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6화
[ 현재 위치는 <중층로 : 뱀의 신전>입니다. ]
[ 지금부터 한 달간 생존 미션을 시작합니다. ]
[ 생존에 성공한 플레이어들에게는 전원 통과 자격을 부여합니다. ]
다음 구역으로 넘어옴과 동시에 아카이브의 알림이 떴다.
이번 미션의 테마는 ‘생존’.
한 달을 버티면 전원에게 통과 자격을 부여한다고 하니 증표 쟁탈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할 수도 있다.
‘여길 처음 오는 사람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어비스는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친절한 척 위기에 빠뜨리는 걸 즐기는 못된 악동이다.
게다가 위층으로 향해야 하는 어비스의 모든 길들은 절대로 이전 미션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결코 쉬운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버가 말하길……
제 경험과 주변에서 모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어비스에서 주어지는 미션들은 대부분 ‘경쟁’보다는 ‘생존’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면 플레이어에 따라 빨리 끝낼 수도 있는 경쟁과는 달리 생존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클리어 타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시간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게 하층로나 하층의 경우엔 플레이어들이 고향에서 사용하던 힘이 통했을지 모르나.
중층……
아니, 중층로부터는 에테르와 스탯, 스킬, 아이템이 미치는 영향이 더 크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한 달은 매우 긴 시간이었다.
‘지독하게도 몰아붙이는군.’
허나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지 위층으로 올라가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띵!
알림 소리.
그와 함께 하늘에 커다란 전광판이 떠올랐다.
[ 29 : 23 : 59 : 58 ]
네 개의 숫자.
각각 일, 시, 분, 초를 뜻하리라.
헨리는 즉각 라의 눈을 발동시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이가 없다.
아무래도 스타트 지점은 플레이어 마다 랜덤인 모양.
오히려 잘됐다.
처음부터 귀찮게 플레이어들과 엮이는 것보다 홀로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편했으니까.
헨리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산봉우리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어느 신전을 보았다.
‘저기가 뱀의 신전.’
이번 미션지의 이름은 뱀의 신전.
그렇기에 주로 나오는 몬스터도 뱀이고 곳곳에 등장하는 테마도 전부 뱀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헨리는 우선적으로 저 신전으로 가야만 했다.
저곳이 안전해서가 아니다.
저곳이 가장 위험해서 가는 것이다.
만약 중층로의 2번째 미션 장소 중 ‘뱀의 신전’이란 곳에 소환되시고 그곳의 주인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강해지셨다면 그곳의 주인을 한번 사냥해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듣기로는 D구역의 잊혀진 던전 만큼이나 소문이 무성한 곳이 뱀의 신전이거든요.
뱀 신전의 주인.
클레버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무기라고 했다.
그리고 이무기는 용이 되기 위해 지상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존재로 확실히 전설과 어울렸다.
‘그럼 이번에도 이무기란 놈이 막대한 성장 보너스를 줄 확률이 높겠군.’
스카샤 때를 통해 어비스에 떠도는 소문이나 전설은 모두 어비스가 슬쩍 흘린 보물이란 걸 알게 됐으니까.
헨리가 신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카아아아!!”
갑작스럽게 들이미는 아가리.
한두 마리가 아니다.
한 번에 최소 네댓 마리가 아가리를 들이미는 이놈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뱀’이었다.
[ <업화>가 발동됩니다. ]
화아아악!
헨리는 침착하게 도롱뇽 바늘로 지옥불 업화를 뿜었다.
그러자 지옥불을 직격탄으로 맞은 뱀들이 지척에도 다가오지 못하고 후두둑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의 눈 덕분이었다.
모든 것을 관조하는 라의 눈이 없었다면 여러모로 곤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의 뱀들은 하나 같이 보호색과 위장 스킬이 뛰어나서 아무리 기감을 예민하게 돌려도 직접 아가리를 벌리기 전까진 좀처럼 탐지가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슬 라의 눈을 대체할 만한 걸 찾아야겠군.’
그런 라의 눈도 슬슬 한계가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위층으로 갈수록 모든 존재의 에테르가 점점 강해지고 있고 그들의 에테르가 강해질수록 라의 눈 또한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때였다.
“으아아아!!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비명 소리.
눈살을 좁혀 시야를 확대하자 저 멀리 수백여 마리의 뱀에게 둘러싸인 이가 보였다.
그는 소년처럼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투명한 방어막 속에 웅크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무시해야겠지.
굳이 타인과 엮여서 좋을 것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는데 구해 줄 필요도 없다.
‘…스카샤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 생각했겠지.’
허나 스카샤를 만나고 나서부턴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쩌면, 탑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어비스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그때였다.
- 거, 거기! 백발머리 플레이어분! 저 좀 도와주세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에테르가 강제로 머릿속에 주입되는 감각이었다. 헨리가 눈살을 좁히자 그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 왔다.
- 저 보셨잖아요! 제발 모른 척 마시고 저 좀 살려 주세요! 물론 공짜로 살려 달라는 거 아닙니다!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선의를 발휘하려 했던 자신의 뜻이 퇴색된다.
‘뭐, 상관없겠지.’
그깟 선의.
탁한 오해를 받을지언정 이미 베풀기로 했다면 그냥 베풀면 된다.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이었으니.
헨리는 몸을 틀어 아까보다 훨씬 더 많아진 뱀 떼를 향해 도롱뇽 바늘을 들었다.
[ <업화>가 발동됩니다. ]
화아아악!
지옥불은 화염 방사기의 그것처럼 뿜어졌다. 뿜어진 지옥불은 화염 폭풍이 되어 뱀과 함께 이름 모를 남자까지 덮쳤다.
탄내가 진동한다.
뱀들이 무리 지어 있던 자리엔 까만 재들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이 생겼다.
남자도 죽은 걸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죽을 운명이었다면 뱀 떼에 휘말렸을 때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
그즈음 무덤에서 솟아나는 좀비처럼 재의 언덕에서 남자의 손이 솟았다.
“끄어어어!”
요란한 비명 소리와 함께 얼굴까지 내미는 남자.
잿가루에 범벅돼 숯검댕이가 된 남자가 자신의 몸을 탈탈 털며 헨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휴,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정말 구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구해 주셨으니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법 예의가 바르다.
허나 감사 인사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갔다.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지?”
“그거라뇨?”
“영성처럼 머리에 울리게 하는.”
“영성? 아아, 속삭임 말입니까?”
“속삭임?”
“예, 속삭임요. 그건 스킬입니다. 꽤 유명한 대화 스킬 중 하난데 위치가 특정된 대상한테 일방적으로 저의 말을 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군.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거지?”
“이 정도 스킬은 차원상인들도 취급할 걸요? 아참, 그보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 루메인이라고 합니다. 연단술사 일을 하고 있고 이케라는 차원에서 왔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루메인.
그는 연단술사이며 ‘이케’라는 차원에서 온 플레이어라고 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루메인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매만졌다.
“아! 그렇죠! 절 구해 주셨으니 약속대로 보답을 드려야죠!”
루메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는데 안에는 콩알 정도 크기의 푸른색 알맹이들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회복정입니다.”
“회복정…….”
그 말에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회복정.
포션이 액체라면 정은 알약의 형태.
확실히 있으면 좋은 거긴 하지만 매 거래 때마다 허멀트에게 받는 게 회복 포션이라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때 헨리의 표정을 읽은 루메인이 다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잠시만요! 이거 평범한 회복정이 아닙니다!”
“그럼?”
“이거 무려 에테르 회복정이에요. 그것도 제가 직접 만든.”
“음?”
그 말에 헨리는 받은 회복정의 정보를 확인했다.
++
[ 연단술사 루메인이 만든 특제 에테르 회복정 ]
- 등급 : 특별, 장인, 희귀
- 설명 : 연단술사 루메인이 직접 만든 특제 에테르 회복 아이템. 크기를 축소해 휴대성을 증대시키고 본인만의 특별한 가공법으로 보관성을, 마지막으로 작은 크기에 비해 막대한 에테르 회복력을 첨가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옵션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무리가 가지 않는 무해성에 있다.
++
루메인의 말 대로였다.
게다가 기나 긴 설명은 대부분 좋은 말들뿐.
아이템의 설명을 통해 헨리는 루메인이 꽤나 실력 있는 연단술사라는 걸 알 수 있었고 덕분에 이 정도면 꽤 납득할 만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스카샤와의 싸움에서 회복 포션도 중요하지만 에테르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
헨리가 회복정을 인벤토리에 넣으며 몸을 돌렸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고 한번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더 이상 같이 다닐 필요가 없었다.
헨리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였다.
“잠깐만요!”
루메인이 헨리를 붙잡았다.
그에 헨리가 눈살을 좁히며 먼저 선을 그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난 파티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엑? 왜요?”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
그 물음에 짧게 대꾸했다.
“귀찮으니까.”
“하지만 무려 뱀의 신전인데요? 여기서 한 달이나 버텨야 해요!”
그 말에 헨리는 ‘그래서?’라고 대답하려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무려 뱀의 신전?’
뱀의 신전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물어보았다.
“뱀의 신전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척척박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참가자들 중에선 제가 제일 많이 알 걸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전 아주 오래 전부터 뱀의 신전을 찾아다녔으니까요.”
“오래 전부터?”
“네. 오직 중층로에만 존재하는 랜덤 미션지 중에 하나인 뱀의 신전에 들어오기 위해 제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아세요?”
“노력?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인가?”
“당연하죠. 중층로도 하층로처럼 도중에 기권이 가능하잖아요. 그럼 하층으로 가게 되고 뱀의 신전이 나올 때가지 재도전 하는 거죠.”
“생각보다 꽤 무식한 방법이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미션지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텐데?”
“죽을 것 같으면 1미션지에서도 기권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도전하면 되죠.”
“지독한 집착이군. 그렇게까지 이곳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이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들고자 하는 약이 있는데 그 재료 중에는 이무기한테서밖에 얻을 수 없는 게 좀 있거든요. 그리고 중층 이전 단계에서 이무기는 여기밖에 안 나와요.”
놀랍게도 루메인은 이곳에 이무기가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꽤나 정보들이 디테일 한 게 클레버보다 더 잘 아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신전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같이 다닐 이유가 생긴다.
하지만 그전에 확인해야 될 게 하나 있었다.
“근데…….”
“네?”
“일반 뱀들한테도 쩔쩔매는 네가 신전의 주인 격이라 할 수 있는 이무기는 어떻게 잡을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