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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434화 (434/522)

2부. 34화

푸르고 투명한.

하지만 한없이 찬란한.

그것은 왕의 인장이었다.

하지만 왕의 인장을 본 데폴랑은 한동안 눈만 껌뻑였다.

놀란 게 아니다.

왕의 인장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게 6번 구역에 왕 계급은 여지껏 단 한 명도 탄생한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왕의 인장을 처음 보더라도 그 성스러운 찬란함과 빙빙 도는 왕관의 형상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기에 데폴랑의 눈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서, 설마 이거?”

“그래.”

“……맙소사.”

진실을 확인한 데폴랑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엘리트의 것도 아니고 무려 왕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데폴랑이 안절부절 하기 시작한 건. 헨리가 왕의 인장을 거두며 말했다.

“호들갑 떨 필요 없다.”

“하, 하지만…….”

“그보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 했으면 하는데.”

“하던…… 이야기요?”

하던 이야기.

그 말에 데폴랑은 불현듯 좀 전에 헨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이걸 네가 산다면 그땐 어떻게 되지?”

맙소사.

뭐라고?

이걸 산다면?

그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을 때 데폴랑은 아까보다 더 커진 눈동자로 헨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걸 파신다구요? 저한테요?”

“그래.”

“왜, 왜요?”

“또 말해야 하는 건가? 말했잖아, 웨이브 속에서 홀로 몸을 던진 병사는 너 하나뿐이었다고.”

헨리는 데폴랑의 용기를 높게 산 것이 아니다.

식스랜드에 체류해 있던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이곳의 질서는 금방 파악했다.

나설 수 있음에도 나서지 않은 못 되  처먹은 기득권과 매번 온몸을 바쳐 현실을 사수해야 하는 아랫 계급들.

허나 아랫 계급이라고는 도저히 생각 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자들을.

그렇기에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애초에 흑문은 아무도 통과할 수 없게끔 설계된 곳이다. 왕이라는 최고 계급을 미끼 삼아 실력자들을 구렁텅이에 처박아 버리기 위해서.”

“…예?”

금시초문이라는 표정.

헨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너 정도 되는 실력자가 멍청하게 동문에 도전하지는 않았겠지. 보나마나 흑문을 넘지 못하고 노동자 신세가 된 것일 터.”

헨리는 블루 체리가 말한, ’도전에 실패해도 하층에 입장시켜 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그리고 선의로 듣지 않았다.

당연했다.

클레버가 말하길, 모든 관리자들은 플레이어들의 적이라 하였고 그런 관리자가 실패 리스크도 없이 곱게 플레이어들을 하층에 입장시켜 줄 리는 만무했으니까.

‘아마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흑문에 도전했다가 노동자 신세가 되었겠지.’

그리고 블루 체리는 그런 광경을 보며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즉, 식스랜드에 존재하는 진짜 강자들은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엘리트 계급원들이 아닌 노동자 계급원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

“데폴랑.”

“예, 왕이시여!”

헤타르카일이 식스랜드의 지배자로 군림해 있는 동안 놈은 항상 자신을 왕으로 부르게 했다.

그렇다 보니 ‘진짜 왕’을 본 데폴랑은 몸에 밴 습관대로 자기도 모르게 헨리를 왕이라고 불렀다.

그 모습이 여러모로 안타깝다.

‘가짜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었군.’

헨리가 좁힌 눈살에 안타까움을 조금 섞으며 말했다.

“너는 왜 이곳에 남아 있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중층에 가는 법을 모르는 건가?”

“그건…….”

그 말에 데폴랑은 입을 다물었다.

“가짜들이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며 폭군처럼 군림하는 세상에서 진짜들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지. 바로 중층으로 가는 것.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중층으로 가는 법.

이곳에선 비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의중을 묻는 것이다.

그에 데폴랑이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세상에 꾸역꾸역 남아 있는 건…….”

아마도 데폴랑이라는 플레이어가 가진 선한 마음 때문일 터.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데폴랑을 선택했다.

지원 요청 없이는 해결을 가늠할 수 없는 전장 속에서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유일하게 웨이브 속에 몸을 던진 플레이어였기에.

오직 데폴랑 하나뿐이었기에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식스랜드에는 계속 남아 있을 건가?”

“예, 계속 남아 있을 겁니다.”

그 물음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는 데폴랑.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샜다.

“미련하군.”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난 미련한 사람을 좋아한다.”

“예?”

“난 위로 올라갈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게 이걸 공짜로 주겠다는 건 아니야. 말했잖아? 난 이걸 팔 생각이라고.”

“하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있어. 줄 수 있는 거.”

“있다구요?”

“그래. 하층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지. 시스템에도 구애받지 않고 말이야.”

“그게 무슨…… 혹시 어비스 포인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스탯.”

“예?”

“왕의 인장을 구매하고 싶다면 내게 스탯을 지불해라. 그것도 아주 막대한 양의.”

중층부터는 스탯과 스킬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가지는 곳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하층에서 충분한 양의 스탯과 스킬을 모으셔야 합니다.

클레버의 조언.

틀린 말이 아니었다.

종말에게 마력이 통하지 않았듯,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만 했다.

‘스탯과 스킬, 그게 이곳의 전부라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식스랜드의 평화?

잘못된 위계질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헨리의 목적은 오직 가우스의 구원.

그리고 자신의 세상을 그렇게 만든 어비스 저 위에 있을 놈들에 대한 복수뿐.

얼마간의 침묵 끝에 데폴랑이 물었다.

“혹시 얼마나 필요하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나 가지고 있지?”

“얼마나라면?”

“하급 스탯 말이야.”

헨리는 총 다섯 종류의 스탯을 가지고 있다.

등급은 모두 하급.

이것들을 중급 스탯으로 만들기 위해선 하층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두 한계치인 99까지 올린 후 업그레이드를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지금 헨리에게 필요한 하급 스탯은 총……

“나는 394개의 하급 스탯이 필요한데.”

무려 394개.

그리고 헨리의 요구량을 들은 데폴랑은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며, 몇 개요?”

“394개.”

“그, 그렇게나 많이요?”

“없나?”

“당연히 그 정도 양은…….”

없었다.

데폴랑이 아무리 뛰어난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그 정도 되는 양을 개인이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군다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노동자 계급에게는 더더욱이 말이다.

그때였다.

“있습니다!!”

제3자의 목소리.

그것은 밖에서 난 것이었다.

“있습니다! 드릴 수 있어요!”

연이어 난 낯선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카엘이었다.

“카, 카엘 님?”

생각지도 못 한 카엘의 등장에 깜짝 놀란 데폴랑이 두 눈을 키워 보인다.

그때였다.

“데폴랑 님!”

또 다른 목소리.

“도와드릴게요!”

“저희 모두 힘을 합치면 모을 수 있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십수 명……

아니, 이어지는 목소리들은 최소 수십이었다.

놀란 데폴랑이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세상에…….”

데폴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집 바깥.

그곳에는 자신과 함께 전선을 누볐던 수백, 수천에 이르는 동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가만히 있지 않으면?”

“두 눈 뜨고 코 베이게 생겼다고! 헤타르카일 때는 우릴 존중이라도 해 줬지! 근데 그놈은!”

쾅!

흥분한 네프가 책상을 내리쳤다.

그럴 만도 했다.

무려 다섯이다.

자신을 새로운 왕이라 칭한 놈은 현장에서 자신의 동료였던 신하 다섯과 수십 년을 군림해온 폭군을 죽여 없앴다.

심지어 그들의 시체 또한 자신들이 수습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모두 그 벌레 같은 놈들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된다.”

벌레 같은 놈들.

노동자와 기술자들로 구성된 하급 군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 이 삶,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아니 못 해, 절대로……!”

“그럼 어쩌자고?”

“몰라서 물어? 우리 권리는 우리가 스스로 쟁취하는 거야.”

네프의 눈에 복수와 투쟁심이 불타올랐다.

“애들 다 소집해. 잊었어? 헤타르카일이 왜 우리를 존중해 줬는지를?”

“하지만 그놈은 우리는 물론 헤타르카일까지 단번에 죽여 버렸잖아?”

“머릿수 앞에 장사 없어. 그래 봤자 똑같은 엘리트야. 놈이 설령 이레귤러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나서면 어떻게 못 해.”

네프는 확신이 있었다.

그 헤타르카일도 홀로 모든 엘리트 계급원들을 상대할 수가 없어 신하를 두고 같은 계급원들을 존중해 준 것이었으니까.

“당장 애들 모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건.

그때였다.

쾅!!

“크, 큰일 났습니다!”

본청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자.

다름 아닌 본청을 지키는 엘리트 근위병이었다.

“뭐야?”

놀란 네프가 묻자 숨이 턱 끝까지 찬 근위병이 다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바, 바, 바, 반란입니다!”

“뭐?”

“아랫놈들이 모두 쳐들어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소리일까?

근위병의 급보에 놀란 네프와 갈렌, 코르샤가 황급히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바깥에는 정말로 그들이 아랫것, 벌레라 부르던 계급원들이 벌떼처럼 본청 앞으로 몰려 와 있었다.

놀란 네프가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당장 가서 죽여! 어차피 저놈들은 우리 못 건드리잖아!”

“그, 그게…….”

그 순간.

슈우우우──

거대한 파공음.

이윽고.

콰아앙!!

그들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던져졌다. 다름 아닌 안면 있는 같은 엘리트 계급원…… 버디언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 버디언이 맞았다.

심지어 군데군데 자상이 새겨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직 숨이 붙은 버디언이 맞았다.

“버, 버디언?”

“네, 네프 님…….”

숨을 헐떡이는 버디언.

그러나 버디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콰직!

버디언의 모가지 위로 정확히 떨어지는 창.

그러고 잠시 뒤, 하늘에서 창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폴랑이었다.

“너, 넌!”

데폴랑을 본 세 신하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당연했다.

응당 시스템의 보호를 받아야 할 자신들이, 거짓말처럼 식스랜드 최하위 계급 소속인 데폴랑에게 죽임을 당했으니까.

데폴랑은 깃털이 내려앉듯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버디언의 목에 박힌 자신의 창을 회수해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기회를 주러 왔습니다.”

“기회? 무슨 기회? 네깟 놈이 대체 무슨 기회?”

“미친놈 아냐 저거? 야, 너 시스템 룰 잊었어?”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 모르겠…….”

콰직!

마지막 코르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입에 박힌 데폴랑의 창 때문이었다.

크적!

데폴랑이 창을 거두어 다시 어깨에 걸쳤다. 그런 다음 오른손아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기회를 주겠습니다. 살고 싶다면 앞으로 모두에게 협조하세요. 그게 아니면 식스랜드를 떠나던가.”

펼쳐진 손아귀.

그 위에 떠오른 것은 푸르고 투명한…… 그 무엇보다도 성스럽고 찬란한 왕의 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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