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9화
[ <생령환>을 섭취하셨습니다. ]
[ 플레이어의 육체가 환경에 적응을 시작합니다. ]
아카이브 알림이 떠오른 직후, 헨리는 그제서야 호흡이 편안해졌다.
“후.”
독도 아닌데 사람을 힘들게 만들다니. 마치 그 옛날, 마물의 숲에 처음 진입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마기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들었지.’
하지만 결국 적응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 큰 힘으로 마기를 몰아낸 거긴 하지만.
허나 에테르의 경우엔 절대로 적응도, 더 큰 힘으로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에테르란 에너지 자체가 상위 차원에서 존재하는 힘이었으니까.
헨리는 클레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층계가 높아질수록 에테르 농도는 더더욱 짙어질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귀찮으셔도 스탯을 꾸준히 올려서 육체를 강화시키셔야 합니다. 물론 최하층 플레이어의 경우엔 아무리 9존을 통과해도 효과가 없으니……
그래서 추천해 준 것이 바로 생령환.
헨리는 생령환의 정보에 대해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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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령환 ]
- 등급 : 영약, 신비, 장인
- 설명 : 생령으로 만든 환. 유명한 약제사가 만든 것이지만 독자적이지는 않다. 생령환의 제조법은 꽤나 유명하니까.
섭취 시, 변화된 환경에 육체가 적응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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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버가 말하길, 아무리 스탯을 많이 올려도 충분한 적응 기간을 거치지 않는 한 최하층 플레이어가 바로 하층에 적응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이 8존 이하의 루트를 이용해 천천히 상위 에테르에 육체를 노출시켜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헨리는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닌 이레귤러였으며 클레버라는 스폰서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 같은 방법을 택할 수 있었던 것.
효과는 좋았다.
그도 그럴 게 헨리의 육체는 벌써 이곳의 환경에 자유로워진 듯했으니까.
그때였다.
“흐음?”
낯선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파란 빵모자에 파란 정장, 그리고 나비넥타이를 한 웬 꼬마가 팔짱을 낀 채 헨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왜 멀쩡하지?”
심지어 몹시 의아하다는 표정.
관리자였다.
허나 모른 척 물었다.
“관리자인가?”
“맞아. 근데 너 최하층민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멀쩡해?”
“중요한가?”
“신기해서 그렇지. 설마 벌써 적응을 끝낸 거야?”
“그래.”
“와.”
층계마다 나뉘어져 있는 관리자들은 기본적으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구로 따지자면 공무원 같은 존재로 각자가 맡은 구역만 잘 관리하면 됐으니까.
물론 기본적으로 공유하지 않을뿐 친한 관리자, 혹은 파벌이나 단체끼리는 정보를 공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4층의 관리자와 2층의 관리자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
성향부터가 극과 극이었다.
놀라기도 잠시, 4층 관리자가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흠, 뭐 이렇게 되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일단 이렇게 된 거 내 소개부터 하지. 난 블루 체리야. 9존 4층을 맡아 관리하는 통합 관리자지.”
블루 체리.
광묘, 녹와, 백견……
여태 본 관리자들과는 다른 유형의 이름이었다.
‘소속에 따라 코드네임도 다르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헨리가 모르는 척 물었다.
“그래서, 이곳에선 내가 무얼 해야 되지?”
헨리의 물음에 눈을 가늘게 뜨는 블루 체리. 그러더니 노인네 같은 말투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놈 이거 뭔가 수상한데…… 3층을 뚫고 온 놈치곤 지나치게 차분해. 심지어 에테르 적응력도 말도 안 되고 말이야…….”
헨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차피 관리자들의 역할은 스테이지의 안내와 밸런스 수호 정도로 절대 플레이어들의 정보는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에게 정보는 제한시킬수록 좋다.’
재물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가장 효과적인 대화 수단은 정보의 노출이다. 헨리가 침묵을 고수하자 블루 체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냄새가 난단 말이야, 냄새가. 그것도 아주 수상한 냄새가. 하지만 저리 뻣뻣하게 구는데 모르는 척 해 주는 것도 관리자의 미덕이겠지.”
이번에도 노인네 같은 말투.
애 같은 외모는 위장인 걸까?
블루 체리의 말이 이어졌다.
“너는 이곳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없다.”
“그렇군. 그럼 축하해, 이곳은 9존의 최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이곳만 통과하면 넌 당당한 하층민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역시.
클레버의 말 대로였다.
이곳은 하층로 9존의 최종장.
그렇다면 이어서 관리자가 제시할 것은……
“넌 이제 선택을 할 수가 있어. 9존 4층에는 4개의 선택지가 있지. 난이도는 다 달라. 하지만 네가 어떤 곳을 선택하냐에 따라 앞으로 하층에서의 삶이 좌지우지될 거야.”
4개의 선택지.
그것은 하층에서 살아갈 플레이어들의 신분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선택지였다.
그도 그럴 게 하층에 입장하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진짜 어비스인’이 되기에.
블루 체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헨리 앞에 네 개의 문이 생겨났다. 생겨난 문들은 순서대로 동색, 은색, 금색, 마지막으로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난이도는 동색이 가장 낮고 은금흑 순으로 어려워져. 하지만 검은색 문을 통과했을 때 넌 분명 하층에서 멋진 삶을 살 수 있게 될 거야. 여지껏 살아온 삶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실패한다면?”
“오, 내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해 줬네. 미션에서 실패해도 상관없어. 실패했다고 해서 탑은 널 죽이지 않을 거고 하층민으로 신분 상승도 시켜 줄 거야. 이것들은 단지 너에게 주어지는 기회 같은 거거든. 왜냐고? 넌 여기까지 왔고 그 말인즉 충분히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니까.”
블루 체리의 설명은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헨리는 안다.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허나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을 필요는 없다.
헨리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럼 검은색 문으로 하지.”
“탁월한 선택이야.”
헨리의 선택에 블루 체리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러고는 어깨는 닿지 못해 등어리를 토닥여 주며 헨리의 선택을 존중, 또 응원해 주었다.
“난 너희 같은 플레이어들을 보면 가슴이 뛰어. 여기에 오는 플레이어들은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니까. 이래서 내가 관리자를 못 그만두는 거야.”
저리 뻔뻔할 수가.
블루 체리의 실체를 아는 헨리는 그 말이 참 가증스레 느껴졌다. 그래서 참지 못했다.
“나중에…….”
“응?”
“나중이 되면 정말 가슴이 뛴다는 게 뭔지 알게 해 주마.”
“그으래?”
헨리의 말에 블루 체리의 입꼬리는 더더욱 올라갔다. 그리고 헨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검은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 지옥문에 입장합니다. ]
문의 이름은 지옥문.
블루 체리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이윽고 헨리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지고 블루 체리만 남게 되자 블루 체리가 한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킬킬 웃었다.
“아, 내가 이 맛에 관리자 못 끊어. 저 의기양양한 모습 좀 보라지? 크크큭.”
이윽고 블루 체리가 손을 비빈 후 양손으로 손가락을 튕기자 곧 안기 좋은 적당한 의자와 헨리의 모습을 중계 해주는 중계 스크린이 떠올랐다.
“멍청한 놈. 네가 무슨 수로 이곳의 에테르에 적응한 건진 몰라도 이후의 삶은 끔찍하기 그지없을 거다. 애초에 지옥문은 통과하라고 만든 곳이 아니니까.”
지옥문.
블루 체리가 손수 이름 지은 그곳은 놀랍게도 내부의 구성조차 블루 체리가 직접 만들었다.
그렇기에 지옥문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허나 확실한 건 절대로 장난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것.
그도 그럴 게 이번 층계 9존 4층은 앞으로의 하층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하층에서의 ‘신분’을 결정하는 곳으로.
지옥문이라 불리는 검은색 문을 통과하게 되면 하층 최고의 계급인 지도자 계급, 즉 ‘왕’ 등급이 부여되기 때문.
그리고 그가 관리하는 수많은 구역들의 역사 중 지옥문을 통과한 자는 여지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왜냐하면 블루 체리는 그 어떤 플레이어도 지옥문을 통과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블루 체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재능 넘치는 플레이어들이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뿐.
“자, 지옥에 떨어져라. 하층에 보내는 드릴 게. 근데 거기서의 삶은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괴롭고 비참하게 될 거다.”
블루 체리의 눈에 광기 어린 이채가 번뜩였다.
그때였다.
[ <9존 4층 : 지옥문>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
“……뭐?”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알림이 그의 눈앞에 떠오른 건.
“이, 이게 무슨!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허나 확실했다.
블루 체리가 사용하는 관리자 전용 아카이브가 확실하게 사실을 입증해 주었으니까.
블루 체리는 서둘러 중계 스크린을 보았다. 그리고 블루 체리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놀랍게도 중계 스크린을 통해 헨리가 자신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
“어, 어떻게?”
그가 어떻게 중계 스크린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확실한 건 헨리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건 결코 우연 따위가 아니라는 것.
이윽고 헨리 앞에 ‘하층’으로 향하는 문이 생겨났고 헨리는 그곳으로 가감 없이 발걸음을 들였다.
*[ 지옥문에 입장하셨습니다. ]
[ 현재 위치는 <하층로 9존 4층 : 지옥문>입니다. ]
검은색 문.
일명, 지옥문이라 불리는 곳에 발걸음을 들였다.
‘여기가 지옥문.’
9존 4층은 2층과 마찬가지로 통합 관리자 운영한다.
통합 관리자는 구역 하나가 아닌 여러 개 구역을 함께 관리하는 자란 뜻으로.
9존 2층의 백견이 80번부터 89번까지의 구역을 관리했다면 4층의 블루 체리는 1번부터 100번까지 모든 구역을 관리했다.
그때였다.
이제 막 첫걸음을 들인 헨리에게 불꽃들이 떨어진 건.
불꽃이 떨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들자 헨리는 웬 산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산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두 눈과 아가리가 달려 있는 ‘개’였다.
지옥견 워로베로스.
머리가 하나인 대신 꼬리가 세 개 달린 지옥견 중 하나로 거대하기 그지없는 이 녀석은 이곳 9존 4층의 지옥문을 위해 블루 체리가 특별히 데려온 놈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헨리는 워로베로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왜냐하면 클레버는 지옥문으로 가는 것을 말렸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옥문은 가시면 안 됩니다. 거긴 눈치 좋은 관리자가 이레귤러 같은 강자들을 잡기 위해 일부러 만든 곳이에요.
2층과 4층의 관리자.
백견과 블루 체리의 성향은 극과 극이다.
착하고 나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관리자들은 기본적으로 다 믿어선 안 될 놈들로.
그런 의미에서 성향이 극과 극이란 건 음흉하냐, 노골적이냐의 차이 정도.
예컨대 노골적인 백견과는 달리 블루 체리는 달콤한 말로 함정을 포장해 플레이어들을 밑바닥으로 빠뜨리는 아주 악랄하고 음흉한 놈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곳을 택한 것이다.
워로베로스가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들이밀자 헨리는 조용히 한손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농도는 그 옛날, 종말들을 상대할 때만큼.
이윽고 녹색 광선이 거대한 워로베로스를 향해 내질러졌고 무수한 메시지들이 헨리 앞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클리어를 알리는 아카이브의 알림들이었다. 헨리가 클레버의 조언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잡을 수 있으면 잡으라지.’
헨리의 눈에 짙은 의지가 횃불처럼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