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3화
여덟 신하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갑자기 나타난 그놈은 지난 수십 년간 식스랜드의 폭군으로 군림해 온 헤타르카일을 단 일격에 제압해 버렸기 때문이다.
서로 눈치만 보는 신하들을 보며 헨리는 클레버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하층 대부분의 구역에는 오랜 세월 엘리트들이 쌓아 온 카르텔이 있어 혼자서 뚫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 들어온 엘리트 계급원을 회유하거나 굴복시키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 모쪼록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주의를 기울이긴 퍽이나.’
클레버가 이곳에 먼저 온 건 알겠지만 지옥문 때도 그렇고 갈수록 한심함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자신의 오른팔이자 권속인데 녀석은 여태 납작 엎드려 안전함만을 추구하며 올라갔던 건가?
클레버가 처한 상황이나 짊어진 책임의 무게를 감안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일들을 몇 번 겪을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여덟 신하들 중 몇몇이 서로 시선 교환을 했다.
네 사람.
그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서로의 뜻이 통했음을 깨닫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헨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야아앗!”
“죽어라!!”
오크처럼 생긴 놈이 하나, 수인 하나, 그리고 인간처럼 보이는 놈 두 사람.
그들은 순식간에 냉병기를 꺼내 들고 헨리를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스킬이 헨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무기와 스킬이 헨리에게 채 닿기도 전에 지옥의 업화가 그들을 껴안았으니까.
“끄아아아!!”
“살려줘!!”
화마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넷을 뒤로 한 채 헨리가 시선을 옮겨 움직이지 않은 네 신하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떡할 참이냐?”
“덤비지 않겠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저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왕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남은 넷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식스랜드의 오랜 기득권으로서 실력도 실력이지만 폭군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꽤나 명민한 처세술을 갖출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증명해라.”
“예?”
“저놈들을 죽여라, 너희가 모시던 왕도.”
“그, 그건…….”
“아니면 전부 죽이겠다.”
“……!”
헨리의 겁박에 네 신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중 금테 안경을 쓴 부엉이 수인 하나가 용기를 내 의견을 말했다.
“감히 의견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용기가 가상하다.
그래서 허락했다.
“말해라.”
“하층에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이대로 저흴 다 죽이시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
그게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헨리는 이놈은 또 어떤 식으로 미쳤을까 궁금하여 한 번 더 자비를 베풀었다.
“왜지?”
“이곳은 비정기적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쏟아지는 곳으로 오늘이야 일반 웨이브라 어찌저찌 넘어갔다손 치지만 이따금씩 휘몰아치는 특수 웨이브들은 저희들 없이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렇군. 특수 웨이브가 있을 때마다 너희들이 나섰나?”
“예, 그런 웨이브를 막기 위해 있는 것이 저희 엘리트 계급이니까요.”
“하지만 아까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는 안 보이던데?”
“그건 저희가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간당간당해 보이던데?”
“아닙니다.”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모든 걸 안다는 것처럼 구는군. 건방지기 짝이 없어.”
아뿔싸.
부엉이 수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그, 그게 아니오라…….”
“습관은 무서운 법이지. 그따위 행동이 몸에 배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건방을 떠는 거야.”
문답무용.
헨리가 한 번 더 검을 휘두르자 부엉이 수인의 몸에도 업화가 치솟았다.
“끄아아아아아!!”
깃털에 불이 붙은 부엉이 수인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자 헨리가 다른 신하를 보며 물었다.
“좀 전의 웨이브에는 왜 나서지 않았지? 너희가 나섰다면 쓸데없는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헨리의 물음에 신하 셋이 거의 동시에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 모습에 헨리가 신음을 우물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희는 봐주지. 대신 책임지고 나머지 놈들을 죽여라. 좀 전의 부엉이 대가리도.”
“예!”
헨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신하는 각자 무기를 빼들고 타다 만 신하와 왕을 베기 시작했다.
그 덕에 숨만 붙어 있던 놈들이 차례대로 주검이 되었다.
특히 헤타르카일은 세 신하에게 난자당하다시피 찔려 죽었다.
헨리가 물었다.
“이름.”
“네프입니다.”
“갈렌입니다.”
“코르샤입니다.”
각기 소개가 이어지자 헨리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이제부턴 내가 이곳의 지도자고 왕이다. 불만 있으면 죽은 저놈이 그랬듯 내게 덤벼라. 도전은 언제든 받아줄 테니.”
“예, 왕이시여.”
“그리고 현 시간부로 몬스터 웨이브가 발동되면 모든 엘리트 계급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선에 투입된다. 늦장 부리거나 칭얼대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아래 계급원들한테 거들먹거려도 죽는다. 내가 식스랜드의 왕으로 있는 동안 나를 제외한 모두가 노동자다.”
“예, 예?”
“불만 있나?”
헨리의 가라앉은 눈빛.
그 눈빛에 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아닙니다…….”
“피곤하군. 다 꺼져. 시체는 태우고.”
“예……!”
명령을 받은 남은 신하들이 황급히 왕이었던 자와 동료였던 자들의 시체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성벽 보수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차였다.
“말 좀 묻겠다.”
한창 벽돌을 쌓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 물음에 뒤돌아본 병사가 깜짝 놀랐다.
“어, 어! 다, 당신은!”
손가락질 하며 가리킨 이.
헨리였다.
헨리가 말없이 병사의 손가락을 쳐다보자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병사가 손가락을 접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래 계급 사이에 헨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당연했다.
그 상대하기 까다로운 블랙 오우거를 단 일격에 해치우고 영웅 데폴랑을 구해 왔으니까. 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버디언이 어깨동무까지 했다.
허나 헨리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재차 질문했다.
“관심 없고, 데폴랑은 어디 있지?”
“예? 데폴랑 님이시라면…….”
“저는 여기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데폴랑이 있었다.
데폴랑은 갑옷을 벗고 어깨와 가슴께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헨리가 데폴랑과 시선을 맞추자 데폴랑이 즉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데폴랑 마시우스입니다.”
그 모습에 헨리가 악수를 청했다.
“헨리 모리스다.”
헨리의 악수 요청에 고개 숙였던 데폴랑은 물론, 주변 병사들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였다.
이곳의 엘리트 놈들이 얼마나 권위주의에 찌든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데폴랑이 두 손으로 헨리의 손을 잡자 헨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한손으로.”
“아…… 감사합니다.”
그제야 제대로 악수하는 데폴랑.
데폴랑이 뒤늦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경황이 없어 이제야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절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다.”
“왕……이요?”
“그래.”
“그게 무슨……?”
헨리의 말에 데폴랑이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헨리가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좀 전에 왕 하나와 놈의 측근 다섯을 죽이고 오는 길이다. 그러니 이제 식스랜드의 왕은 나라는 말이지.”
“예……?”
“놀랄 것 없다. 네가 들은 게 맞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 식스랜드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다 같은 노동자다. 당연히 엘리트 계급원들도 포함해서.”
“자, 자, 잠시만요!”
쏟아지는 말들에 데폴랑은 손을 휘저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람?
자신이 들은 게 맞나?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그러나 놀랍게도 헨리가 언급한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사실이었다.
그러던 차 데폴랑은 이상한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저…… 근데 그걸 왜 제게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이상하긴 했다.
좀 전에 헨리가 말한 것들은 분명 충격 그 자체였으나 근데 그걸 왜 자신에게 말해 주는 걸까?
그 물음에 헨리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웨이브 속에 홀로 몸을 던진 병사는 너 하나뿐이었으니까.”
이곳의 사정에 대해 깊게 알아볼 것도 없다.
어느 무리든 간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우두머리는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데.
헤타르카일이 무력으로써 권력을 쟁취해 낸 폭군이라면 데폴랑은 누가 봐도 자기희생적인 영웅이었으니까.
그리고 헨리는 이번 하층 플레이에서 데폴랑 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잠시 얘기 좀 하지.”
헨리의 눈빛에 데폴랑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헨리는 데폴랑의 안내를 받아 그가 지내는 거처로 이동했다.
데폴랑이 지내는 거처는 헤타르카일이 지내는 본청과 비교하면 수수하다 못 해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데폴랑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제법 아끼는 차를 내어 왔다.
“대접할 게 이런 것뿐이라,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난 이야기를 하러 온 거지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니까.”
“그렇군요. 그럼 저랑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거래를 하고 싶다.”
“거래요?”
“그래.”
“어떤 거래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얼마 뒤 중층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 되면 이곳에 남아 있는 엘리트들 중 새로운 왕이 선출되겠지.”
“그건…….”
새로운 왕의 등장.
허나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일 테니.
그렇기에 궁금했다.
눈앞의 왕이 제안하는 거래가 무엇인지.
“그래서요?”
“너희에게 자유를 주지. 식스랜드에 남아 있는 한 그 누구도 너희를 억압하지 못할 해방이 약속된 그런 자유.”
“그게…… 가능하다고요?”
“가능하다.”
“어떻게요?”
“방법이야 많지. 내가 떠나기 전에 이곳에 있는 모든 엘리트 계급원들을 죽이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지.”
“예? 그건 무리입니다.”
“왜 무리라고 생각하지?”
“왕과 신하들을 어떻게 죽이신 건진 모르겠지만 그들 외에도 이곳의 엘리트들은 최소가 수백 명입니다. 설마 혼자서 그자들을 모두 상대하시게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좀 전에 왕을 죽이고 온 내가?”
“그건…….”
데폴랑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알기로 헤타르카일 또한 그 많은 엘리트 계급원들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추었다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건 별로 좋지 못한 방법이었다. 데폴랑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설령…… 헨리 님이 그들 모두를 죽이실 수 있다고 해도 평화가 지속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유는?”
“새로운 엘리트 계급원이 오면 우린 모두 그에게 복종해야 될 테니까요. 아시잖아요? 이곳은 철저히 계급제로 운영되는 세상이란 걸.”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 새로 들어올 엘리트 계급원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건가?”
“그……렇죠?”
“그럼 이걸 네가 산다면 그땐 어떻게 되지?”
헨리는 말과 함께 데폴랑 앞에 무언가를 띄워 냈다.
헨리가 띄워 낸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식스랜드 역사상 단 한 번도 보유한 자가 없다던 왕의 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