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6화
“……헨리 씨?”
당황스러웠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렌이 당황하자 성난 군장이 몽둥이를 집어넣고 자신도 칼을 뽑아 들며 말했다.
“네놈이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용병이 칼을 뽑았다는 건 목숨을 내놓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거겠지?”
“어? 그, 그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렌은 식은땀을 흘렸다.
물론 자신도 플레이어니 눈앞의 군장 한 명쯤은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군장이 데리고 있는 영주군의 수는 최소가 서른 명이 넘어 보였다.
“따끔하게 혼내 주지. 끌고 가!”
“옛!”
영주군이 일시에 달려들었고 렌은 저항했으나 금방 진압되었다.
딜러와 탱커조차도 다구리엔 장사가 없는데 렌의 포지션은 서포터였다.
“헨리 씨이이!!”
“닥쳐!”
한 번 더 울부짖는 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들어 가!”
마치 전쟁포로처럼 묶여 끌려 간 렌은 영주성 지하감옥에 처박히고 말았다.
만화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풍의 지하감옥.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차가운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쇠창살은 검고 녹이 슬었다.
지푸라기조차 깔려 있지 않은 지하감옥은 현대인 출신 렌에게는 그저 낯설고 두려움만 야기되는 곳이었다.
심지어 두 손에는 수갑의 역할을 하는 나무로 된 칼까지 채워졌다.
‘어쩌지? 이대로 정말 끝인 건가?’
대화로 풀고 싶었으나 영주는 만나 보지도 못했다. 심지어 바쁘다는 이유로 재판도 내일로 미뤄졌다.
‘진짜 죽는 건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스테이지가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보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은 건 헨리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헨리 씨는 대체 어딨는 거지? 설마 날 버린 건가?’
물론 최악의 사태로부터 목숨을 건질 방법이 있긴 했다.
그것은 바로 귀환.
여기는 9존 3층으로 아직까진 하층로이니 언제든 평화촌으로 귀환할 수 있긴 했다.
허나 그렇게 되면……
‘헨리 씨와는 끝이겠지.’
파티 정보에는 아직 헨리가 표기되어 있다. 심지어 체력도 가득 차 있는 것이 해를 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때였다.
“끄으으…… 누군가?”
안쪽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
그 목소리는 죽어 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렌이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어둠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웬 남자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날 좀 일으켜 주게…….”
남자의 죽어 가는 목소리에 렌은 황급히 달려가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남자는 중년이었는데 상태가 별로 좋지 못했다.
영주군에게 맞은 건지 온몸이 피멍울과 피딱지로 가득해 있었는데 호흡도 가파른 것이 얼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보였다.
렌은 남자를 일으켜 벽에 기대 세웠다.
“고맙네… 근데…… 자넨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외지인인가?”
남자의 물음에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주어진 복장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번 스테이지에선 방랑용병 컨셉을 유지해야 될 것 같아서였다.
“예, 저는 방랑용병으로 활동하고 있는 렌이라고 합니다.”
“용병이 왜 여기에……?”
“그게…….”
렌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진실에 거짓말을 약간 섞어 대답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마을에 쉬러 왔다가 영주군의 횡포를 못 참고 마을 사람들을 돕다 잡혀 왔다고.
그 말에 남자가 큭큭 웃었다.
“참 의협심이 넘치는 친구로구만.”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뿐인데요, 뭘. 근데 아저씨는 누구십니까?”
“난 토벤이라고 하네. 자네가 있던 벨타 마을의 하나뿐인 산지기지.”
“산지기요?”
“그래.”
“산지기분이 왜 여기에?”
“그건 영주 때문이야.”
자신을 산지기라고 소개한 토벤은 자기가 왜 이곳에 갇혀 있는지, 그리고 왜 이 꼴이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갑자기 날 잡아와선 흠씬 두들겨 패더군. 참 어이없는 일이었지. 억울해서 이유를 물어 보니 올해 일어난 홍수 때문이라고 했어. 이게 말이 돼? 홍수가 난 게 왜 내 탓이야? 난 그저 평범한 산지기일뿐인데 말이야.”
말을 잇던 토벤은 입 안이 아린지 피거품을 벽에 퉤 뱉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빌어먹을 영주 놈. 그놈은 머저리야. 잘나고 어질었던 선대 영주님과는 달리 화만 낼 줄 알고 변덕도 심하지.”
“음.”
이야기를 듣던 렌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강 감이 왔다.
어리고 난폭한 영주와 영지를 덮친 홍수, 그리고 억울하게 잡힌 산지기와 비교적 좋은 평판을 가졌던 선대 영주까지.
누가 봐도 무능한 탐관오리 때문에 고통받는 전형적인 불쌍한 민초의 삶들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어비스가 그랬다.
9존 3층의 클리어 미션은 ‘악을 찾아 섬멸하는 것’.
그리고 답은 나왔다.
‘이번 스테이지의 핵심 목표는 악덕영주가 분명하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 스테이지 또한 다른 스테이지들과 마찬가지로 강함을 증명해야 할 터.’
1층에선 대왕숭이를 잡아야 했고 2층에선 십수 명의 플레이어들과 웜즈들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하층로가 만들어진 목적은 최하층 플레이어가 하층에 갈 수 있는지 자격을 테스트 받는 곳.
그렇다면 이번 층계의 목적도 뻔했다.
강함.
강자존과 약육강식.
그것이 어비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전부였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헨리 씨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데…….’
렌은 얼마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 이건 날 테스트 해 보려는 게 틀림없어.’
헨리.
그는 자신이 이세계에서 온 존재라고 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비스가 나타나 세계의 질서를 바꾼 이 와중에 이계인이 대수랴.
게다가 그 압도적인 강함과 더불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구해 주는 상냥함까지.
심지어 마을에 영주군이 나타났을 때 헨리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자신을 챙겨 지붕 위로 은신하였다.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내가 비록 생활지원형 서포터에 스카우터로 일하고 있지만 그런 건 다 핑계일 뿐이잖아?’
스펙은 그랬지만 자신도 지구에선 엄연한 헌터였다.
그것도 모든 자격을 갖추고 어비스에 입탑한 평균 이상의 헌터.
‘어쩌면 난 여지껏 내가 서포터와 스카우터라는 이유만으로 내 한계를 선 그어 버린 머저리였던 걸지도 몰라.’
그러니 이번 기회에 각성키로 했다.
단순한 서포터와 스카우터…… 하물며 몸종이나 도시락, 변기 따위는 더더욱 아닌 이계인 헨리가 뒤를 맡길 수 있는 든든한 그런 파트너로 말이다.
렌은 열의를 불태웠다.
즐겨 보던 청춘 만화, 혹은 소년 성장 만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가슴도 뜨거워졌다.
렌이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토벤 씨.”
“으응?”
“토벤 씨가 이 꼴이 된 것도 마을사람들이 고통받는 것도 모두 다 그 영주 때문이라는 거죠?”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놈은 처음부터 무리한 걸 시켰어. 그러고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을 쥐어짜는 거야. 선대 영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는데…….”
결국 토벤은 눈물까지 보이며 흐느꼈다. 그 눈물에 렌의 결심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들을 돕겠습니다.”
“돕는…다니?”
렌은 우선 토벤의 상처 난 부위에 두 손을 모아 가져다댔다.
“회복.”
[ <회복>을 사용합니다. ]
[ 대상에게 <하급 치료>가 적용됩니다. ]
렌의 포지션은 서포터.
분류는 생활지원형으로 되어 있지만 그건 생활지원 쪽으로 특성과 스킬이 좀 더 특화되어 있어 그렇지, 그의 근본은 플레이어들을 치료하고 버프를 걸어주는 힐러였다.
응급조치를 마친 렌은 이어서 인벤토리에서 회복 포션 한 병과 헌터들의 전투식량이라 불리우는 ‘생존바’ 하나를 꺼내 그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 빠진 검이 아닌 인벤토리에서 제대로 된 장비들을 꺼내 착용하기 시작했다.
“자, 자네……?”
“혹시 영주군의 규모에 대해 아십니까?”
비장하기 그지없는 렌의 눈빛.
그 눈빛에 토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못 말리겠군. 설마 혼자서 전부 상대할 셈인가?”
“적에 대해 잘 안다면, 그리고 전략을 잘 짠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죠.”
“그렇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야겠군. 이런 의인이 나서는데 마을의 토박이인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테니.”
토벤과 렌의 눈에 비장함이 감돈다.
*콰앙!!
거친 폭발음.
그 소리에 지하감옥 경계를 서던 사병이 화들짝 잠에서 깼다.
“무, 뭐야?”
“나다, 이 자식아.”
“넌 낮에 잡혀 온 외지인 용…… 크허억!!”
경계병의 얼굴에 작렬하는 렌의 몽둥이.
그는 서포터이자 스카우터.
허나 그 근본은 힐러와 더불어 전장에서 활약하던 ‘팔라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렌은 자신이 전사가 될 때마다 입는 판금 갑옷과 거대한 양철방패, 그리고 끝이 묵직한 쇠몽둥이를 들었다.
힘은 충분하다.
근력과 체력을 상승시켜 주는 버프 스킬이 자신에게 적용 중이었으니까.
렌은 거침없이 지하감옥을 나섰다.
다행히 지하감옥은 영주성 내에 지어진 것으로 덕분에 힘들게 외부에서부터 성을 뚫고 들고 올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영주는 2층에 있다고 했다.’
영주는 대저택 같은 성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높이가 최대 3층 밖에 이르지 않아 저택의 내부 구조만 잘 안다면 영주에게 닿는 건 시간 문제였다.
렌은 달렸다.
몸을 짓누르는 장비들은 무거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힘차게 달렸다.
“치, 침입자다!”
“기사단! 기사단을 불러!!”
“늦었어!!”
콰앙!!
온갖 버프로 무장한 렌은 초원을 달리는 무소와 같았다.
무소처럼 달리는 렌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개중에는 낮에 보았던 영주군의 리더, 군장도 보였으나 그라고 해서 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놈은 또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야!”
“어어, 군장님! 놈이 위층으로 향합니다.”
“뭐라고?”
렌이 위층으로 향한다는 걸 알았을 때 군장을 비롯한 성 내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정체 모를 녀석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제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막아! 얼른!!”
“늦었어!”
뒤늦게 영주군이 몰렸지만 렌이 더 빨랐다.
렌은 저돌적이고 우직하게 나아가 이번 스테이지의 핵심 빌런인 영주의 침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곳에는 잠에서 막 깬,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젊은 영주가 어벙한 얼굴로 침대에 반쯤 앉아 있었다.
“저놈이군.”
렌의 몸이 밝게 빛났다.
렌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공격 스킬 중 하나인 나름대로 필살기라 여기는 공격 스킬, ‘신성한 돌격’이었다.
[ <신성한 돌격>이 발동됩니다. ]
[ 돌진 속도를 200% 향상시키며 파괴력과 순간 방어력을 각각 250%씩 증대시킵니다. ]
스킬을 발동시킨 렌이 영주에게 달려든다. 젊은 영주는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무, 뭐야! 으아아아!!”
“죽어라, 검은 영주!”
렌의 외침.
이윽고 렌의 돌격이 영주에게 닿으려던 순간!
“쯧쯧, 스카우터란 놈이 이리 멍청하다니.”
영주와 렌 사이에, 헨리가 나타났다.