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2화
“사람?”
데폴랑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헨리를 보았다.
헨리도 데폴랑을 보았다.
그러나 데폴랑에게 오래 시선을 두지 않고 허멀트에게서 받은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촤좌좌좌좌좍!!
헨리가 검을 휘두르자 사방으로 새하얗고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졌다.
참격?
검격?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힘이었고 무엇보다도 저것들은 자신이 보아 온 그 어떤 힘보다도 강했다.
헨리가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 이백 마리쯤은 우습게 죽어 나갔다.
데폴랑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 몬스터가 모두 사망했습니다. ]
[ 몬스터 웨이브가 종료됩니다. ]
[ 보상이 지급됩니다. ]
“……!”
아카이브의 알림에 데폴랑은 깜짝 놀랐다.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다니?
웨이브가 시작된 건 아직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설마 저 남자가 모두 해치운 건가?
궁금한 게 많다.
하지만 그것들을 물어보기에 데폴랑의 체력은 이미 한계점을 넘어 버렸다.
털썩!
쓰러지는 데폴랑.
그것을 본 헨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를 어깨에 들쳐 멨다.
*“무, 뭐지?”
“저건 또 뭐야?”
“저놈이 어깨에 이고 있는 거…… 어? 데폴랑 님 아냐?”
“어, 진짜네?”
그 시각, 성벽 위는 난리가 났다.
갑자기 몬스터 웨이브가 종결된 것도 모자라 웬 신원 미상의 남자가 데폴랑을 어깨에 이고 나타났으니까.
남자는 신선처럼 날아 새처럼 착지했다.
이름 모를 낯선 이의 등장에 병사들이 몰렸지만 남자의 힘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터라 그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러기를 얼마간, 마침내 얼굴을 들이민 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카엘이었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카엘이 고개 숙이며 예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이곳의 지휘관들 중 하나인 카엘이라고 합니다.”
카엘의 소개에 헨리도 그제서야 데폴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허멀트에게서 받은 회복 포션을 꺼내 데폴랑의 어깨 부근에 부어 준 후 그제야 대답했다.
“헨리라고 한다. 좀 전에 하층에 들어오게 되었지.”
“아!”
헨리의 소개에 카엘을 비롯한 주변 병사들 또한 그제서야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 파악을 마친 카엘이 얼른 뒷설명을 붙였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카엘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데폴랑 님과 저희를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카엘이 허리를 숙이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헨리에게 허리를 숙인 것이다.
그에 헨리가 고개를 주억였다.
“안으로 가지.”
“예, 바로 모시겠습니다.”
그때였다.
“오, 잠깐잠깐.”
낯선 목소리.
소리가 들린 건 하늘에서였다.
하늘에는 새들을 말처럼 타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곧 새를 차 아래로 하강하더니, 같이 온 자들과 함께 부드럽게 착지했다.
남자의 등장에 카엘과 병사들 또한 급히 고개를 숙였다.
“버디언 님을 뵙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버디언.
그는 수인이었다.
표범 얼굴은 물론 전신에 털이 북실북실한 전형적인 표범이었지만 사람처럼 이족보행도 하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다.
그때였다.
뻐억!
버디언이 돌연 카엘의 가슴을 걷어 차 넘어뜨린 건.
카엘을 차 넘어뜨린 버디언이 성큼성큼 다가와 카엘의 가슴을 발로 짓누르며 말했다.
“야, 장난해? 지원 요청해서 왔는데 지금 이게 뭐야? 이렇게 쉽게 막아 낼 수 있었는데 엄살 부린 거였어?”
“그, 그게……!”
“죽는 소리 해서 어렵게 어렵게 지원 나왔더니 감히 우리를 놀려? 똥개 훈련시키는 거야 뭐야?”
버디언은 진심으로 화가 나 보였다.
그에 카엘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계속 빌기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버디언의 계급이 엘리트였으니까.
그리고 하층에선 절대로 하극상을 일으키지 못하게끔 시스템으로 제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버디언은 카엘의 말을 절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카엘도 이런 경우를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닌 듯 어느 순간부턴 변명도 하지 않고 그저 맞고만 있었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쥐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버디언과 함께 온 다른 놈들 또한 킬킬 거리며 버디언의 패악질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그 상황을 지켜보던 헨리가 조용히 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지?”
그 말에 버디언이 고개를 홱 돌려 헨리를 보았다.
“뭐야? 못 보던 얼굴인데? 넌 뭐야?”
“난 헨리다. 그리고 좀 전에 하층에 들어왔지.”
“좀 전? 아아, 난 또 뭐라고. 그러니 이렇게 행동하는 거였군. 근데 혹시 계급이?”
그 물음에 헨리가 거짓 인장을 사용해 ‘엘리트’ 인장을 띄워 보였다.
“오! 동지였군! 내가 친구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헨리의 엘리트 인장을 보자마자 버디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러더니 어깨동무를 하고 친한 척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초면에 너무 격한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 실례를 저지른 것 같네. 근데 너도 곧 적응하게 될 거야. 너도 알겠지만 여기선 계급이 전부거든. 근데 좀 전의 웨이브를 종결한 게 혹시 너야?”
“그렇다.”
“역시.”
헨리의 대답에 버디언의 표정이 더더욱 밝아졌다. 버디언이 여전히 헨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카엘에게 말했다.
“야, 이분은 우리가 데려갈 테니 알아서 뒷수습해라. 못난 놈들, 이분 덕에 일찍 끝냈다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
“쯧쯧, 못난 것들. 자, 갑시다. 근데 헨리라고 했나? 난 버디언이라고 해.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모든 게 낯설 텐데 우선 장소부터 옮기자고. 소개해 줄 사람들도 있고 말이야.”
“그러지.”
버디언은 존댓말인지 반말인지 모를 것들을 섞어 가며 말했으나 헨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버디언 뒤에 탑승한 헨리는 병사들을 두고 버디언과 함께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표정이 허망하기만 하다.
*식스랜드 안쪽.
그곳에는 본청이라 불리는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
그것은 지구에서 본 건물들처럼 거대한 사각형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헨리는 버디언 무리와 함께 본청 중심에 안착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지. 당신이 온다는 말에 급히 간부회를 소집했거든.”
버디언의 말대로였다.
버디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척 봐도 심상찮아 보이는 이들이 몰려 있었다.
수는 총 아홉.
한 사람을 중심으로 각각 네 사람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는데 헨리의 등장에 중심에 앉아 있던 이가 몸을 일으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간만에 온 새로운 손님이로군. 버디언에게 듣자 하니 우리와 같은 엘리트 친구라지?”
붉은 빛이 도는 몸,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한 빨강 머리와 수염.
덩달아 붉은 눈동자와 우락부락한 근육, 그와 대비되는 툭 튀어나온 배는 마치 지옥 도깨비를 연상케 하는 외모였다.
그의 이름은 헤타르카일.
이곳 식스랜드를 지배하는 지도자이자 왕이었다.
헨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좋아. 간만에 들어온 엘리트로군. 난 헤타르카일이다. 이곳 식스랜드를 다스리는 왕이지.”
“왕?”
그 말에 헨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관리자가 말하길, 여기엔 왕 계급이 한 명도 없다고 했는데?”
“크크큭, 그래 맞다. 난 왕이 아니야. 너와 같은 엘리트 계급이지. 하지만 단순히 엘리트라고 다 같은 엘리트일까.”
그 말과 함께 헤타르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봐도 거대해 보였던 덩치였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니 누워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컸다.
그가 육중한 발걸음을 옮겨 쿵쿵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헤타르카일이 헨리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어느 세상이나 지도자는 필요한 법이지. 그리고 식스랜드에선 오직 강한 자만이 그 자리를 쟁취할 수 있는 법. 그래서 내가 이곳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랑스레 자신의 서사에 대해 말했다. 그에 헨리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렇군. 강하기만 하면 왕이 될 수 있는 거였어.”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난 항상 열려 있다. 내 신하들에게도 항상 말하지. 왕이 되고 싶다면 언제든지 내게 도전하라고 말이야.”
그 말에 헨리가 신하로 추측되는 양측으로 도열된 여덟 명의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이들이 네 신하들인가?”
“그래. 나와 함께 식스랜드를 이끌어 가는 수뇌부라고 할 수 있지.”
“신하도 같은 방식으로 뽑은 건가?”
“비슷하지만 달라, 신하들은 능력을 보고 우선 채용한다. 그리고 항상 여덟 명을 준수하고 있지.”
“그렇군.”
“크큭, 왜? 저 자리가 탐나는가?”
“아니.”
“뭐?”
헨리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탐을 낸다면 네 자리가 더 탐이 나겠지.”
“뭐? 크하핫! 그래, 신입이라면 이정도 패기는 있어야겠지! 간만에 아주 싹수 좋은 놈이 들어왔어.”
그 말과 함께 헤타르카일이 합장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꾸드드드득……
별안간 헤타르카일의 등 뒤로 두 개의 팔이 더 돋아난 것.
헤타르카일이 팔을 두 개 더 꺼내 들자 양측으로 도열해 있던 신하들이 저 멀리 물러났다. 헤타르카일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윽고 헤타르카일의 손에 거대한 도검 네 자루가 쥐여졌다. 그가 말했다.
“내가 이곳의 왕으로 군림한 지 어언 수십 년째다. 뭘 모르고 뱉은 것 같아 기회를 한번 주마. 지금이라도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싹싹 빌면 아까 전의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주마.”
바닥에 이마를 붙인다라……
헨리는 그 말을 조용히 곱씹더니 털어내듯 검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화륵!
[ <업화>가 발동됩니다. ]
헨리의 칼날에 지옥불 업화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본 헤타르카일의 눈살이 좁아진다.
“그래. 너 같은 놈들도 이따금씩 나타나 줘야 재밌지. 하지만 말이야. 모두들 착각하는 게 있어. 다들 늘 그렇듯 그럴듯한 계획은 세우지만…….”
그때였다.
화과과과과곽!!
헨리의 검에서 업화가 뿜어진 건.
그것은 마치 화염방사기의 그것처럼 화염을 뿜어냈다.
헤타르카일은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가소롭다는 듯이 헨리의 업화를 정면으로 받아 냈다. 그러자.
“어, 어! 어어어! 끄아아아아!!”
별안간 헤타르카일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물!! 물!!”
“어, 어?”
“예?”
심히 방정맞기 그지없는 왕의 행동에 신하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입구에 서서 킬킬대던 버디언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불길이 전신으로 퍼진 헤타르카일이 업화의 미칠 듯한 작열통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그 탓에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불 꺼!! 불 끄라고 이 새끼들아!!”
그 호령에 신하들 모두 달라붙어 불을 끄기 시작했다.
허나 업화의 불길은 주인의 의지, 혹은 더 강한 힘이 아니라면 절대로 끌 수 없는 것.
헨리는 아수라장이 된 그들을 보며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주억였다.
‘지옥불이라더니 나쁘지 않군.’
그런 다음 천천히 걸음을 옮겨 헤타르카일이 앉아 있던 왕좌로 가 몸을 기댄 후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헤타르카일에 붙은 불꽃이 전소되며 잿빛 연기를 피어 올렸다.
그 믿지 못할 광경에 장내의 신하들이 떨리는 눈동자로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헨리가 되물었다.
“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