기울이며 웃었다.
“너, 설마 스카샤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해?”
이건 또 무슨 말일까?
헨리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어비스에게 세상을 빼앗긴 우린 마음대로 죽지도 못해. 그저 어비스가 원하는 대로 천년이고 만년이고 이곳에 갇혀 살아갈 뿐이지. 그렇다고 동정하진 마. 난 나 나름대로 이곳을 즐기며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그게 무슨…….”
“던전은 일종의 감옥이야. 그리고 영원하지. 탑의 주인이라도 바뀌지 않는 이상 그 순환 구조는 영원할 거야. 생각해 봐. 그렇지 않고서야 천년전쟁이 왜 존재하고 그 많은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겠어?”
말을 잇던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검기만 하던 주변 풍경의 한 귀퉁이가 열렸다.
“스카샤한테는 힘의 근원이자 에테르 코어가 될 심장을 얻었지? 잘했어. 녀석의 심장만큼 뛰어난 코어는 탑 내에서도 얼마 존재하지 않거든. 난 네게 눈과 운명을 줄게. 하지만 내 일부를 얻고 싶다면 자격을 증명해야 될 거야.”
벌어진 틈.
그 안에선 스산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는 내 머리에서 태어난 수많은 아이들이 있지. 하지만 그 아이들이라고 모두 착한 아이는 아니야.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이름조차 몰라. 네가 상대해야 될 아이는 내가 이름은 기억하지만 별로 애정하지는 않는 아이지. 아, 그렇다고 미워하는 건 아니고. 그러니 그 아이를 죽이고 자격을 증명해 보렴.”
손님의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내놓다니.
헨리로썬 이해 못할 처사였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알겠다.”
“쿨해서 좋네. 근데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거야. 저 너머에는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녀석이 있으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핏줄이라고 그동안 선수랍시고 보낸 플레이어들을 꽤 많이 잡아먹었거든.”
“그럼 저 녀석을 꺾고 네 일부를 받아간 플레이어는 없었나?”
“삼강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론 없었지.”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웃는 그녀.
그녀에겐 이 모든 게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
“행운을 빌어. 참고로 말하자면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그 녀석은 정말로 스카샤 보다 더 강하다구?”
사락.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밤하늘과 같은 공간 아래 서 있는 헨리와 그 사이에 벌어진 미지의 틈뿐.
퇴각로는 없었다.
‘스카샤보다 더 강하다라.’
메두사의 경고.
빈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한 말마따나 그녀는 스카샤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갇혀 NPC와 같은 역할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준비가 필요하겠어.’
아무리 헨리라고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다.
게다가 파트너였던 루메인까지 떨어져 나간 상황이니 헨리가 기대해 볼 수 있는 건 딱 한 녀석뿐.
헨리가 인벤토리에서 명함을 꺼내 찢었다. 명함을 찢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허멀트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싱글벙글 웃는 허멀트.
얼굴에 기대가 가득하다.
허멀트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드디어 오늘이 정산날인가요?”
“아니.”
“그럼요?”
“너, 혹시 천년전쟁이 뭔지 알고 있나?”
“천년전쟁이라면…….”
순간 사색이 되는 허멀트.
“고객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건 중층 미만 플레이어한테는 발설이 금지된 사항 중 하나인데?”
그런 거였나?
‘그래서 클레버가 알려 주지 않았던 거군.’
하지만 메두사는 알려 주었고 금지 사항에 대한 패널티를 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어떤 허용점이 있는 모양.
헨리가 말했다.
“여긴 뱀 신전의 지하다. 그리고 난 뱀 신전의 주인에게 자격에 대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고.”
“뱀 신전이라면…… 세상에, 그 커다란 이무기가 주인으로 있는 그곳 맞죠?”
“아니다.”
“아니라구요?”
“그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지만 아무튼 난 자격의 증명에 대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고 그 상대는 최소, 이전 던전의 주인보다 더 강하다.”
헨리의 설명에 허멀트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진다.
그러더니 상인의 감이 발동했는지 아까보다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헨리에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준비가 필요하겠군요. 꽤 많은.”
“그래. 상대는 뱀 신전의 주인이 경고할 만큼 강한 상대니까.”
“만약 그자를 쓰러뜨리고 자격을 증명하시면 고객님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으실 테구요.”
“그렇겠지.”
“그럼 이번에도 당연히 외상 거래겠네요?”
그 말에 헨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젠 투자라고 불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